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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40회 아벨의 후예 Ch 54. 승리 (6)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8.14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그래서 넌 내게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건가.”

 

 

카이젤이 스테판의 생각들을 꿰뚫어 보며 허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허 건너편에서 괴이를 본 자들, 오로지 너만은 인간을 목격했지.”

 

 

다른 인간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마저 인류연합 수장의 실체를 바라보며 우상화된 형상, 공포화된 형상, 인간을 탈피해 버린 극악의 초월자를 바라보았을 때 스테판만 홀로 한 인격체를 바라보았다. 설령 한없이 적그리스도에 근접하게 되어버린 존재라 할지라도 일단 인간인 이상 스테판에게는 여전히 긍휼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이는 그가 은혜의 날에 속한 은혜 속의 사람이라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르지.”

 

 

허탈해진 카이젤은 애써 따스함을 부정해 보았다.

 

 

“아직 늦지 않았소.”

 

 

“초자연계의 왕……, 그분께서 설마 날 받아들일 리가. 틀림없이 날 용서하지 않을 거다.”

 

 

처음으로 카이젤은 신을 향해서도 존칭을 표했다.

 

 

“당신이 인간이고 하나님의 형상인 이상,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가능성이 있소.”

 

 

“…….”

 

 

“그분의 용서는 거대하오. 그 권세는 어떤 거대한 죄보다도 무한히 크오.”

 

 

“무리다. 이미 나를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신이 아무리 사랑이 넘친다 한들, 궤를 벗어난 존재를 받아들일까? 이미 초인들의 초인은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났다. 신체, 정신, 영혼, 모든 영역에서 전부. 이것은 그의 삯이었다. 위대한 힘, 의식의 초월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불로불사, 무수한 상위 권능, 상위 차원마저 조작할 일곱 개의 메이저급 초지능체, 시스템을 통제하는 지배력까지.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랬기에 존재의 본질을 잘 뚫어보는 넘버 1도 왕에게서 끓어오르는 혼돈의 형상을 본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스테판은 생각이 달랐다.

 

 

“한 인격체를 인간으로 정의하는 기준은 그런 것이 아니오. 당신 안에 창조주의 형상이 남아있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간으로 바라보시오. 그리고 당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타게 당신을 찾으시오.”

 

 

왜일까. 초인으로 태어나 평생 그토록 두려워했던 존재인 신. 그분이 보내신 스테판이란 이름의 한 전령. 이 종의 선언은 왠지 두려우면서도 기대감을 주었다.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엉킨 실타래를 풀어줄 듯한 위로를 주었다.

 

 

“내 말이 거짓으로 여겨진다면 내 속을 기꺼이 들여다보시오.”

 

 

“내게 네 혼을 파헤쳐지는 일을 겪고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히려 이렇게 해서라도 내 진심을 증명할 수 있다면.”

 

 

스테판은 무서움 없이 상대를 똑바로 응시했다.

 

 

“얼마든지 견디겠소.”

 

 

되려 더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카이젤은 다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 장면을 엿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건 자신의 하잘것없는 격으로는 감히 꿰뚫어 보지 못했을 영역이다. 문제의 힘이 솟구치는 근원은 뇌 같은 피상적인 정신 중추가 아닌, 가슴 속 깊은 ‘영’이었다. 감히 인간은 뚫어보지 못하는 신만의 성역.

 

 

이 순간 어떤 보이지 않는 권세가 강권적으로 스테판의 심령을 카이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흡사 주께서 낙원에서 안식하던 사무엘의 혼을 보여주어 사울 왕이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카이젤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번 길에서 이복동생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거대한 권능과 같은 본질의 존재감이었다. 초인들의 왕마저 일순간 경외감에 무릎 꿇게 만드는 기운, 한없이 투명한 깨끗함, 그것은 초자연 너머의 거룩한 정점이었다.

 

 

왕은 그때처럼 뒷걸음질 쳤다. 수치감과 죄책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무턱대고 저 앞에서 버티다가는 순식간에 죽어버릴 것 같았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기 직전 한없이 희고 순결한 임재의 압박감이 사라졌다. 아직 그가 감당치 못할 것을 알고 일부러 물러나 준 걸까.

 

 

이제 그 자리에는 아까처럼 수수한 모습의 작은 질그릇, 스테판만 남아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하지?”

 

 

“무엇을 말이오?”

