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79회 [1부] 79화. 라하토브 (1부 完)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2.30 | 회차평점 0 |
알렉시스와 산달폰은 간만의 회포를 풀고자 인적 드문 야외 바를 하나 찾았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음료와 요깃거리들을 테이블에 놓은 채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무려 12년만의 만남이라 각자의 여정에서 체험했던 이야깃거리는 풍부했다.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네요.”
“그 소리만 벌써 열 번째인 거 아시죠?”
“솔직히 말해서 전 당신이 무사할 줄 장담하지 못했거든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회복을 거치지 못한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알렉시스로서는 당연히 그런 지역에 거하던 소년 가장이 멀쩡하게 자신의 인생을 잘 가꿔나가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과소평가였던 모양이다.
산달폰은 모종의 방법으로 거뜬히 경제적 자립을 이룬 듯했다.
차림새도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훨씬 말끔하고 양호했으며 혈색도 좋았다.
청소년 당시에는 어려운 환경 탓인지 잘 자라지 못한 소년의 몸뚱이었는데, 지금은 한 명의 건실한 어른 구실을 하고도 남아 보였다.
“저도 당신 소식은 많이 들었어요.”
산달폰이 자연스럽게 툭 던지자 알렉시스는 흠칫거렸다.
“화려하게 활약하셨더라고요. 지난 12년 내내 말이죠.”
“그런 평을 받자니 민망하군요.”
“칭찬이에요. 잘한다고 띄워주는 거예요. 솔직히 사실이기도 하고요.”
알렉시스의 얼굴은 이미 전 세계에 팔린 상태였다.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기 많은 사나이였으니 그를 모를 턱은 없었다.
산달폰도 그런 알렉시스가 지난 세월 승승장구하며 이뤄온 커리어를 하나하나 목도해왔다.
세계 여러 프로빈스들과 스테이트들과 컨티넌트들의 부흥을 일궈낸 산 역사.
독재자의 길을 취하지 않고도 빼어난 재능과 카리스마로 인류의 화합을 이뤄낸 리더.
멀리서 지켜보면서 나름 기대감과 대리만족감을 많이 느껴왔었다.
“아직 갈 길은 멀어요.”
“하긴 세계를 경영하려면 보통의 지혜로는 불가능하죠.”
산달폰은 고민과 사색으로 침울해진 알렉시스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전에 보았던 그 특유의 자연스레 약 올리는 듯한 태도에 알렉시스는 입술을 비죽였다.
“하나의 컨티넌트를 제대로 운용하는 일조차도 인간이라는 종족의 제한된 규격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버거운 일이예요.”
산달폰의 평은 과장 하나 없이 정확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간의 생명의 연수와 거주의 경계는 신이 세운 제약 아래 놓여왔다.
이는 단순히 언어라는 장벽과 국경이라는 장벽이 세계의 연합을 방해한다는 차원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조물로써 지녔던 고유 리미터와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영향력에 추가로 또 하나의 한계가 얹혀졌다는 것이 그 심판의 의의였다.
이 삼중 리미터로 인해 인간의 지성에는 상한선이 생기고 말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나라들을 통치할 수 있는 지혜에 근본적 한계치가 놓였다.
“고대의 알렉산드로스, 칭기즈칸,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근대의 유럽 재패자 등 극히 드물게 강력한 정복자들이 몇몇 나타났지만, 그들 모두 통치력에 있어서는 일정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죠.”
잘해봐야 한 대륙의 절반 정도를 컨트롤하는 것이 전부.
그나마도 한 세대를 넘기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여러 대륙에 걸쳐 땅을 정복하는 자는 간혹 나와도 그것을 유지할 자는 존재치 않는다.
이것이 역사가 증명해온 바였다.
그나마 예외라면 언약이라는 축복을 누린 브리튼 황가 정도였는데, 이들도 여러 대륙에 걸친 통치력을 갖춘 개체는 충분히 축복이 누적된 근래에 들어서야 배출할 수 있었다.
