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89회 아벨의 후예 Ch 16. 외계행성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04 | 회차평점 ![]() |
Chapter 16. Intergalactic : 외계행성
인터갤럭틱 호에서의 생활도 어느새 한 달 가까이 지나갔다. 바깥 세상에서 흐른 시간은 우주 표준 시간으로 불과 열흘 남짓이었다. 그러나 안의 사정은 달랐다.
인터갤럭틱 호는 차원 너머와 웜홀, 심지어는 인공 다중우주나 벌크 상의 다른 멤브레인까지, 온갖 영역을 오가는 함선이었다. 자연히 통상의 시공간 개념과는 다른 달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사실이 권태감 이외의 별도의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함선에 탑승한 대원들은 이미 피코머신을 주입받아 노화라는 족쇄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상태였다. 덕분에 그들은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거뜬히 수용하였다.
그 사이에 윤혁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다양한 유형의 실험을 거쳤다. 처음에는 죽을 듯 아팠지만, 차츰 고통에도 익숙해져 갔다. 알트루즘의 효력 덕택에 윤혁의 육신은 빠른 속도로 안정화되었다.
고통을 거듭 짊어질수록 그의 몸은 점점 더 튼튼해졌다.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하지만 괴로움은 괴로움이었다. 제아무리 굳건한 사람도 끝없는 고난을 이겨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루디아는 윤혁이 하루 일정을 마치고 지친 채 돌아오면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위로, 권면, 기도를 나누어주었다. 오브젝트로서의 안정화 능력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정서적인 도움이 윤혁에게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자연히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점점 깊어졌다. 병간호를 받을 때 마음이 열리기가 가장 쉬운 법이니까.
“언제든 못 견디겠으면 돌아가겠다고 하자.”
루디아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해주며 말했다.
“괜찮아. 죽는 일도 아닌데 뭘.”
“너는 항상 무리해서 탈이야.”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게 어딨니.”
그래도 이런 소소한 대화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힘이 샘솟았다.
한편 항해하던 한 달 내내, 데미안은 주기적으로 윤혁에게 텔레파시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그는 그때마다 카이젤의 전언도 같이 전했다. 카이젤의 의견은 늘 간단명료하고 쿨했다. 언제라도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고. 알트루즘과 에고이즘이 같이 근접해있으면 굳이 이런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고.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쉽지 않아보이는 기색이었다. 허나.
‘하지만 두 힘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알트루즘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그러나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윤혁이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러면 애써 외계행성 주민들을 살리려던 각오가 허사로 돌아간다.’
이미 칼은 뽑았다. 칼집에 다시 넣지는 못한다. 무라도 베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어찌 고개를 들겠는가. 윤혁은 자신의 선택을 무의미한 헛발걸음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형에게 괜찮다며 정중히 거절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윽고 정확히 한 달째가 되던 날, 그 전까지 수행하던 31가지 종류의 실험보다 훨씬 강력한 실험이 개시되었다. 알트루즘의 잠재력을 견인해내고 다양한 기능을 생성 후 분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워낙 복잡한 기전이라 윤혁의 머리로는 상황 이해가 미처 다 되지 못했지만, 그의 몸은 대강의 변화를 감지하였다. 그는 실험을 거치면서 알트루즘의 유용성이 점점 증대되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
그와 동시에 상당한 신체적, 감각적 부담이 전신을 휘감았다. 극렬한 고통은 전보다 줄었지만, 마치 어떤 저주 같은 기운이 몸을 서서히 침식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심장에서부터 뻗어나온 검은 문양이 몸 곳곳에 새겨지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윤혁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에게 보이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고통을 겨우 견뎌낸 뒤 윤혁은 땀을 닦으며 태헌의 의학적 설명을 들었다. 태헌도 실험 원리를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으나 그래도 전문가답게 윤혁의 현재 신체적 상황을 가르쳐주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해설해주었다면 영락없이 실험용 쥐가 된 기분이었겠지만, 태헌 덕에 부담감은 훨씬 놓였다. 심지어 캡슐 안에서 흠뻑 젖은 채 벗은 상태로 세워져도 별 부담이 없을 정도였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은 알겠지?”
“네, 고마워요.”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자. 측정치가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되고 있어. 재생기능도 전보다 확연히 높아졌고. 우리로서는 네가 잘못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게 전부니 보증은 해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징후가 많이 보여.”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태헌은 윤혁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졸업 후에 어떻게 학위를 땄는지, 지구에서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자신의 은사들과 스승들은 누구누구인지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터놓았다. 윤혁 또한 지난 선교 여행을 비롯해 지난 경험들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멋있네. 하기야 너는 학창 시절부터 워낙에 신앙심이 독실했었지. 게다가 용감하게 도전하는 모습, 참 보기 좋네. 끝까지 응원할게.”