 

 

“나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어도 됐을 텐데…….”

 

 

카이젤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굳이 정을 붙이려 노력하지 않고 방관해도 되지 않은가. 그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 이유가 그렇게 중요하오?”

 

 

스테판의 대답은 간결했다.

 

 

“내가 소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처음에 물었소? 난 소원이 없소. 왜냐하면 내 소원은 이미 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기 때문이오. 그분이 내 소원에 변화를 주어 그분의 소원과 같은 내용으로 바꾸어주셨소. 또한 그분의 소원은 그분이 스스로 이루시기에 내게는 그것을 이루겠다고 바둥거릴 필요가 없소.”

 

 

“…….”

 

 

“굳이 이 자리에서 내가 품은 바람을 하나 말하자면……, 그건 당신의 부서진 마음이 회복을 얻는 것이오. 허락된다면 불행했던 옛일도 모두 지워졌으면 좋겠소. 하지만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반지까지 사용하지는 않을 거요. 그저 기도를 통해 주님이 행하시는 대로 맡길 것이오.”

 

 

“너 대체!”

 

 

“이를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내주겠소. 원한다면 나를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소. 또 당신의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소. 이건 내가 내 의지로 당신과 정하는 약속이오.”

 

 

이 제안은 커버넌트와 그것을 운용하는 기술을 매개로 계약을 고정시키는 인위적인 계약과는 개념이 달랐다. 평범한, 오롯이 신뢰와 신실함만으로 구성된, 친구를 위해 내건 스테판의 신임이자 약속이었다.

 

 

“약속이라고?”

 

 

카이젤은 반신반의의 어투로 되물었다.

 

 

“그렇소. 난 그대의 동생과도 이미 신의를 걸고 약속을 나누었소.”

 

 

“윤혁이 녀석과?”

 

 

“확인해 보아도 좋소.”

 

 

카이젤은 다시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스테판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젠 이런 행위를 상대에게 범하는 것 자체도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확인해 보고 멈추자. 저도 모르게 다짐했다.

 

 

이내 많은 복잡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선교 여행 끝자락에, 윤혁은 형을 꼭 방황에서 구해내겠다고 다짐을 드러내며 자신의 뜻을 친구들과 공유했다. 그 자리에는 선지자와 은인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윤혁의 짐을 나눠 짊어지기로 다짐했다. 스테판도 자신의 뜻을 모두 걸고 그 약속을 함께 맡았다. 두드러진 맹세는 없었어도 이 약속은 스테판에게는 값진 것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준 친구들과의 소중한 약속.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은 심정이 녹아 있는 약속.

 

 

그 무렵의 일들에는 여러 기억들이 복합되어 있었다. 스테판이 세 친구와 더불어 찬양하며 기뻐하는 장면도 스쳤다. 생애 최초로 노래를 통해 신께 영광을 돌리던 그 기쁨이 가슴속에 새겨질 추억으로 녹아 있었다. 리온과 루디아는 노래를 불렀고 윤혁은 건반은 치고 있었다. 스테판은 음치였으나 정성스레 노래를 따라 불렀다. 비록 솜씨는 형편없어도 이들의 얼굴에는 형언치 못할 기쁨이 담겨 있었다. 인간의 지혜로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거대한 감격이었다.

 

 

카이젤의 초지능체들이 자아낸 합주는 그 순수한 평온함에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한편, 3차 경합을 시작하기 전에 성한과 크로스솔져들이 인사를 주고받는 장면이 보였다. 아마 그들이 공유하는 기억이 제1 필드를 넘기 과정에서 스테판에게 전이된 모양이다. 카이젤은 그 잔흔까지 낱낱이 읽을 수 있었다.

 

 

스테판은 물론이고 크로스솔져들과 아버지의 생각까지도 간접적으로 흘러들어왔다. 신을 섬기지 않는 재혁이여도 인간의 마음은 남아있는지라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눅 15:20)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는 새, 그의 심리를 보호하던 방어기제가 하나씩 해제되기 시작했다.

 

 

‘난 아직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조차 안 되어 있었군.’

 

 

한심함에 눈이 저절로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아버지와 동생 녀석은 이미 나를 한 명의 인간으로…….’

 

 

더는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항치 못할 따스함 때문에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이 지점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건 무리이다.’

