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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4회 아벨의 후예 Ch 53. 카이젤과 스테판 (4)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27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압도적인 광경.’

 

 

리얼리티-시뮬레이션 축, 벌크-멤브레인 축, 소스-홀로그래피 축 모두가 일제히 교차하는 궁극의 원점. 지구혼과 천체혼들이 서로의 속성을 교류하는 실질적인 ‘혼의 거래처’. 메이저급 초지능체들과 통일시스템의 고향이 위치한, 우주 인류 통치의 중심점. 낡디낡은 외곽 세계만 전전하던 스테판으로서는 수도의 위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인류가 정복한 모든 차원이 여기서 하나로 만나는 건가?’

 

 

“그렇군, 너는…….”

 

 

넋을 놓던 중, 어디선가 텔레파시 음성이 들려왔다.

 

 

“동생 녀석이 데리고 다녔던, 진이 회수했던, 칼리드가 손댔던 그 친구로군. 엘이 만들어낸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 유일한 완성작. 지독하리만큼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야. 돌고 돌아서 다시 네게로 바통이 돌아왔군.”

 

 

“당신은 설마?”

 

 

스테판은 본능적으로 방향을 깨닫고 고개를 올렸다. 무수히 많은 도시가 교차하는 중심부의 거대한 원, 곧 지구혼이 자리한 쪽으로부터 한 형체가 강림했다. 이번에는 근진계가 아닌지라 선명하게 물리적 모양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존재가 바로?’

 

 

과연 그것은 괴물도 유령도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어두운색 바탕의 근사한 제복을 흐트러짐 없이 차려입고 있었으며 온몸에서 기품과 위엄과 고귀함을 저절로 발산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기운과 존재감을 흡수하여 홀로 형형히 광채를 내는 자. 가면을 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군, 이제야 인지(認知) 작용이 허락되는 모양이오.’

 

 

제3 필드에서 보았던 ‘무한한 공허 너머의 존재’. 그 대상의 정체가 바로 저 사람이었다. 그것은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도, 무형의 시스템도, 온 인류가 추구하는 사상이나 우상도, 혹은 인류를 지배하는 인공적 괴물도 아니었다. 스테판이 본대로 살아 숨 쉬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압도적이군.’

 

 

기이한 점이 있다면, 그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인간이었다. 지금껏 보아온 모든 강적, 이를테면 자신의 뇌를 해부하려 했던 칼리드나 제1 필드에서 시험을 내렸던 니알라토텝, 그리고 경합 전에 내려와 자신을 시험했던 두 최상위 초인을 스테판은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그자들마저 먼지 한 톨로 느껴지게 할 만큼 거대한 존재감을 뿜었다. 지성, 지혜, 외양, 무력, 권능, 권세, 부, 인망까지 모든 면에서.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졌다. 현재는 자신을 배려해 최대한 기척을 억누르고 있다지만,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초능력을 담은 채 그 높은 압력을 갈무리하고 있는 모양이 선히 감지되었다. 극히 일부분의 힘만 해방해도 공간 전역이 송두리째 붕괴할 위력이었다.

 

 

‘저 사람이 바로 인류연합의 수장…….’

 

 

남자는 유유히 공중을 가로질러 스테판 바로 앞에 섰다.

 

 

‘말로만 듣던, 윤혁 군의 잘난 이복형이구려.’

 

 

그가 입은 제복 너머로 무신(武神)의 탄탄한 육체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존재하는 모든 조형미를 죄다 끌어모아 한데로 합쳐놓은 듯한 완전함. 가만히 있는 자태만으로도 온몸이 패기를 발산했다. 드러난 얼굴 없이 신체만으로도 독보적인 격이었다. 숨 막히리만큼 강인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키는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신화 속 위대한 영웅을 연상시키는 기골을 직접 마주하자 용감한 스테판조차 저절로 위축되었다.

 

 

“축하해주지.”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인사가 던져졌다.

 

 

“결국, 동지들을 짓밟고 여기까지 올라왔군.”

 

 

스테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짓밟고 왔다라……, 본의는 아니었으나, 사실이니 반박할 수 없소.’

 

 

카이젤은 호랑이가 작은 쥐를 농락하듯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

 

 

“과연 넘버 111은 다르긴 하군.”

