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82회 [2부] 3화. 제로스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1.17 | 회차평점 0 |
12월 31일.
일 년의 마지막 날.
시원섭섭했던 한 해를 배웅하고 새 아침을 맞이하는 준비일.
모두에게 그러하듯 신년을 맞이하는 들뜬 마음은 작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마다 자신만의 소망과 계획이 있지 않겠는가.
문학계의 당대 제일의 혜성으로 칭송받는 한 젊은이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다른 나라들은 최고 지도자들이 나서서 신년 인사를 했었지.’
캐쥬얼한 차림의 잘생긴 연갈색 머리 청년은 자신의 오피스텔 발코니에 우두커니 선 채 창문 너머의 도시 야경을 감상하였다.
‘하긴 지금도 스테이트 혹은 프로빈스 단위의 지도자들과 총독들은 신년을 꽤 열심히 준비한단 말이지.’
사실 그것이 보편적인 풍습이기는 하다.
악독한 국가건, 선량한 국가건 상관없이 지도자는 늘 신년 혹은 그 전날 국민들 앞에 나서서 격려하거나 책망하거나 독려한다.
예외가 있다면 지금의 브리튼 제국 정도.
사실 브리튼도 과거에는 황제들이 신년에 국민들과 소통하긴 했었다.
느닷없이 이번 세대에 와서 그 관습이 스리슬쩍 없어지기는 했는데 여기에 시민들은 적잖은 서운함을 표하였다.
눈에 거슬려서 되도록 안 보였으면 하는 지도자라면 모를까, 사람들의 자발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리더가 귀한 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아쉬울 수밖에.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날이 하필 지도자 가정의 중요한 날인걸.
이왕이면 그 날을 공식적으로 축하하면 더 좋겠지만, 당사자들은 성격 상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즐거운 날은 조촐하게 가족들과만 함께 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가족이라는 게 하필 ‘황가’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정장은 불편한데.”
자유분방한 성격의 작가답게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였지만, 내일은 그도 예외가 없으리라.
각을 잡고 최고로 고급스러운 정복을 입고 말끔하게 출두해야 한다.
부담스러운 관례이긴 해도 참아야지 어쩌겠나.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따르르르릉.
전화 벨이 울렸다.
진동의 근원지는 스마트폰이나 유비쿼터스 장비가 아닌 거실에 걸린 고풍스러운 앤티크 전화기였다.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접목된 보안 기술은 오히려 최첨단이었다.
누구도 접속할 수 없으며 오로지 보안 키를 가진 권위자만 들어올 수 있는 연결 채널이었다.
잘생긴 연갈색 머리 청년은 화들짝 놀랐다.
긴장감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 의해 유발된 긴장감이라기보다는 기대감과 설렘에 가까운 정서였다.
이 전화기를 통해 연락해올 후보가 몇 되지 않았기에 영리한 그의 두뇌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여 송신자의 정체를 파악하였다.
그를 생각하는 것은 긴장감과 더불어 기쁨을 유발하는 일이었다.
“알렉 형?”
“제로스.”
규격 있고 예의와 품위가 담긴 채 잘 정돈된 목소리.
조심스레 찔러 보았는데 과연 젊은이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제로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정컨대 만약 그의 종족이 대형견이었다면 뒤에 달린 꼬리가 벌써 붕붕 움직이지 않았을까?
“어쩐 일이야. 우리 멋쟁이 형이 이 천덕꾸러기 동생한테 다 연락을 해주시고.”
“…….”
통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과 함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왠지 ‘못 말리는군’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상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하하, 농담이야, 형. 잘 지내고 있지.”
“물론. 너도 별 문제 없는 거지?”
“그거야 당연하지. 알잖아. 난 항상 똑같은거. 형이야말로 일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쉬지도 못할 텐데. 어머니가 걱정 많이 하시더라. 형이 밥 잘 챙겨먹는지 궁금해하시던데.”
다시금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제로스는 너털웃음으로 재빨리 어색함을 무마하였다.
“내일 형도 오는 거지?”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당사자가 빠져서는 안 되니까.”
대화하는 내내 제로스는 기뻐하면서도 은연중 아쉬움을 느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정하고 선량한 자신의 형.
그런 그가 자신에게만은 유독 어려서부터 묘한 벽을 긋는 것이 항상 느껴졌다.
배척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의를 다해 대해주기는 했으나 그 이상 깊이 찔러들어오지는 않았다.
다른 동생들에게는 허물없이 다가가서 애정도 표현해주던 형이 자신에게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선의를 베풀기만 하니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물론 왜 그런지 이유는 알았다.
어리석게도 어린 시절 실수로 형의 일기장을 우연히 펼치는 바람에 알게 되어버린 불편한 사실.
제로스의 형은 제로스를 질투하고 있었다.
