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8회 초인들의 세계 Ch 14. 휴먼 솔져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8.21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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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수는 있겠냐?”
신해가 손을 내밀었다.
“다 정리됐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느새 경찰 로봇들은 부서지거나 불능이 되어 있었다. 윤혁은 지금껏 한 번도 이 같은 난전을 본 적이 없었다. 플레어 파이터도 저런 신체 능력은 보이지 못하리라. 남자는 조금 전 기계의 행동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것은 물론이고 통신 교란으로 기계들을 흔들고 빔 화기들을 실드로 막아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맨주먹만으로 로봇들의 약점을 정확히 공략해 쓰러트릴 만큼 격투술도 상당했다.
“저기, 고맙습니다. 구해 주셔서 정말⋯⋯, 으윽!”
윤혁은 몸을 일으키려다 허리 쪽에 강한 통증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경찰 로봇에게 받은 타격 때문에 등 쪽을 다친 듯했다.
‘며칠 사이에 벌써 만신창이 신세네.’
몸을 추스른 윤혁은 생명의 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굉장하시네요.”
“난 군인 출신이라서⋯⋯.”
“구, 군인이요?”
윤혁이 어리둥절해 하자 신해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 여기 주민들은 슬슬 잊어버릴 만도 하지.”
징병이란 개념이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으니까. 낯설 수밖에.
“혹시 당신은 우주 식민지 출신인가요?”
“흐음.”
그는 윤혁의 질문에 말을 발설하기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내 이름은 차신해라고 해. 약 일 년 전에 지구에 귀화해 자유민이 되었지. 그전까지는 외우주 주민 출신이었어. 외부에서 태어나 인류군 소속으로 정식 발탁되어 군인이 되었지. 귀화는 제대 후에야 했고.”
대단히 낯선 이야기였다.
“군인이란 건 처음 보네요.”
“지구는 근 몇십 년간 평화기였으니까. 지구 내에선 군대가 필요 없었겠지. 게다가 설령 군대가 들어와도 자동화 부대는 스텔스 모드가 항시 작동되니까 민간인들은 관측할 수도 없지. 우리 휴먼 솔져들은 바깥에서만 활동하고.”
그는 대강 감이 잡힐 듯 말 듯 무난하게 설명해주었다.
“지금은 은퇴했다. 더 이상 군대하고 얽히고 싶지는 않거든.”
윤혁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물들자 신해가 손을 저었다.
“자세한 건 말해주기 어려워. 그저 우여곡절이 좀 많았지.”
현재 지구의 일반인들은 우주 식민지 기술이 이미 개발되었고 몇몇 식민지가 이미 시도되는 중이며 그곳에 주민도 있음은 풍문으로 대강 듣긴 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와 정책으로 운영되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음모론도 꽤 돌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관없다는 듯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다. 지구에서 평안히 유토피아를 누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러고 보니 차신해 씨? 요새 저희 음식점에 자주 오시지 않았나요?”
그의 얼굴을 알아본 윤혁이 불쑥 질문했다.
“그때는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제 좀 구분되네요.”
“으음,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며칠간 미행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이런 일로 추궁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뭐, 복잡한 사정이 있으신 모양이죠.”
다행히 윤혁은 우주 쪽 사정도, 신해의 과거도, 미행한 사연도 묻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정말 감사드려요.”
“흐흠, 이 정도로 뭘.”
무난하게 이야기가 흘러가자 신해는 안심했다.
‘의외로 단순하고 순박한 친구였구먼. 나 같았으면 캐물었을 텐데.’
“엄청 멋지게 싸우시던데요. 히어로인줄 알았어요.”
윤혁이 은근 눈을 초롱거리며 동경심을 드러냈다.
“엄밀히 전직 히어로는 맞아. 크흠.”
동경의 눈초리가 익숙하지 않은 신해는 머쓱해진 듯 눈을 피했다. 화제도 좀 돌릴 겸 윤혁의 다친 곳을 좀 봐주겠다면서 자신의 슈트에 내장된 스캔 기능을 활용했다. 순식간에 윤혁의 몸 이상 상태가 진단되었다. 신해는 간단한 니들을 통해 체내로 나노머신을 주입해 주었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통증이 가라앉으며 관절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군용 나노머신보단 낙후된 버전이지만 꽤 잘 들을 거다. 외상 한정으로는 초고속 재생에 맞먹는 수준이거든. 인공지능의 해킹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고.”
