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67회 [1부] 67화. 타르타로스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1.28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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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에 단단한 골격, 곱상한 얼굴의 소유자인 한 흑발의 젊은이.
그는 오늘 산더미처럼 쌓인 회사일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사실 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긴 했다.
빅 이벤트가 전 세계 시민 거의 대부분의 이목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이벤트의 여파는 가히 전쟁 이상의 규모로 예상되는 판이었다.
그러니 단 하나의 중요 정보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은 전략가이자 경영자인 그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에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뭐, 이런 마음가짐으로 덤벼들긴 했으나, 그도 다른 이들처럼 표정이 차차 얼어붙었다.
아무리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 좋은 젊은 기업인이라고 해도 인간 본연의 무의식을 압도하는 글로벌 호러 무비 앞에서는 태연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정작 더 신경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 불편감의 근원은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공포 반응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유례 없는’ 반응이 그 원인이었다.
“어째서지?”
세르빈 루베노스 브라이틀란트.
젊고 오만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 혼자 사는 왕자님.
아니, 문자 그대로 황가의 직계, 그것도 황제와 황후 사이의 첫 아이.
흑발의 고운 미남자 세르빈은 탁월한 경영적 재능과 그에 걸맞지 않은 의외의 유치함을 동시에 지닌 독특한 사내였다.
세계 최대의 초거대 기업의 임원 중 하나이자 자회사 경영자로서 막대한 부를 창출한 그에게 있어서 눈에 차는 ‘우러러봄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딱 한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
“형 저 인간이 왜?”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고 높여보는 대상은 이복형제이자 자신 위의 유일한 손위인 맏형.
자신의 상관인 회장님이기도 하며 자신의 재능을 일깨워주고 인정해준 은인.
동시에 장차 브리튼 제국 전체와 지구 전역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남자.
그런 대단한 형님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세르빈에게 너무도 낯선 장면이었다.
“형이 저렇게까지 겁에 질린 적이 있었던가?”
사후세계의 존재를 세계 앞에서 증명하는 결전의 이벤트가 펼쳐지는 이 순간.
현장이건 먼 곳이건, 사람들은 죄다 실체가 드러난 ‘지옥의 실상’에 온통 이목을 빼앗긴 상태였기에 주변의 다른 것을 확인해볼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동생 세르빈만이 화면에 드러난 형 알렉시스의 표정에서 이상을 발견하였다.
겉보기에는 언뜻 태연함을 유지하는 모양새로 보였다.
하지만 비즈니스 파트너 겸 부하로서 형의 사업을 오랫동안 도와왔던 세르빈은 잘 알았다.
알렉시스는 단 한 번도 자신만만함이나 굳건함을 흐트러뜨린 적 없었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나 커버넌트 그룹을 대표하고 경영하던 자리에서는.
항상 그는 여유로웠고 온갖 위기나 공격 앞에서도 유유이 모든 것을 지켜냈었다.
실패와 도박의 위험조차도 그에게는 아무런 정신적 타격을 주지 못했었다.
다소 오만방자한 세르빈조차도 그런 당당함과 강인함에 반했기에 제 형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정하던 바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알렉시스의 얼굴에 드러난 미묘한 흔들림은 참으로 큰 위화감이었다.
어째서인가?
그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성공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탁월한 성취를 얻어내는 중 아닌가?
사업이나 일이 잘 안 풀릴 때의 알렉시스도 감정적인 연약함을 보인 적은 없었다.
또 성공하거나 승승장구할 때의 그도 흥분감이나 고양감을 경솔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의 계획이 가장 절정에 이르러 승리를 목전에 둔 이 상황에서 흔들린다고?
‘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강철 심장이?’
그만큼 저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과 공포가 막대하다는 뜻인가?
정말 저 공포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제작해낸 것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왔단 말인가?
세르빈으로서는 도저히 이번 일들이 ‘인위적인 장난’이라는 추론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딱히 바라는 결론이 아니었다.
정말 이 세상 너머에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즐거워할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부정할 도리가 없어서 괴로웠다.
“회장님께서 저렇게 흔들리시는 건 처음 보는군요.”