“고마워요.”
물론 윤혁도 초인이니 인류연합 시스템이니 위버멘쉬니 하는, 지나치게 핵심적인 차원의 정보는 일부러 떠들어대지 않았다. 입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래도 전처럼 아예 모든 것이 기밀화된 건 아니었다. 이미 전면개방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태헌도 하늘도시, 아니 현재는 Upol 행정구역으로 재편된 우주 콜로니들에 대해 상당량 알고 있었다. 제법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우주 인류와 적극적인 교류를 위해 먼 곳에 나아가는 꿈도 갖고 있었다.
‘그거 잘 됐네.’
윤혁은 그런 태헌의 호기심을 간접적으로나마 충족시켜주었다.
“우주에는 정말로 형이 상상조차 못 할 신비들이 넘쳐날거예요.”
“그거 기대되는걸.”
“하하, 꼭 좋은 방향만은 아닐 테지만요.”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원래 그렇지 뭐.”
한편으로는 둘은 예전에는 잘 몰랐던 서로의 숨겨진 면모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금 친분을 밑바탕부터 형성해가면서 윤혁은 여러 생각을 갖게 되었다. 리온을 만나기 전의 자신은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고 여겨왔었다. 즉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워낙 기독교를 무시하던 사회 풍조가 팽배한 탓도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멀어질까 봐 두렵기도 했었지.’
그렇게 철 없던 그는가 선교팀에 합류하고서야 비로소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의 가치와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쉽게도 그때는 이미 옛 친구들과는 거리가 멀어진 뒤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 후로 무수히 많은 하늘도시를 순회하며 생전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고 나름 열매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렇게 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아쉬운 생각도 들었달까.
‘왜 예전의 나는 가까운 이웃에게 흔쾌히 주님을 소개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모르는 사람 백만 명에게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것보다 내 바로 옆, 나의 근처에 거하는 이웃 한 명에게 진심을 다해 진리를 나누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은 아닐까? 아니, 무엇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귀중한 일임은 틀림 없었다.
‘당분간은 태헌이 형과 오랫동안 같이 있을 테지.’
오랫동안 함께 했던 가까운 이를 전도하는 것. 묻어두고 있었던 의무에 대한 희망이 다시금 피어났다. 그것은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를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
녹초가 되어 숙소에 돌아온 윤혁. 그의 옆에 루디아가 다가왔다. 둘은 앉아서 푹 쉬었다. 숙소 밖으로 마음껏 돌아다닐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루디아는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상처를 좀 보여주지 않을래.”
“어, 어디를?”
“심장쪽 근처 말이야.”
상의를 벗어달라는 의미임을 깨달은 윤혁은 망설였다. 사실 지난 두 차례의 여행 때도 종종 우연히 보인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부끄러움이 상당해 망설여졌다. 불쾌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평범한 친구 사이, 그 이상의 낯선 감정이 저도 모르게 스며들어서인지 어색했을 뿐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루디아에게는 그저 치유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텐데.
“아, 알았어.”
그답지 않게 말을 조금 더듬으며 윤혁은 티셔츠를 탈의해 보였다. 과연 가슴 중앙에서부터 뻗어나오는 희미한 빛을 머금은 혈관선이 보였다. 염증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몸속에 어떤 힘이 스며든 것 같아 보였다.
‘이건 대체 무슨 증상일까?“
그리고 우주 인류의 불확정성을 짊어진 영향인지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들도 같이 보였다. 루디아는 찬찬히 조심스레 자기 손을 윤혁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댔다. 이내 모종의 물리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더니 윤혁의 몸이 회복되었다.
“너 박동이 엄청나게 잘 느껴지는 편이구나.”
“어? 아아, 그, 그게…….”
윤혁으로서도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왜 이리도 심장이 거칠게 뛰지? 알트루즘과 융합한 영향인가? 그래서 격동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꾸 루디아의 손이 살갗에 닿을 때 느껴지는 심리적 감각이 무엇인지 혼동되었다.
심리적인 평온감, 몸이 회복될 때 느껴지는 안정감, 심장이 오브젝트와 반응하여 나타나는 움직임, 그리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 유대감, 소년의 순수한 부끄러움,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인가?
‘말도 안 돼.’