 

 

“……나 역시 그대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이오.”

 

 

그 순간, 태양 같은 금안이 형형히 빛을 발했다. 폰들의 눈이 떠올랐다.

 

 

‘역시 그들이 언급했던 킹이 당신이었소.’

 

 

차이가 있다면 느껴지는 존재의 격으로, 폰들 따위와는 천지 차이였다.

 

 

‘저것이 원본 현자의 눈이라.’

 

 

스테판은 애써 두려움을 갈무리하며 사내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비록 순간적인 위압감에 잠시 동요했지만, 스테판의 눈에는 증오심도, 두려움도, 편견도, 왜곡된 시선도 담기지 않았다. 그는 정면으로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참으로 막강한 위력의 눈이오. 하지만 그 너머에 담긴 마음은…….’

 

 

“아참, 그렇군. 소원을 들어줘야지.”

 

 

카이젤이 피식 비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으로 소원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참고로 언어를 매개체로 실현되지는 않아. 그러니 굳이 램프의 요정에게 하는 것처럼 말로 정리해서 서너 개나 한 개를 요약할 필요는 없다. 이 물건이 네 속의 깊은 의도를 꿰뚫어 감찰할 테니까.”

 

 

그는 허공에서 한 쌍의 반지를 소환했다. 검은색 금속으로 된 재질이었다.

 

 

“이건 윤혁이 보유했던 바로 그 물건이구려.”

 

 

“내 동생과 함께 돌아다녔을 때 봤던 모양이군. 그래, 동일한 기술이 기초가 된 것이지. 다만, 이쪽의 쌍이 훨씬 더 개량된 기술로 되어있다. 현실 조작에 근접하게 다가간 힘이지.”

 

 

카이젤의 작은 음성이 스테판의 귀에 직접 텔레포트 되듯 전송되어 속삭이듯 살며시 간질였다.

 

 

“내가 하나를 가질 테니 네가 나머지 하나를 취해라. 그러면 너와 내 정신이 일시적으로 연결된다. 이를 통해 네 소원을 내가 읽게 된다. 그것이 어떤 내용이건 상관없어. 개인적 욕망의 충족이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이건, 혹은 네 신앙적 세계관을 현실에 실현하는 것이건 말이야. 물론, 이후 파생될 일들에 관해서는 철저히 너의 책임이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카이젤은 속으로 비웃었다. QBE가 특이점까지 농축되어 만들어진 이 커버넌트 링에는 분명 현실 조작에 근접한 힘이 담겨있었다. 그 힘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소원을 가능케 해줄 능력이었다.

 

 

하지만 소원이 성취되는 과정은 소원 보유자가 원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분명 소원 내용 자체는 성취되겠지만, 그 대가로 차라리 소원을 빌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할 만한 결실이 뒤따르게 된다.

 

 

그때 스테판이 반지를 내민 카이젤의 손을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오.”

 

 

“……그게 무슨 말이지?”

 

 

카이젤의 얼굴이 냉혹하게 굳었다.

 

 

“처음에는 그 제안에 혹했으나 이제는 나와 별 상관없는 일이 되었소. 내가 지금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오. 내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왕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우승자에게 되물었다.

 

 

“뭘 묻고 싶지?”

 

 

우승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겸허한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제3 필드……, 그곳에서 나는 공허 너머에 인간이 서 있는 것을 보았소.”

 

 

당황한 카이젤은 멈칫했다.

 

 

‘어째서 아자토스나 마이트레야나 아브락사스 중 하나를 보지 않았지?’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스테판은 진심이고 진지했다.

 

 

“한 가지 더, 난 제3 필드의 순례길에서 어떤 악몽의 연쇄를 보았소. 인공 피조물이나 인간들을 가두는 인위적 악몽이 아니라……, 한 개인이 실제로 겪은 악몽이었소. 그 기억이 모두 남아있지는 않소. 하지만 이곳에 온 덕분에 혼잡했던 내 머릿속 파편들이 대강 맞춰졌소.”

 

 

그것은 당황의 시작에 불과했다.

 

 

“묻겠소. 혹시……, 당신 기억 속의 악몽이오? 그 기억의 주인은 당신이오? ”

 

 

침묵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폭풍 전야의 고요였다.