말짱해진 몸 상태를 느낀 윤혁은 감탄하였다.
“일반인 신분이 된 지금도 지급되나요?”
“일종의 특별 공로로 받은 혜택 같은 거지. 방금 그 슈트도.”
“우와! 굉장하네요.”
“실전에서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낡은 군복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
신해는 낡은 골동품 겸 전리품이라 표현했지만, 분명 방금 그 슈트는 경찰 안드로이드를 충분히 제압할 만큼 강력했다. 순수한 기능만 보면 당연히 기계에 밀렸겠지만, 운용하는 사용자의 전투 실력 덕분에 커버가 되었다.
‘아마 상당한 베테랑 전사인 모양이네.’
히어로 영화의 영웅들이 튀어나온다면 꼭 저런 모습일까 싶었다.
“애초에 진짜 솔져들이 사용하는 무장은 이런 하찮은 호위용 슈트나 안드로이드 따위와는 차원이 달라. 너도 알다시피 오늘날의 기계는 최약체 비전투 개체 하나조차도 잠재력을 해방하면 1년 전의 인류 군대 전체를 이길 정도로 강해. 화력이 그 정도라는 게 아니라 전자전 능력, 해킹 능력, 특수 기능, 지능, 기동력을 감안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만. 아무튼 우린 그런 놈들과도 전력으로 싸웠지.”
감탄 반응에 기분이 좋았는지 신해는 자랑을 늘려놓았다.
“기계 말인데요, 원래라면 인간상대로는 온전한 능력을 못 사용하겠죠?”
최근 일들로 걱정이 된 윤혁이 물었다.
“그래, 기본적으로는 율법이 내장되어 있으니까 인간 앞에선 작동 안 해.”
“방금도 제약된 로봇들이었겠죠?”
“아마도 그렇지? 만약 풀 파워였다면 네가 못 살아남았겠지? 사실 내 슈트도 상대가 기계여서 제 위력을 발휘했지, 너 같은 민간인 상대로는 아무 힘도 못 써. 아니 오히려 내 힘을 봉인하는 구속 장치로 작동하지.”
대화하는 사이에 통증이 꽤 줄어들었고 외상도 거의 치유되었다.
윤혁이 몸을 일으키자 그 옆에서 신해가 어깨를 붙잡고 부축했다.
“오늘은 계속 나랑 동행해라. 언제 또 방금 같은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저는 괜찮은데요.”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말고. 방금 그렇게 당했었잖아, 인마.”
하기야 이미 여러 번 공격당했으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경호는 필요했다.
둘은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군인 은퇴하신 이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데요?”
“요리사. 난 고향에 있던 시절부터 요리하는 걸 좋아했거든.”
“제 가족이랑 비슷하네요.”
신해는 윤혁 앞에서 솔져 경력보다는 오히려 요리 실력을 당당히 자랑했다. 고향에서도 즐겨왔으며, 군대에서도 틈날 때마다 요리를 공부했었다고 한다. 한국으로 이사해오기 전에는 에우로페 제국에서 활동하며 길거리에서 나름 명성도 떨쳤다고 한다. 본인에 의하면 전투 실력보다 요리 실력이 더 뛰어나다나.
‘재미있는 사람이네. 처음 싸우는 모습 보았을 때는 무서웠는데.’
강한 보호자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기계들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
{자동 재생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부서진 안드로이드들의 신체가 자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파괴되고 손상된 부품과 기관들이 분자 단위로 재건축되었다. 살갗이 빠르게 차오르고 뼈가 맞춰지면서, 로봇들은 서서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전 솔져의 공격에 재생 방해 물질이 함유되어 있었는지 재생 속도가 다소 느렸다.