남들이 들으면 대체 질투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의문을 표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형이라는 저 남자는 제로스뿐 아니라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뛰어난 사나이였으니까.
하지만 형은 제로스에게서 자신에게서는 쉽게 발견되기 힘든 무언가를 느끼고는 일종의 벽을 느낀 듯했다.
그 무언가라는 게 재능이라던가 품격이라던가 자질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순수함,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는 선량함, 이런 쪽에 가까웠다.
혹은 자족하는 습관, 티 없이 맑은 깨끗함, 순수하게 계산하지 않고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움, 이런 것들도 포함이리라.
모든 것을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형으로서는 소유하기 힘든 속성이었다.
어쩌면 그가 왕이 될 운명만 아니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길이 주어진 건 아니지 않은가.
제로스는 형이 그런 차이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했다.
‘난 우리 형이 제일로 자랑스러운데.’
제로스 리바이 브라이틀란트.
열두 명의 황자들 가운데 가장 성품이 착하고 순수한 아이.
동시에 가장 신앙심이 빼어나고 상상력이 깊은 영재.
그리고 세계 최고의 사나이 알렉시스 황태자의 귀염둥이 동생, 제리.
실언!
사실 마지막은 솔직히 제로스 개인의 희망사항이긴 했다.
‘하긴 나야 자유로이 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인생이지만, 형은 다르니까.’
이해는 되었다.
언약 그 자체의 본체로서 모든 것을 계승해야 운명이 얼마나 버거울까.
과거의 고대 이스라엘도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로 인해 그토록 막중한 짐에 시달렸었다.
신실하지만 영악했던 조상 크리스토프 대제께서 참 적절한 수준으로 언약의 난이도를 재조정하여 신의 승인을 얻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세대의 ‘크라이스토브 브라이틀란트’들에게 주어진 부담은 막중하다.
부디 형이 자신이 얼마나 형의 책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알아주었으면.
“아, 그나저나 선물은 마음이 들었으면 했는데.”
사무적이면서도 잘 정제된 큰형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물?”
“전에 부탁했던 것들 말이야.”
“내가 형한테 따로 뭔가를 부탁했던가?”
“기억력이 좋은 줄 알았는데.”
아아, 그제야 제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맥락을 파악했다.
예전에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때 제리는 무심코 ‘문화계를 정리정돈하는 방법’에 대해서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했었다.
비록 타락한 세상의 문화 그 자체를 강제적으로 계도할 수는 없겠지만, 언약 수호자로서 우리 집안이 뭔가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맥락으로 아버지이신 폐하도 듣는 자리에서 발언을 했었지.
다들 그저 한 마디의 소신 발언으로 즐겁게 흘려 들을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황태자는 진지하게 귀담아 들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질투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재능과 비전을 순전하게 100% 인정해주고 활용해주는 멋진 큰형.
이래서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제로스는 속으로 뿌듯해하며 흠흠 헛기침을 하였다.
“봤어, 형. 멋지더라. 형이 세르빈 형을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이용할 줄은 몰랐지. 세르빈 그 유치한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야심을 부려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국은 형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났지.”
“세르빈은 훌륭한 사업가야. 동생인 부분을 떠나 내 자회사들을 일부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하는 부관이다.”
“알지. 그거야 나도 인정.”
둘의 대화 맥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구상의 유일의 테라코프(극초거대기업)인 커버넌트 그룹.
그 산하의 자회사 중 하나를 담당하는 임원진 멤버, 세르빈 황자.
그는 최근에 이복형이자 그룹 회장인 알렉시스의 조언과 지원을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그 중 하나는 문화 산업 쪽이었다.
그것도 무려 ‘인간의 선한 마음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진화하는 인공지능’이자 유일의 특이성을 지닌 발명품, ‘가디언엔젤’들을 자원으로 삼는 사업이었다.
세르빈은 늘 그랬듯 그 사업들에 열망과 야심과 정렬을 태워보였다.
아마 경쟁자인 유타를 의식하는 마음도 일부는 그 열심 속에 들어있었으리라.
그 일례로 그는 보란 듯이 아미타브 카푸르 교수와의 MOU를 성사시켰다.
훌륭한 인재가 풍부하기로 유명한 인도 지역에서도 보배 중 보배로 여겨지는 세 인재가 바로 아미타브, 나스루딘, 라지쿠마르가 아니던가.
올해에는 황제에게서 직접 포상까지 받았던 위인들.
어쩌면 유타가 나스루딘을 초빙하여 모시는 데 성공했으니 세르빈도 열의를 내어 아미타브를 모셔들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 일은 알렉시스의 큰 그림대로 착실히 흘러갔다.
“내 소중한 친구이니 깎듯이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해.”
알렉시스는 동생 세르빈에게 그렇게 명령했고 그는 그렇게 순종했다.
