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47회 마무리 단계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30 | 회차평점 ![]() |
아퀼라는 숙소로 귀가하는 내내 얼떨떨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뜻하지 않은 거물과의 만남.
그 자체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가까이서 대화를 해보니 라이텔바흐라는 자는 쿨하고 사람 좋은 남자였다.
문제는 대화하는 내내 그에게 주도권을 내준 채 휘둘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껏 독립운동을 위해 각계각층의 주요 헌터들과 더불어 밀약을 나누긴 했지만 이와 같이 자신의 속내를 속수무책으로 간파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아퀼라가 국가 몰락에 대한 동정심을 앞세워 헌터로부터 무언가를 얻어가내는 입장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딱히 아쉬울 것이 없던 입장인 라이텔바흐가 되려 아퀼라에게서 뭔가를 뜯어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아퀼라의 처지에서 현실적으로 손해본 것은 없었다.
라이텔바흐는 그의 소망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전력 제공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드러냈다.
“새로운 질서는 그간 파시스트들의 후예들이 행해온 방식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거의 국가 시대로 복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제3의 합의점을 추구할 것입니다.”
이것이 라이텔바흐가 제시한 비전이었다.
“대령님께서 헌터들의 수장이 된 뒤, 각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써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이미 시한이 지났기 때문이죠.”
라이텔바흐는 현 시대 인류의 상태를 직시하게끔 해주었다.
초대 총통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이미 인류는 뒤섞이고 말았다.
모래사장 위에 그어진 금, 곧 민족이라는 경계는 발로 밟혀 지워지는 중이다.
모든 민족이 디아스포라의 상태에 이르렀고 온갖 나라에 뿌리를 내린 채 새 터전을 잡았다.
혼혈화도 급속히 진행중이다.
그러므로 더는 ‘민족주의’라는 사상적 기치 하에 국가의 경계를 재설정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자칫 억지로 국경을 재설정했다가 되려 한 울타리 안에서의 민족간 분쟁이 심화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필요악으로서의 ‘중앙 관리자’의 존재는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칼을 몸에 깊숙이 꽂으면 그것을 빼내는 것이 되려 과다 출혈로 이어지는 길인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 되었기에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
하지만 그 중앙 관리자의 자리에 ‘어떤 속성의 시스템’을 앉히느냐는 지금 세대에도 교정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얼마나 지혜롭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고통은 상당히 달라지리라.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비록 당신의 조상들이 알던 그 모국을 부활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 대신 그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바탕으로 통치의 기반을 다시 재설정할 수는 있습니다.”
헌정 질서의 올바른 재구축.
균형과 견제의 권력 시스템.
작은 정부로서의 역할 제한.
연방과 주들의 역할 분담 및 힘의 균형.
이러한 요소들을 최대한 되살리고 반영하여 현 세계 정부를 미연방과 비슷한 체계로 개편한다.
이것이 라이텔바흐가 내세운 제안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 개혁을 주도할 자도, 이후 지탱할 자도 라이텔바흐가 될 것이다.
헌터 사회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능력 면에서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영웅이니까.
“지혜로운 선택을 바랍니다.”
아퀼라는 끝내 확실하게 대답을 끝맺지 못한 채 자리를 파하였다.
‘어차피 헌터들의 전적인 조력 없이는 독립은커녕 그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어.’
그런데 하필 장래에 헌터 세계를 장악할 당사자가 미리 협상 경계선을 자기 멋대로 정해두다니.
미래 설계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뭐, 자신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준 것은 감사했지만, 그렇다고 미리 선을 그어두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왕이면 완벽한 독립을 원했던 그로서는 찝찝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구미가 당겼다.
꿩 대신 닭으로라도 무언가 희망 비슷한 것을 얻어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지금 라이텔바흐가 내민 협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가장 빠르고 가능성 높은 길임을 알기에 망설여졌다.
‘프리실라 또래의 아이들과 그 다음 세대가 비참히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것을 거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건가?’
열다섯 살 터울의 어린 동생.
작은 아버지 부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보배로운 유산.