{안티 메탈 입자가 함유된 것으로 추정. 예상보다 재생 지연됨.}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로봇들은 재생을 멈추고 작동을 중지했다. 마치 최면이나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조용해졌다. 모자를 푹 눌러 쓴 노신사 한 명이 로봇 잔해가 있는 곳으로 조용히 걸어왔다. 그는 뇌파 간섭 술로 기계의 통신 시스템을 잠시 교란하더니, 경찰 로봇들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도록 유도했다. 비교적 구세대 기술력이었으나 특유의 개량이 첨가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운용자의 응용 자질 덕분인지 기계들이 일시적이나마 무방비가 되었다.
“이거 복잡하게 돌아가는군.”
허름한 차림의 노신사는 쭈그려 앉았다. 그는 부서진 로봇의 두뇌 부분에 탑재된 제어 장치들을 살펴보았다. 조금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 혹시나 해서 따라와 봤는데 이미 일이 정리된 뒤였다.
“역시나 그 아이에게 특별한 구석이 있었던 건가.”
그는 차분히 고장 난 컴퓨터 장치들을 살피며 그것들 하나씩 재작동 시켰다. 마치 수십 년간 이상 비슷한 일을 감당해온 것처럼 능숙한 솜씨였다. 그는 기계들의 양자 컴퓨터 두뇌를 적당한 깊이만큼 뒤졌다. 명령 체계와 메모리는 물론 사고 처리 과정까지 세심히 살폈다. 외부에 꼬리 밟히지 않을 정도로만.
이윽고 정보를 획득한 그는 좀 더 깊고 복잡한 단계까지 접근했다.
어느 경점에 이르자 노인의 고상한 표정이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헤러틱 이벤트(Heretic Event)라니.”
헤러틱 이벤트(이단 현상). 현세대 최고의 컴퓨터 공학자들도 소수만 그 존재를 아는 괴이 현상. 그러나 노인은 단 몇 번의 능수능란한 조작만으로도 이를 유추해냈다.
“3대째여,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일 셈인가?”
‘그대는 뭐가 되려는 거지?’
노인은 수심 어린 표정으로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때 조사관으로 파견된 다른 인공지능 로봇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노인을 보더니 뭔가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연행할 작정으로 다가왔다.
“잠시만. 나는 이 사건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죠.”
노인은 기계들의 언어를 중얼거리면서 직접 의사를 전달했다.
잠시 후 텔레파시 형태의 뇌파를 전달받은 안드로이드들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파괴된 개체들은 저희 쪽에서 회수하겠습니다. 당신은 아는 바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만일을 대비해 비밀을 엄수해주십시오.}
안드로이드들이 순순히 물러나자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수요일 예배당 기도실에서 보았던 그 착한 청년이 험한 꼴을 당했다. 마음이 쓰라렸다. 그 아이를 만났을 때는 그저 기분 탓이려니 생각했었으나 조금 전의 로봇 시체의 데이터를 분석한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신께서 그에게 이번에도 절묘한 섭리를 베푸셨다. 그 만남은 결코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으리라.
“어쩌면 3대째의 혈육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이번 대의 억제자인가?”
만일 가설이 옳다면 그 아이는 크게 고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세대 초인들의 왕, 그는 이전 세대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과연 아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아이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과거의 자신과는 달리 때가 묻지 않은 아이라서 더욱더 신경이 쓰였다.
‘부디 주님께서 안전히 그 아이를 돌보셔야 할 텐데.’
그러나 머지않아 자신의 신분과 행방이 발각된다면 반드시 초인들의 왕이 찾아올 것이다. 아니, 그 대단한 자라면 이미 추격해놓고도 일부러 기다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다 잡은 물고기를 농락하는 낚시꾼처럼. 자신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알아내려 하겠지. 어쩌면 받아내려는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고. 너무 늦기 전에 아이에게 모든 것들을 전해주어야만 한다.
“네 길은 어쩌면 고달프고 험난한 시련의 길일지도 모르겠구나.”
마치 자신이 겪어왔던 기가 막힐 여정처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조언뿐이라는 게 참으로 아쉽구나.”
그는 조용히 신께 아이를 위탁하는 마음으로 진심 어린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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