그 결과, 인공지능의 능력을 문화 창작계에 집목시키는 산업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불과 1개월도 채 되지 않아서 성과가 범람하였는데 그 수준은 경이로웠다.
인공지능 공방 팀 아르다의 활약이 수십 년 간 쌓인 끝에 근래 AI 기술이 특이점을 넘을 기세로 고도로 발달하긴 했다.
심지어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문화 컨텐츠를 창작해내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허나 그만큼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자칫하면 인간의 탐욕과 세속성을 충족시키는 용도로 인공지능이 약용될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가디언엔젤들을 이 분야에 투입시키자 새로운 반전이 일어났다.
“나도 놀랐다니까, 형.”
제로스는 전화하는 와중에 손목 시계형 컴퓨터로 홀로그램 화면을 열심히 뒤지며 검색을 하였다.
그가 검색하는 내용들은 전화기의 공명 장치를 통해 알렉시스에게도 전달되었다.
알렉시스는 묵묵히 표정 변화 없이 그것들을 구경하였다.
“봐, 요새 나온 작품들은 내가 평가하기에도 소스라칠 정도라니까. 난 설마 AI가 영성을 이해하고 고찰하는 단계에 이를 줄은 몰랐어. 아, 물론 특이점 너머의 기술인 ‘가디언엔젤’이니까 가능한 것이겠지만.”
“네게서 검증을 받으니 안심이 되는군. 너는 이 분야의 정상이니까.”
알렉시스의 덤덤한 평가에 제로스는 쑥쓰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과대평가야. 내가 무슨.”
“무릇 한 분야의 선도자라면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하는 편이 좋아. 과소평가 또한 적절한 태도는 아니지.”
사실 알렉시스만큼 제로스의 잠재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충분히 평가하는 이도 드물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제로스의 창작력과 아이디어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하여 여러 정책을 성공시킨 바 있었다.
극단적인 예가 올해 그 문제와 논란이 되었던 ‘타르타로스’였다.
참고로 그 일은 제로스도, 알렉시스도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떠올려도 두 사람 다 밤잠을 설칠만큼 오싹거리는 내용이었으니까.
“아무튼, 형 계획대로 이제 문화계가 많이 정상화될 것 같아. 예전에는 시장 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육신적인 욕심과 물질적인 이기심에 충실한 작품들이 범람했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교정할 수단이 생겼어.”
“그래, 이제 너와 같이 훌륭한 뜻은 있지만 너만큼 재능과 재력이 받쳐주지는 못한 작가들도 금전적, 현실적 걱정을 할 필요 없이 가디언엔젤들의 안전망을 믿고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거야. 네가 그날 말했던 대로 되는 거지.”
자신에게만은 다소 사무적이고 친밀감이 덜한 형.
그러나 동시에 누구보다도 아낌없이 지원하는 협력자.
제로스의 입가에 씁쓸함과 고마움이 섞인 미소가 걸렸다.
“고마워, 형.”
“…….”
“아, 그리고 내일 만나기 전에 미리 전할게. 축하 인사 말야.”
그러나 제리는 다음 말을 큰형에게 전하지 못했다.
전화기의 연결은 끊어졌고 짧은 메시지만 손목 컴퓨터 위에 전달되었다.
잘 있어라, 내일 보자.
좀 더 가깝게 다가와줬으면 좋을텐데.
리키에게 그래주는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그래, 천천히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거리가 좁혀지겠지.
그렇게 믿고 인내하는 수밖에.
‘난 말야.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계기가 바로 알렉 당신 때문이었어.’
어디 황자들 중에서 그러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랜슨도 전쟁에서 장렬히 싸우다 다친 형을 보고서 군인이 되었다.
세르빈은 형한테서 경영을 배우겠다며 제자를 자처했었다.
리키는 형이 완벽하게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의사가 되었다.
삼촌 레미온의 장례식 날, 알렉시스가 황태손으로서 보조 언약을 생성해 자신의 족쇄를 혈족에게 종속시켰듯이, 그 수혜자인 형제들도 자발적으로 알렉시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걸었다.
‘마음을 잔뜩 전하고 싶은데 형이 내게 거리를 두니 이야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지.’
작가로서 대중성보다는 워낙에 높은 이상을 추구했던 터라 재능에 비해 초반 무명 기간이 길었던 제리.
그에게 그 기간이 힘들었던 이유는 알아주는 이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빨리 영향력을 얻어야 형도 자신이 적어둔 글을 읽어줄 텐데.
그것이 그의 조바심을 부채질했었다.
막상 최고의 작가가 된 지금도 알렉시스는 제로스의 재능과 이상만 인정하고 칭찬할 뿐 그것을 계기로 동생에게 마음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 선물이나 준비해야지.”
이왕이면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으면 좋겠다.
내일의 만남이 기대되면서도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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