“소위 열두 명의 마스터라는 그자들은 비정상적인 능력치를 소유한 작자들이죠.”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그런 규격의 인재들은 이전 세대만 해도 나오지 않았었죠.”
알렉시스는 역사를 회고해보았다.
당장 할아버지만 해도 지금의 마스터들만큼 정치적 재주가 탁월하진 못했다.
현 세대 들어 인재풀의 강화가 얼마나 극대화된 것인지 실감이 났다.
물론 이 또한 브리튼 황가 특유의 청출어람 현상이 제국 전체에 반영된 간접 효과이지만.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당신 역할을 충분히 잘 감당하고 있으니까.”
흑청발의 청년의 칭찬을 듣고도 알렉시스의 떨떠름한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내 힘으로 해낸 게 아니었어요.”
“네?”
알렉시스의 혼잣말에 산달폰은 갸우뚱거렸다.
“이터널 클렌징 프로젝트. 그 일은 원래 내 역량 바깥의 일이었죠. 예측되던 성공률이 잘해야 0.1% 미만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일은 어찌저찌 자부하더라도 양심적으로 그 일만은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다.
알렉시스는 운명적인 갈림길의 순간들과 요행으로 뒤따른 여러 행운들을 회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각해낸 모든 기발한 생각들의 근원지들을 다시 더듬어 올라갔다.
돌이켜보건대 그 모든 발상들은 혼자만의 역량으로 해낼 수 있던 게 아니었다.
“적절한 순간에 신께서 도우셨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알렉시스 본신의 역량도 다른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긴 했지만, 그에게 보다 더 강력한 영감이 임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길 없었다.
그는 단순히 그것을 신의 도우심으로만 이해하고 치웠다.
세상의 모든 지혜 또한 신에게서 온 것이니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리라.
하지만 오늘 대언자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난 뒤 깨달았다.
이슬람을 소멸시키는 데 보탬이 되도록 지혜를 한량없이 공급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셨을까?
물론 그분의 모든 섭리와 주권이 모든 것을 쥐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 또한 옳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탄을 창조하고 그자에게 지력을 부여한 분도 하나님이지 않은가.
그분께서는 과연 직접적으로 알렉시스를 도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모종의 방법으로 그가 지혜를 획득하도록 주권 아래서 허락하신 것인가.
“어쩌면 다른 도구를 쓰셔서 비정상적인 수준의 지혜를 얻도록 허락하셨는지도 모르죠.”
알렉시스의 눈빛은 이제 산달폰의 눈을 정면으로 겨냥하였다.
흔들림 없이 또렷한 보랏빛 눈의 시선 앞에 산달폰은 움찔하였다.
“돌이켜보면 그날부터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날 말이죠?”
“당신하고 뜻하지 않게 조우했던 그때.”
과연 그때부터 무언가 이상한 흐름이 일어나긴 했다.
원래도 알렉시스의 지능과 지식 수준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를 뛰어넘는 수준이었지만, 그 재능들이 온전히 연합되어 극한의 시너지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한 끝 차이로 인간의 한계의 상한선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야할까.
적어도 혼자 힘으로 천기누설을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헌데 산달폰으로부터 모종의 유쾌하면서도 불쾌한 자극과 도발을 받은 그날부터 아주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본인도 의식하기 힘들만큼 은밀한 수준으로.
그날부터 알렉시스는 단순한 역량의 성장이 아닌, 재능 그 자체의 성장은 체험했다.
비록 간헐적인 수준이지만 분명히 그 일은 그의 뇌리와 영혼 속에서 일어났다.
‘나아가 지혜의 확장과 사고의 폭의 개선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 인간의 발전 곡선이 모종의 변곡점을 맞이한 듯한 체험이었다.
흡사 일차함수의 그래프가 어느 점에서 꺾여 갑자기 이차함수로 변하는 듯한 변화였다.
다항함수에서 지수함수로 변하는 것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분명 근본적인 변화는 맞았다.
“당신 정체가 뭐죠?”