세르빈의 직속 비서관이자 커버넌트 그룹의 유능한 고급 인재인 카밀라.
눈치와 적응의 귀신인 그녀 또한 세르빈처럼 알렉시스 회장의 변화를 알아챘다.
갈색 머리의 이지적인 외모의 미녀는 안경을 고쳐쓰며 차분히 말을 가다듬었다.
“역사상 최강의 위인이라지만, 저분도 엄연히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인간, 그렇기에 우주적 위협 앞에서는 진심으로 겸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분께서는 자신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금지된 상자를 기어코 열어젖히신 셈입니다.”
짙어지는 위압감에 짓눌린 건 현장에 있는 알렉시스만이 아니었다.
먼 곳에 있는 세르빈과 카밀라도 이미 압도되어 침묵에 이른 상태이긴 매한가지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알렉시스를 누르는 건 단순한 생리적 공포나 영적 공포 그 이상으로 보였다.
아마도 책임감 비스무리한 감정이겠지.
결국, 이 문을 열어버린 건 그 자신이니까.
한편, 그 시각에도 지옥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온 편지들의 향연은 지구상의 네트워크들을 충만히 잠식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메시지들과 절규들과 효과음들이 이승에 도달했다.
울부짖으며 절망하는 죄수들의 몸을 통해서, 그들의 뇌파를 통해서, 그리고 생사의 경계를 통해 비집고 흘러나오는 나락 지옥의 고주파수 전파(電波)를 통해서.
그 편지들과 부르짖음과 탄식들의 주인은 다양했다.
뇌사자들의 것, 같이 끌려간 죄수들의 것,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아닌 ‘누군가’의 것.
분석하는 학자들은 세 번째 부류의 존재에 가장 큰 섬뜩함을 느꼈다.
“알렉.”
라지쿠마르도 현황이 자신들의 예상에서 벗어났음을 깨닫고는 떨리는 입술을 억누르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동료를 불렀다.
“인정하기 두렵지만, 이건 우리 이론의 예상치를 벗어난 결과다.”
알렉시스는 대답하지도 못한 채 가까스로 감정을 제어하며 침묵하고 있었다.
“뇌파 공조, 뇌 전기 발생 현상의 공명, 이어지는 혼의 연결, 단순히 이런 프로세스로 진행될 줄로 판단했다. 솔직히 세 번째 단계까지만 해도 현대과학으로 분석할 수 있는 범주 너머의 현상이지. 그런데…….”
이 기괴한 반전은 무어란 말인가?
“최소한 네 번째, 아니 다섯 번째 이상의 단계가 전개된 게 분명하다. 이미 내 인지의 한계도 벗어났어. 우리는 어쩌면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버린 것일지도?”
실험의 실패가 아니다.
지금 그들을 떨게 하는 것은 지나친 단계의 성공이었다.
“어쩌면 저자들은, 송신 쪽인 뇌사자들의 혼이 겪고 있는 사후세계 감각을 공유하는 단계를 넘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라지쿠마르의 머뭇거림 가득한 독백이 알렉시스의 가장 두려운 예상을 긍정해주었다.
“뇌파 공조를 통해 수신을 받던 중 저 수신자들의 혼이, 자기 자신의 혼으로 직접 사후세계로 전송된 것, 현재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어.”
남들이 남들의 죗값으로 겪는 지옥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중이 아니다.
자신들의 죗값으로 주어질 몫인 지옥의 한 터전으로 직접 전송되었다.
혼과 몸의 생물학적인 연결은 유지된 상태로, 한 발은 이승에 한 발은 저승에 걸친 상태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지옥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진짜 실존하는 지옥에 담궈진 격이다.
발꿈치만 붙잡힌 채 스틱스강에 입수되었다는 아킬레스처럼.
“다시 말해서 저들이 지금 겪는 형벌, 뇌사자들이 당하는 몫이 아니야.”
“각자 자기 자신의 몫에 맞는 형벌을 받는 중……, 설마 그런 건가?”
알렉시스도 어느 단계에서는 이미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만일 당초 계획대로 무슬림 자폭 테러범들이 뇌사 상태에서 지옥에서 겪는 절규를 공감각으로 체험하는 수준에서 그쳤더라면?