 

 

‘내 예상이 맞는 듯하오, 데이빗.’

 

 

스테판은 망설이지 않고 더 나아갔다. 쐐기를 박기 위해.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묻길 원하오. 나는 그 기억이 누군가가 당신에게 행했던 ‘죄악’의 기억이라고 확신하오. 혹시라도 나의 오판이라면 지금 교정해 주시길 바라오.”

 

 

냉랭한 눈빛이 스테판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하지만 이제 망설이며 떨리는 쪽은 오히려 스테판이 아니라 카이젤의 눈동자 쪽이었다.

 

 

“마지막으로 송구함을 무릅쓰고 한 번만 더 묻겠소. 그 악을 행했던 자가 누구요? 왜 나의 표식 속에 그날의 기억이 남아있는 거요?”

 

 

제3 필드를 떠나기 직전, 스테판은 깨달음을 하나 더 얻었다. 후보자들이 공허 너머의 존재를 직시할 때 각자 인지한 형상, 그것은 이레귤러들의 속에 내재된 왜곡된 일곱 표식을 렌즈로 삼아 뒤틀려 투영된 상이었다. 말하자면 스테판이 조금 전에 건너온 악몽의 연쇄도 바로 그 우주 인류 전용 표식 속에 담긴 기록인 ‘원죄’ 속 한 장면이 이레귤러들의 세계관에 맞게 형상화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른 후보자들은 모두 뒤틀린 버전으로 그것을 보았다면, 스테판 혼자서 원본을 왜곡 없이 그대로 감찰하였다. 그의 이해력은 아무런 초월적 지적 능력 없이도 이 사실에 기어코 감히 다다랐다.

 

 

“네 녀석이 감히!”

 

 

“혹시 죄인은……, 우리를 낳은 조상, 우리의 시작인 최초의 뿌리였소?”

 

 

마침내 스테판은 바른 진실을 추리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눈앞의 상대가 고요함을 유지하지 못한 채 떠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는 자신의 추리가 진실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차마 외면하고 싶었던, 불편하고 가슴 아픈 비극.

 

 

‘그렇구려. 진정 사악한 존재는 인류연합이 아니었소.’

 

 

찢어질 듯한 내적 고통이 스테판의 마음을 집어삼켰다.

 

 

‘도리어 우리 모두가 가해자였소.’

 

 

부정할 길이 없었다. 그 일곱 표식은 그들이 실제로 제2의 원죄를 짊어졌으며 그 안에 동참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표식의 허가를 통해 탄생했고 표식을 매개로 시간축을 넘어 그 ‘어두운 죄악이 자행된 나흘’에 동참했다. 이것은 단순한 연좌제가 아닌, 태아 때부터 실제로 동참한 공범죄에 대한 징벌이었다.

 

 

아니,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걸 떠나서 그들은 원래 사형되어 마땅했던 행악자들이 낳은 후손으로 역사의 예정 안에 없었다. 그들은 피해자 앞에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나에게 소원을 맡겨줘서 고마웠소, 친구들. 하지만 정말 미안하오. 그걸 이뤄줄 수 없게 되고야 말았소. 어리석은 나를 신뢰해 주어서 고맙고 죄송하오.’

 

 

여섯 후보자를 향해 마음속으로 통탄의 사과를 전하였다.

 

 

“그래. 그런데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뭐가 달라지지?”

 

 

이내 냉혹한 카이젤의 음성이 잔인하게 진실을 확증해 주었다. 스테판은 마지막 한 점의 마음까지 내려놓고는 죄인 된 심정으로 무릎 꿇었다. 고통스러운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소원을 빌 자격 따위는, 내게 없소.”

 

 

“……뭐?”

 

 

“나와 우리, 그리고 우리 조상이 하나님께, 그리고 당신에게도 죄악을 저질렀소. 내게는 감히 당신에게 용서를 얻을 자격조차도 없소.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오.”

 

 

순례자는 깊은 참회의 심정으로 작게 탄식하듯 내뱉었다.

 

 

“우리가 당신에게 잘못했소. 미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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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여기서부터가 진짜입니다..... 3부의 하이라이트로 진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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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3회 아벨의 후예 Ch 53. 카이젤과 스테판 (3)
등록일 2026-07-23 | 조회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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