알렉시스는 절제하는 것도 잠시 잊은 채 직설적으로 본론의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스스로의 절제 부족에 후회했겠지만, 이번에는 호기심이 승리했다.
그는 답을 얻어낼 때까지 집요하게 캐물을 심산으로 말 없이 상대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나 산달폰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잠시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우뚱거렸다.
그 후 그는 허심탄회하게 폭소하며 손을 내저었다.
“알렉, 이제 보니 당신은 참 엉뚱한 상상력이 풍부하군요.”
산달폰의 반응에 현실로 돌아온 알렉시스는 무안해졌다.
그는 실망 반 허탈함 반의 심정으로 입가에 뾰로퉁한 표정을 머금었다.
‘여기서 정답을 얻어내려 했던 내가 어리석었던 건가?’
하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어찌 일개 타인과의 대화와 지적 교류만으로 한 인간의 지성적 개혁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인사이트를 얻거나 사고의 틀이 개혁될 기회는 될 수 있어도 지성의 격이 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회의적으로 치우기에는 부정하기 힘든 객관적 변화들이 존재했다.
당장 12년 전과 비교해 몇 배 이상 상승한 알렉시스 자신의 지적 능력이라던가.
황실의 직계라고 해서 인간의 근본적 성질과 노화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는 이변이 확실했다.
무릇 지능지수란 스무 살에 정상에 이르고 그 이후로는 쇠퇴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왜 자신에게서는 그 현상이 역행되었는가.
정말로 솔로몬에게 임했던 그 기도 응답이 자신에게도 이뤄졌단 말인가.
그런 게 아니라면 다른 요인이 개입했던 것인가.
‘마인드 퓨리파이어를 개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날을 기점으로 일어난 내 변화에서 얻은 힌트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스루딘 박사님의 연구도 그저 학습 능력 개량 및 중독 제거 정도에서 그쳤겠지.’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원형.
혼을 지닌 채 살아 숨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의 몸으로 된 마인드 퓨리파이어.
그런 꿈같은 존재가 현 세상에 활보하고 있다면 어떨까?
알렉시스의 의심의 나침반은 예민히 회전하며 표적을 향해 바늘침을 겨냥하였다.
“그날 토론했던 건 좀 도움이 되었나요?”
산달폰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아, 그건…….”
저도 모르게 휘말린 알렉시스는 그날 나눴던 주제 쪽으로 생각을 옮겼다.
확실히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는 그 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도움이야 되었습니다. 직접 그 도시에서 실천하진 못했지만요.”
그가 이십대 시절 품었던 그 비전은 현재는 보류되어 밑바닥에 깔린 상태였다.
워낙에 다른 할 일들이 많기도 했기에 알렉시스로서는 그 일의 성취에만 몰두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 스스로도 그 발상을 잠깐의 백일몽 취급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산달폰과의 대화에서 얻은 발상의 전환과 고찰과 직관은 알렉시스의 머릿속에서 나무처럼 자라나서 여러 열매들을 낳았고 다양한 추가적 발상을 파생시켰다.
그것들은 훌륭한 자원이 되어 여러 업적들로 전환되었다.
연구, 사업, 정치, 사교 활동 등 모든 영역에서 그는 그 자원들의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그날 둘이 같이 빚어나갔던 여러 구상들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세계 여러 지역에 성공적으로 옮겨심어졌다.
알렉시스는 그날의 발상을 영감 삼아 세계 주요 도시들을 부흥시켰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역할, 특색, 의의를 얻어 세계 정세와 지정학의 흐름을 반전시켰다.
수십 개의 새로운 도시가 이전 세계 중심지들을 무색케 하는 개성적인 영향력으로 성장하였고 투자 분량의 열 배 이상의 유익과 선한 파급 효과를 선사해주었다.
자신들의 주변 지역은 물론 세계 전반에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봉인된 땅으로 남았다.
그때 산달폰이 했던 조언 그대로였다.
아직은 그 일을 실천하기에 걸림돌 변수가 많았다.