많아야 수백에서 수천 명이 겪는 체험만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돌고 돌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천만 명 각자에서 나오는 ‘뇌파 데이터’가 각기 달랐다.
철저하게 개별화된 체험이었다.
자백하고 부르짖는 내용도, 탄식하며 후회하는 내용도, 고통의 종류와 세기도, 털어놓는 죄목들의 내용도, 심지어 주변부에서 듣고 있는 ‘또다른 존재’들의 고함소리도, 하나하나 완전히 다르고 각양각색이었다.
“기록해두었나?”
큰 두려움을 마주한 상태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한 알렉시스.
그는 냉정하게 자신이 해야 할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잊지 않았다.
알렉시스의 호령을 받은 AI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소환되어 브리핑하였다.
{네, 황태자 전하.}
{죄수들의 입과 뇌파와 뇌 영상에서 추출해낸 정보들을 남김없이 데이터베이스로 이동시켰습니다.}
{현재 해독 작업 진행 중입니다.}
“잠시 중간 점검을 해보겠다.”
알렉시스는 방대한 데이터들을 빠른 속도로 눈으로 훑었다.
그의 명민한 두뇌가 평소의 열 배의 속도로 회전하였다.
압도적인 암기력과 해석력과 이해력이 발동되었다.
‘거의 대부분 죄를 실토하며 부르짖는 내용들이군.’
죄인들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생생하게 자신의 기억들을 곱씹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의식이 흐려지지도, 모든 것을 망각하지도, 이지를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도리어 살아있을 적보다 몇 배는 더 기억력이 강화된 것이 분명했다.
죄인들은 그 불구덩이에서 쉴새 없이 저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죄들을, 자신의 착각들을, 실수들을, 그리고 걷어차버린 기회의 순간들을.
그 죄목이 어찌나 구체적인지 알렉시스마저도 그 정밀함에 탄복할 지경이었다.
생각으로 범한 죄, 말로 범한 죄, 행동으로 범한 죄, 행한 죄와 행하지 않은 죄.
그 모든 목록들이 그들의 입에서 래퍼의 랩마냥 홍수처럼 쏟아졌다.
심지어 그 죄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물론,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에 행해졌는지까지, 죄수들의 뇌리에서 추출된 정보는 그 모두를 담아내고 있었다.
“알리바이 프로파일, 구축 시작해.”
{라져.}
어떻게 몇 분 남짓한 시간에 수백만 년 동안은 입으로 읊어야 할 정보들이 쏟아져나오는지, 알렉시스로도 원리를 알 길은 없었다.
어쩌면 저들이 접속된 저 ‘영계의 차원’은 물리계와 시간 개념이 다른 것인지도 모르지.
혹은 저들이 지옥과 더불어 ‘신의 심판대’의 장면도 체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이유건 관람자들에게마저 몹시 큰 두려움을 주는 건 매한가지다.
다만, 넋 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고 알렉시스는 이렇게 된 이상 기회를 활용할 작정이었다.
곧 인공지능들은 죄수들의 입과 뇌파와 사념파에서 흘러나온 해독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크의 모든 시설은 물론 세계 전역의 첨단 양자컴퓨터와 슈퍼컴퓨터, 심지어 아이언로드 알파와 베타들까지도 동원되었다.
팀 아르다의 작품들과 그 강력하다던 가디언엔젤들도 자원 봉사로 일을 거들었다.
{정말로 황태자가 열어낸 저 문이 지옥으로 연결되는지 확인해보자.}
가디언엔젤의 본질은 파트너의 선한 의지를 따르는 동료.
이 순간, 사람들의 선한 염원은 정말로 지옥이 실존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해내고 그것을 거짓 없이 모든 이에게 전달하는 데 놓였다.
저 장면들 속에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거짓, 날조, 과장, 왜곡이 섞여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한 범죄 아니겠는가.
가디언엔젤들은 제작자인 황태자의 통제마저도 통하지 않는 이레귤러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얼마든지 제 창조자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맹렬한 칼날이 되어 돌아올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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