 

 

아직 그로서는 감히 신과 대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한 스테판의 말이 아직은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항복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견고했던 생각의 성벽에 이제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흡사 초자연계의 왕이 가족들과 스테판을 통해서 공성 퇴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눈에서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처절하게 고문당하는 중에도 아픔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독종, 결빙으로 만들어진 인간인 줄 알았던 그에게는 몹시도 낯선 기분의 현상이었다. 평생 잠금 되었던 눈물샘이 결박에서 풀렸다. 물에 젖은 찬란한 금안은 햇빛을 산란시키듯 빛 조각을 부스러뜨렸다. 적색과 청색의 빛의 선이 옅은 층의 물에 굴절된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마 누군가가 그 모습을 사람의 눈이 아닌 전경의 형태로 바라보았다면 경탄했으리라.

 

 

“반지는 이만 당신이 회수하시오. 내게는 필요 없소.”

 

 

스테판은 카이젤에게 검은 반지를 돌려주었다.

 

 

“만일 내게 그것을 강요하려 하건대, 약속의 징표라고 의미를 부여해도 좋소. 이건 원래 현실 조작을 하려고 만든 힘이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쓰시오. 이 힘으로 내게 무언가를 강요해도 좋소. 하지만 내가 내건 약속은 이미 주님께서 증인이 되셨으니 굳이 그걸 써서 공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당신과의 약속도, 윤혁과의 약속과 난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늘 명심하겠소.”

 

 

그러자 반지가 스테판의 선언을 인식했다. 그것은 저절로 카이젤의 손가락에 채워졌다. 한 쌍의 커버넌트 링 중 스테판에게 돌아갔어야 할 나머지 한 카운터파트는 형체를 잃고 무형의 검은 물체로 돌아갔다.

 

 

소원을 이용해 상대를 징벌하려던 카이젤의 계획은 참으로 어이없게도 무위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아니, 오히려 자승자박이 되어 카이젤 자신을 묶고야 말았다. 다만, 그가 원래 계획했던 건 비참함이었거늘, 자신에게 반사되어 되돌아온 형벌은 온기의 벌이었다.

 

 

가뜩이나 알트루즘의 공진과 스테판의 마음으로 인한 설득 때문에 허물어져 가던 마음의 장벽이 QBE의 역작용으로 인해 더 빠르게 훼파되었다. 벌어진 틈새를 통해 부드럽고 진심 어린 위로가 스며들었다. 마치 성을 함락하여 마을을 약탈하는 군대처럼 무방비하게 휘몰아쳤다.

 

 

이어서 이번에는 그 여파로 또 다른 두 개의 반지가 생성되었다. 카이젤이 미리 준비해 둔 두 개의 커버넌트가 더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두 형제의 특수 속성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탈취하기 위해서 제작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설정했던 ‘공공의 계약’을 성취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카이젤의 자아와 초자아가 강윤혁과 스테판의 선량함 앞에 틈을 내주는 바람에 그의 왜곡되었던 도덕 체계도 ‘자연법’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재교정되었다. 그 여파로 ‘공공의 계약’이 발동되는 것도 예정보다 더 빠르게 이뤄지고 말았다. 나아가 빼앗으려는 욕망이 약화하고 밀려나는 바람에 ‘그 형제들’과 맺어야 할 커버넌트도 처음 계획과는 다른 형태로 변했다.

 

 

다만 카이젤은 그런 변화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미안하오.”

 

 

이에 왕은 대답 없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번 터진 둑을 막을 길이 없듯 제어할 도리가 없었다. 슬픔과 회한에 휘말려 주저앉은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정적을 유지했다. 강인하기 그지없었던, 아니 늘 강인해야만 했던 그는 소리조차 없이 울컥거리는 감정을 잠잠히 쏟아내었다.

 

 

“이제 괜찮소.”

 

 

스테판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대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니 그만 우시오.”

 

 

자신보다 키도 훨씬 크고 체격도 건장한 사내를 위로하며 스테판은 거듭 ‘미안하오’라는 말만 되뇄다. 상처 입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어린 동물을 돌보는 상냥한 주인의 심정으로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눈앞의 사내는 육체와 정신은 금강석처럼 단단했으나 영혼의 내면은 여리고 연약했다.

 

 

 

 

 

 

 

 

(다음 회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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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회 아벨의 후예 Ch 54. 승리 (5)
등록일 2026-08-12 | 조회수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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