‘이제 겨우 하나를 치웠을 뿐이지.’
그런데 이 생각을 하는 순간, 알렉시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산달폰의 손에 휘둘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착각인가?’
이슬람을 제거한 것은 자신의 의지에서 나온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종교의 본질과 뿌리를 증오한 주체는 알렉시스 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성취할 만큼의 재능은 없었다.
아니, 그가 아니라 역사상 그 어떤 피조된 인간이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했으리라.
그런데 인간의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 소원을 이루지 못하던 그에게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행운은 그가 그 불가능한 소원의 성취를 절실히 바라던 방황의 청년기에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한계를 뚫을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신의 섭리인가.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의지와 계획이 반영된 현상인가.
‘만약에 나의 이 직감이 그저 엉뚱한 망상이 아니라면, 지금 저 사람과 그날의 기이한 행운의 영향력이 모종의 원리로 결부되어 있다는 가설이 옳다면……, 설마 저 사람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만약에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그가 그 원리 모를 기이한 현상을 본인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면?
산달폰은 그 특색 혹은 현상을 자신의 의도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혹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한 가지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 일에 가장 적합한 그릇이자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인 알렉시스를 택했던 것은 아닐까?
“당신 부모님이 유대인이라고 하셨던가요?”
12년 전의 대화를 더듬어낸 알렉시스가 확인 차 조심히 물었다.
“어머니는요. 아버지는……, 뭐 혼혈도 해당되긴 할테니까, 그 인간도 생물학적으로는 그렇다고 봐야죠.”
산달폰의 말투와 뉘양스를 보아 어머니를 언급할 때와 달리 아버지 쪽에 대해서는 뭔가 긍정적이지 못한 투가 묻어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이라.’
알렉시스는 세계 대전 전후의 세계사를 곱씹어보았다.
이미 2차 대전 이전부터 그곳으로 적잖은 수의 유대인들이 이주하긴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토만 칼리프 신정제국이 강성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탄압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고 일부는 다시 먼 곳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발생해 칼리프 신정제국이 패망하였고 중동의 국가들은 분리되었다.
그 중 일부는 브리튼 제국의, 일부는 커뮤니스트 연방의 영향권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중립 완충 구역으로 남았다.
팔레스타인 땅은 그 중에서도 후자의 둘에 가까웠다.
일부 유대인들이 러시아 구역에서 그 땅으로 이주하긴 했지만, 여전히 당시 이슬람의 영향력은 건재하였기에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상당수가 학살당했고 나머지는 피난했으며 일부만이 그 땅의 터전에 남았다.
이후 벌어진 3차 대전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거의 황폐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여파로 아랍 계열 민족들조차도 그 지역을 떠나 흩어질 정도였으니 유대인들은 오죽했겠는가.
‘확실히 그때 산달폰은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내 비전을 교정해준 것이 아니었다.’
그때 알렉시스는 탐구 주제를 향한 선명한 열정과 애정이 산달폰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만일 산달폰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후손이라면, 그가 파괴된 고향을 온전히 사람 사는 지역으로 거듭나게 하고픈 소망을 품었다고 해도 무리한 가정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일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이슬람이었지.’
결과적으로 지금 그 1번 장애물은 제거되었다.
앞으로도 남은 장벽이 몇 더 남긴 했지만, 어쨌건 목표에는 가까워진 셈이다.
이것은 알렉시스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산달폰의 의도였을까?
누가 누구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며 누가 누구에게서 이득을 얻은 것인가?
수수께끼에 휘말린 듯한 묘한 기분에 알렉시스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
산달폰은 술에 약한 체질인지 와인 몇 잔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근무와 연구 때문에 평소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알렉시스는 이번에도 무알콜 음료만 마셨고 덕분에 홀로 멀쩡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본래 멀쩡한 사람이 고생하는 법.
알렉시스는 산달폰을 의자에 잘 눕혀두었다.