그 아이와 그 친구들이 더는 압제 아래 자유를 빼앗긴 새장 속의 새로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라이텔바흐라는 사람을 덜컹 신뢰해도 좋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하루였다.
*
데이터 유효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이 이르른 오늘.
마지막 작전을 무사히 마친 네 사람은 같은 지점에 집결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누구도 헬게이트나 당국의 수색에 휘말리지 않았다.
넷이 모인 지점은 오늘 저녁 다섯 개의 소형 헬게이트가 밀집 발생할 도시였다.
오늘은 이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헬게이트 난이도도 낮고 침식 권역도 좁을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일일이 찾아가지 않았다.
더욱이 호주에 파견된 헌터들이 밀린 진도를 다 따라잡은 터라 분주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는 우리쪽 진도가 늦은 듯 하네.’
막상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명의 헌터가 현장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공권력이라도 동원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신호탄을 쏜 것인지, 이미 위험 좌표 근방 수km 이내의 사람들을 모두 내쫓고 유유이 재난을 기다리고 있었다.
‘편리하기도 하네.’
하긴 위험 경보를 전하는 데는 민간인 신분으로 몰래 작당하는 것보다는 헌터의 신분으로 대놓고 나서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하겠지.
“일단 안전거리로 물러나자.”
“네.”
플레먼은 세 사람을 태운 차량을 끌고 헬게이트 예상 발생지로부터 최대한 떨어진 좌표로 이동했다.
그는 혹시나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안전거리 너머에서 지켜보았다.
‘내가 너무 과민하게 걱정하는 건가?’
내일부터는 자신이 할 일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그러면서도 더는 어디에서 헬게이트가 생성될지 미리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안감도 느껴졌다.
‘부디 아무런 변수도 발생하지 않았으면.’
잠시 후, 하늘에 먹구름이 낀 듯한 어둠이 자욱이 내려앉았다.
해당 도시의 다섯 좌표에 시커먼 색의 암흑 구체가 강림하였다.
사악한 기운의 안개가 뻗어나가더니 구형 좌표계의 권역이 뻗어나갔다.
각 권역 내부는 바깥에서 볼 때 흑백 영화마냥 탁하게 보였다.
“언제 봐도 소름 돋는 색채네요.”
어니스트가 몸서리를 치며 감상하였다.
이미 이번 작전을 시행하면서 멀리서 헬게이트의 풍경을 여러 번 구경하는 했지만, 매번 그 징그러움에 감정적으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한기에, 악취에, 저절로 유발되는 부정적인 감정까지, 이렇게 독한 종합선물세트도 없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
플레먼은 창문 너머 저 멀리로 보이는 살풍경한 모습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우리가 떨어졌던 그 중급 헬게이트는 저보다 훨씬 더 흉측한 모습이었을테지.”
하물며 최근 죽었다던 그 SSS 랭크는 어떠했을까?
저런 악몽들과 피부를 맞대며 살아가는 헌터들은 대체 어떤 족속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너희는 별로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네.”
플레먼은 뒷좌석에 앉아 태연한 자태로 장관을 구경 중인 두 여장부에게로 시선을 잠시 돌렸다.
“나보다 담력이 훨씬 좋은 모양이구나. 다행이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저희가 아저씨를 책임진다고 말했잖아요.”
쥬오디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해받을 만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래도 뭐 마음만은 고맙구나. 든든하네.”
헬게이트 발생 직후 몇 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헌터가 움직였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헬게이트 권역으로 침투하였다.
한 20분 정도 흘렀을까?
두 개의 헬게이트 권역을 감싸던 막이 연기처럼 흐드러지더니 맥없이 탄성을 잃고 부스러졌다.
잠시 후 비누방울이 터지듯 내용물들이 힘을 잃고 새어나왔다.
어비쓰론, 흑색파동, 심연독.
확산 가능한 범위도 제한되어 있었고 양도 미량인지라 플레먼 일행에까지 느낌이 닿지는 않았다.
다만, 섬뜩하고 불쾌한 기분만은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다.
“생각보다 간단히 접수하네요.”