엄한 결론에 도달한 윤혁은 도리질하며 부정해보았다. 루디아는 그에게 친구였다. 누구와도 바꾸지 못할 소중한 친구. 이런 엉뚱한 생각을 품어도 될 리가. 평생 이성 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가늠조차 못 해보았던 윤혁은 이 상황이 너무도 어색하고 난처했다.
하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루디아를 바라보는 마음은 이전에 품었던 순수한 우정과는 아주 조금 다른 성질의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변화의 방향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색다르고 신비로운 것이었다.
“다 되었어.”
“……고, 고마워.”
저도 모르게 뺨을 붉힌 윤혁은 황급히 부끄러워하며 티셔츠를 몸에 걸쳤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몸이 나아졌다. 그래, 어쩌면 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느낀 감정을 착각했을지도 모르지.
*
“아가씨, 도련님, 저녁 준비되었어요.”
겔다가 상냥한 목소리로 둘을 부엌으로 초대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며칠 간의 경험을 통해 그녀의 믿음직스러운 요리 솜씨를 익히 알게 된 둘은 지체없이 식탁에 앉았다. 가정부 로봇들이 많은 덕에 딱히 도울 허드렛일은 없어 보였다. 윤혁이 자신도 요리를 할 줄 안다면서 동참하려 했었지만, 그때마다 겔다는 “도련님은 피곤하실 테니 푹 쉬셔야 해요.”라고 말하며 만류했다.
겔다는 아이 돌보는 재주를 제하고도 참 다재다능했다. 살림이라면 못하는 게 없어 보였다. 그 덕분에 근 한 달간 윤혁과 루디아는 호강을 누리고 있었다. 편안한 숙박 시설, 로봇들의 봉사, 그리고 겔다의 정서적 지지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도 되나 싶었지만, 연구 시설에서 겪는 고통 어린 몸부림을 생각해보니 조금은 보상으로 쳐도 될 듯했다.
“많이 아프셨죠, 윤혁 도련님.”
“실험 말씀이세요? 아, 처음에는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익숙해요.”
“그래도 점차 실험 강도가 높아질 테죠. 힘들면 제게 기댈 품을 드릴게요.”
“고마워요. 마음이 좀 놓이네요.”
동시에 겔다는 루디아에게 윤혁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카이 도련님이 그러셨는데 두 분 사이에 작동하는 ‘그 힘’은 정서적 깊이에 영향을 많이 받는대요. 게다가 루디아 아가씨의 경우에 딱히 오브젝트로 재생성되실 때 특정한 기능을 고정해두지 않았대요. 즉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능력을 계발해갈 수 있다는 뜻이죠.”
“제가 윤혁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깊이에 비례해서 제 기능이 성장하리라고 이해하면 되나요?”
“맞아요. 그 마음이 순수할수록 강력하고 영구적인 능력 발현을 일으킨답니다.”
그래서 겔다는 윤혁과 루디아 둘 사이에 자연스러운 정서 교류와 접촉이 있어야 한다면서 권장했다. 윤혁은 접촉이란 단어에 헛기침하며 사레들릴 뻔했지만, 루디아는 그저 순진하게 새겨들었다. 겔다는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느낌을 감지해냈지만, 저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리라고 믿고 모르는 척해주었다.
“아가씨, 윤혁 도련님 잘생기셨죠?”
장난스레 겔다가 내던진 말에 윤혁은 한 번 더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맞아요.”
루디아는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호호, 저도 그렇게 생각 했답니다. 카이 도련님이 화려한 조각상과 같다면 윤혁 도련님은 그분과 비슷한 모습이면서도 분위기는 수수하고 정이 가는 느낌이에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이랄까요.”
“형이랑은 비교하지 마세요. 솔직히 말해서 그 인간은 차원이 다르잖아요. 저보다 만 배쯤은 더 낫단 말이죠?”
윤혁은 말도 안 된다며 반발했다.
“이목구비의 형태가 비슷하다고 하던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았던가요?”
“그래봤자 정교함 자체가 급이 다르죠. 코미디 만화 작화체랑 사실주의 거장의 그림체 차이랄까.”
손사래 치며 아무 말이 내뱉는 윤혁의 농담에 루디아와 겔다가 까르르 웃었다.
“난 그래도 네 얼굴이 더 맘에 드는데.”
“어, 어?”
예고없이 급습해오는 루디아의 발언에 윤혁을 잠시 얼을 놓았다.
“너에게선 선량함과 순수함이 느껴지거든. 표정에서부터 그게 느껴져.”
진지하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저 위로해주려는 빈말?
“그,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윤혁은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말을 꺼내는 와중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새 왜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윤혁은 자신의 난처한 변화가 조금은 의아했다.
(다음 회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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