산달폰의 지인이 그를 챙기러 올 때까지 알렉시스는 안식일의 마지막 여유를 즐길 겸 야외 바 근방을 산책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고생 시작인가.”
조금 전 누구의 말대로 인간이란 개체의 역량적 한계는 컨티넌트 하나 분량이 전부다.
그런데 당장 자신은 서너 개도 아니고 사실상 세계 전체를 관리해야 할 판국이었다.
신대륙은 직접 관할권에서 제외되었다고는 하나 그곳에는 무려 커버넌트 그룹의 본사가 있고 그 경제적 영향력이 세계 전체에 맞먹으니 사실상 모든 대륙들을 책임지라는 말이었다.
‘아버지로서도 나름 진지한 선택이었겠지.’
더는 예행 연습에만 머무르게 할 것이 아니라 승계를 지체 없이 완수하리라.
황제의 의지는 비가역적이고 결연해보였다.
황태자의 핑계나 고집으로도 더는 지연되지 않으리.
일개 대륙들의 지도자가 아닌, 세계의 통치자가 될 때 마주할 중대 위협들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기에 알렉시스는 몹시 긴장되고 떨렸다.
이제 겨우 그 거대 위협들 중 하나를 제거했을 뿐이다.
앞으로는 같은 수법을 반복하지도, 재활용하지도 못한다.
그런데다가 각종 책무는 많아져서 따로 위험 요인 제거에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벅차다.
이런 조건에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실례할게요.”
그때 한 음성이 상념에 잠겼던 알렉시스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옅은 연갈색 머리의 한 여인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던 그는 멈칫 하였다.
고동색 머리의 키 큰 청년은 낯선 여인과의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아주 잠시 사고의 흐름이 느려졌다.
‘왜지?’
여태 자신이 낯선 이와의 마주침에서 몽롱히 마비되는 듯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던가?
어떤 사람과도 손쉽게 사교적 관계를 형성해나가던 그로서는 익숙지 않은 체험이었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다름 아니라 제 가족을 데리러 가려고요.”
젊은 그 여인은 단출하고 소박한 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제법 어여쁜 편이긴 했으나 엄청나게 시선을 끌 정도의 존재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이유 모를 어색함에 취한 탓에 시선을 그녀에게서 떼지 못했다.
“아, 아, 그렇다면 혹시!”
한참 후에야 시선을 부랴부랴 정리한 알렉시스는 그답지 않게 허둥대었다.
문맥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그는 산달폰이 쉬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달폰씨의 가족분?”
“네, 제 오빠 맞아요.”
그 순간, 그의 뇌리에 기억의 잔상이 스쳤다.
오래 전에 딱 한 번 마주했던 그 소녀.
완전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모습이 너무도 달라진 나머지 순간적으로 알아보지 못했다.
전에는 작고 가녀린 들판의 들꽃 한 송이였다면, 지금의 그녀는 한 그루의 조화로운 나무 같은 분위기의 존재였다.
‘그랬었지. 이제 기억 나.’
알렉시스는 만남의 난처함을 감당하지 못한 채 로봇처럼 뚝딱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그런 그의 어색하고 뻣뻣한 모습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웃음을 작게 머금었다.
다행히도 밤중이라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마스크 탓인지 그가 유명 인사인줄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아니 어쩌면 미디어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타입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유명 인사인 알렉시스로서는 다행이었다.
“산달폰씨를 데려오겠습니다.”
“고마워요. 오빠 때문에 결례가 많았네요. 기회가 닿는다면 보답 드릴게요.”
“천만에요.”
알렉시스는 세상 모르게 잠든 산달폰을 훌쩍 업쳐 매고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휴, 하여간 못 말려. 술도 약한 사람이 왜 또.”
산달폰의 여동생은 혼잣말로 잔소리를 하며 오라비의 등을 힘껏 두드렸다.
여전히 만취한 그는 소리도, 주사도 없이 그저 고요히 잠든 상태로 머물렀다.
“그래도 얌전한 편이라서 다행인 셈이죠. 제가 오빠를 부축해서 데려갈게요.”