“아마도 어비씨언이 없어서 저항이 덜했을 거야. 하급 헬게이트에서 어비씨언들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드무니까. 나오더라도 하급한 잡졸 수준이겠지.”
도합 20분이라.
중급 헌터들치고는 그런대로 신속하게 일처리를 잘 하는 편인 듯했다.
뉴질랜드에 생긴 그 던전에서 라이텔바흐 대령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헬게이트 전체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었지.
“우리가 더 할 일은 이제 없을 듯하네요.”
“감사하게도.”
여유로워진 네 사람은 두 명의 헌터가 나머지 세 개의 헬게이트를 각개격파하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그동안 내 무리한 계획에 동참해주어서 수고들 많았어.”
플레먼은 감사의 인사로 마무리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다시 불러주세요. 어떤 작전이든 충실히 맡을게요.”
신티가 팔을 걷어 근육을 과시하는 시늉을 하며 단언하였다.
“맞아요. 이번에 요령이 생겼으니 다음 번에는 더 쉽고 간단하게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시스터?”
“두말 하면 잔소리.”
패기와 혈기로 넘치는 두 여장부의 모습에 플레먼은 피식 웃었다.
“고맙다. 보수는 보너스까지 쳐서 넉넉하게 줄게.”
어니스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개의 헬게이트가 붕괴함과 동시에 먹구름 낀 듯했던 날씨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그는 인류의 암울한 현실도 이렇게 한 순간에 구름 걷히듯이 환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무익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격리 해제 후 라이텔바흐는 맨 먼저 시더우드 내 마련된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몸져 누워 있던 동안 일들이 많이 쌓인 상태였다.
급박한 일들을 신속하게 정리한 그는 남은 일들을 우선순위 별로 분류했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작업은 예보 자료 재구축이었다.
‘분명 메인 주의 헬게이트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변동이 발생했을 터.’
그는 헬게이트 토벌에 나서기 이전에 자신이 쌓아둔 자료들을 펼쳐놓았다.
자신이 누워있던 틈에 헌터 협회들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예보 자료들도 모았다.
여기에 최근 위성과 감찰안으로 관측된 데이터까지 수합하였다.
이미 이 모든 류의 자료는 수장들의 특별 명령으로 라이텔바흐가 언제든지 열람하고 취합할 수 있도록 설정된 상태였다.
어차피 대부분의 자료는 그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헌터 중 오로지 그만이 완전에 가깝게 예견 알고리즘을 소화할 수 있으니까.
라이텔바흐는 다수의 슈퍼컴퓨터들과 인공지능 비서들을 가동하였다.
아울러 인터월드네트워크를 통해 개인 소유 위성들과 프로그램을 연계시켰다.
이후 그의 뇌 속 이터널 셀들이 인터페이스 연결을 통해 장비와 접속되었다.
가늠하기 힘든 규모의 고도 연산들이 두뇌와 컴퓨터들과 위성 사이를 오갔다.
헌터들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십년을 노력해도 감당하기 힘든 연산량이 그의 뇌리에서 회전하였다.
이윽고 마지막 결과물이 도출되었다.
기존 자료와 헌터들의 자료에 더해 그의 연산과 판단이 더해진 최종본.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이변 시나리오가 반영된, 오차 확률 0.0001%의 예언.
그 종합적 결론에 함의된 내용물에 라이텔바흐는 잠시 멈칫하였다.
‘전반적으로 발생 빈도, 농도, 위력, 크기가 급감한 점은 예상 범위 안이다.’
헬게이트 예측 지도를 보니 자신이 토벌 전에 계산해 둔 초안에 비해 현저히 상황이 호전된 것이 눈에 선했다.
적어도 80% 이상의 당초 예상 위협이 사라지다시피한 상황.
문제는 그것과 별개로 생긴 일곱 군데의 ‘특이성 이변 현상’ 예측 지점이었다.
그 내용물, 위치, 발현 시점, 위험의 규모를 파악하자마자 라이텔바흐의 낯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설마…….’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뒤 상체 위에 코트를 걸쳤다.
‘당장 확인해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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