“무거울 텐데요? 그래도 장정인데 무게가 상당할 겁니다.”
“저희 오빠는 마른 편이라서요. 그리고 저도 여자치고 힘이 좀 되는 편이거든요.”
“그래도 힘들텐데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어머, 결례를 더 얹히고 싶진 싫은데.”
“그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다행히 오누이의 집은 생각보다 근거리에 있었다.
산달폰을 등에 업은 알렉시스는 여인과 함께 나란히 20분 정도 거리를 이동하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조심스레 말문을 트며 소박하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름을 아직 여쭤보지 않았군요.”
알렉시스는 헛기침을 몇 번 후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아, 그러네요. 하기야 오빠 친구라면 혹시 뵐 일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정말로 알렉시스의 정체를 잘 모르는 듯했다.
아마 오빠의 가까운 동갑내기 친구 정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제 이름은 라하토브.”
네 글자의 이름이 알렉시스의 머릿속에 살포시 새겨졌다.
“라하토브.”
알렉시스는 산달폰 오누이와 처음 만났던 12년 전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오라비의 허락으로 맞잡을 수 있었던 작은 소녀의 손, 그 온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좋은 이름이네요.”
따스한 불꽃. 선한 불길.
알렉시스는 문득 자신 속에서도 무언가 따스한 모닥불이 타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홀로 모닥불을 쬐며 캠프파이어의 낭만을 만끽하는 듯한 심상이 아른거렸다.
차가움에 얼어있던 그의 깊은 내면이 잠깐이나마 왠지 모를 편안의 감각에 젖었다.
“내 이름은 알렉. 알렉이라고 불러주세요.”
흔하디 흔한 보통 남자의 이름.
알렉시스는 일부러 완전한 이름을 숨겨두었다.
“반가워요, 알렉.”
“저도요.”
두 사람은 오누이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작별의 배웅으로 악수를 했다.
알렉은 그녀가 아파하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신중히 조절하였다.
무식하게 억센 자신은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해도 물리적 아픔을 주기 쉬우니까.
오늘 만난 이 아가씨에게는 그런 무식하고 무례한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다음에 꼭 뵈요.”
“네.”
맑고 순수한 그녀의 웃음.
오늘의 이 만남이 여기까지라는 사실이 문득 아쉬웠다.
‘혹시, 산달폰이 아니었던건가?’
순간적으로 엉뚱한 상상도 스쳤다.
이내 그는 자조하듯 고개를 내저으며 실소하였다.
‘피곤해서 헛 생각이 나는군. 집에서 푹 쉰 뒤 내일부터는 일에만 정진해야겠어.’
라하토브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알렉시스는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멈춰섰다.
매분매초를 금처럼 여기는 그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라하토브……, 호크마.’
그녀는 무지개와 같은 인상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손에 쥐려고 해도 잡힐 듯 말 듯 쉬이 쥐이지 않는, 안달을 일으키는 고운 무지개.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도 물이 흐르듯 손 틈을 빠져나가는 무지개.
‘후일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자신 곁에 둘 수 있는 황태자였다.
그런 그도 이 순간만은 섭리의 인도에 모든 계획을 맡긴 채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다.
감히 권리를 주장하려 하기에는 그 무지개의 불꽃이 내뿜는 따스함이 고귀했다.
자칫 서두르다가 유리처럼 부서질까 두려움도 들었다.
“안녕.”
언제나 냉철한 이성과 강력한 의지라는 독재자 아래 허덕였던 그의 혼이 생전 처음으로 순수한 감정이라는 여왕과 더불어 권력을 나눠 가졌다.
알렉시스 벨레로폰 엘 죠세프 브류나크.
황제와 황태자를 지칭하는 공식 칭호인 ‘크라이스토브 브라이틀란트’의 소유자.
화려하지만 고독했던 사내의 삶이 이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태동을 시작했다.
이전회
78회 [1부] 78화. 호크마 (2) |
다음회
80회 [2부] 1화. 황제의 반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