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9회 초인들의 세계 Ch 15. 리온 마흐무드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8.22 | 회차평점 0 |
Chapter 15. 리온 마흐무드
브리타니아 연방.
구 영국을 중심으로 과거에 영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의 소속이었던 지역들이 만들어낸 통합 대륙형 정치 체계다. 세계 각지에서 불붙듯 일어난 통합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인류 단일화의 흐름에 편승하여 빚어진 조직이었다. 현재는 에우로페 제국과 더불어 서부 섹터를 구성하는 양대 산맥이 되었다.
옛 왕가에서 태어난 한 명의 천재가 연방 형성의 주역이었다. 고귀한 출신마저도 무색하게 만들 만큼 탁월한 재주, 시대를 뛰어넘는 능력, 그리고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왕 일라이저 1세는 최상위 초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배경의 도움 없이 오로지 순수한 자신의 실력만으로 정상에 올랐다. 또 경제, 정치, 사회, 과학,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놀라운 맹활약을 보여 그 세대의 구심점 중 하나가 되었고 시대를 초월한 높은 사고력으로 서부 세계를 단기간에 장악했다. 이내 그는 조상들이 이룩했던 전성기 시절마저 뛰어넘는 거대한 지배력을 확립했다. 그를 외부에서 제지할 만한 것이라고는 상위 권력인 인류연합과 동격의 지도자들 이외에는 없었다.
이렇듯 뛰어난 인기와 최절정의 권력을 누리는 그도 일개 인류연합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초인으로서의 탁월한 재능과 실제적인 활약상을 통해 인정받았고 지금은 인류연합 수장의 핵심 부관 중 하나가 되었다.
일라이저를 비롯한 일곱 지도자는 인류연합을 대신해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국가를 나눠서 관리하는 중이었다. 물론 장차 우주에 거하는 식민지 주민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면 허울뿐인 국가 시스템은 폐기될 예정이었다. 그 이전까지 아무런 사태나 분열 없이 지구 주민들을 잘 맡아서 관리하고 보호하고 조율하는 것이 구 시스템의 관리자인 섹터장들의 책임이었다.
일라이저와 섹터장들이 맡아야 할 조율 역할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다. 과학 기술의 배분, 산업 혁명의 활성화, 지구의 인구 배분, 그리고 인위적인 정치 통합까지 여기에 포함되었다. 모두 장차 공개적으로 통치할 인류연합 정부를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수순이었다.
“민주주의가 지금껏 합리적인 제도로 여겨진 이유는 안전성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어리석은 행동과 부패를 제어하기가 쉬우니까요. 그 효과를 실제로 여러 차례나 증명하기도 했죠. 그 팩트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귀공자처럼 생긴 키 큰 백금발의 청년이 홀로그램 형상을 통해 나타나 기품 있게 연설했다. 나이는 매우 젊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청중을 위압하고 매혹하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고귀함과 귀족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전 시대에 이미 증명되었듯 지금은 그 메리트를 잃었습니다. 원하건 원치 않건 시대의 흐름은 군중이 아닌 초인의 지혜를 지향할 것입니다. 1대째 위버멘쉬가 이미 이를 증명했습니다. 그의 치리 때에는 번영과 발전이 있었고, 그의 사후에 권력이 흩어지자 즉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국무 회의에 참석한 치리자들은 감히 청년에게 도전하거나 반론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젊은이들의 선망과 동경의 대상, 기성세대를 제압하고 능가한 자, 연방 총리. 일라이저 1세는 참으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충고와 지혜를 귀담아듣고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자신을 대적하는 정적들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가혹했다. 또한 결코 실수나 패배는 허용치 않았다.
“물밑에서는 통합이 완료되었으니 조만간 공개될 대통합에 다들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이건 국가이건 대중이건 말입니다. 그걸 위해서 여러분들도 각자의 일을 성실하게 해내어 실력을 증명해 보이셔야 하겠죠.”
“알겠습니다. 각하.”
“이번 회의 때 제안한 프로젝트를 아무런 차질 없이 이행해주셨으면 합니다.”
회의가 종료되고 홀로그램들이 차단되었다. 곧이어 일라이저의 수석 비서는 금주에 진행할 스케줄을 정리하는 간단한 브리핑을 시행했다. 일라이저는 홀로그램으로 된 화면들을 빠르게 뇌파로 조작하며 업무를 이어나갔다. 행성급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연산량이 순식간에 오갔다.
“수고했군, 실장.”
“혹시 따로 당부하실 내용은 없습니까?”
“음, 행정 구역 재편도 이번 달 내로 마무리될 것 같고, 우리가 자체적으로 구축한 은하계 네트워크의 성능도 꽤 진전이 있군. 산업 혁명의 여파로 인한 진통 역시 대부분 극복되어가고 있어.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염려하시는 부분이 있습니까?”
총리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손쉽게 해결하던 그가 걱정할 만한 일이 무엇일까? 비서는 조금 궁금해하였다. 그의 주군은 만능에 가까운 위인. 늘 모든 일을 여유만만하게 대처하지 않았던가?
“종교 쪽 문제는 조금 더 점검해야 할 부분이 있군.”
“이미 구시대 종교들의 분쟁은 종료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탈 종교 현상 덕에 우리의 발목을 잡지도 못할 테지.”
이미 각 교구의 작은 교황들이나 무슬림 칼리파들을 포함해 각 종교의 지도자들은 서로를 존중하자는 맹약과 더불어 인류연합에 충성하겠다는 맹세까지 진행해놓은 현황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본인 종교에 대한 충성이나 신념은 없었다. 그저 허울만 남은 껍데기. 언제든지 치워버릴 수 있는 잔챙이들이었다.
“허나 흐름을 뒤집어놓는 변수를 생성하는 자들이 종종 있어서 말이야.”
총리는 또 다른 데이터 화면과 홀로그램을 띄우고는 꿰뚫듯 응시했다.
여러 인물의 사진과 신상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자료였다.
“세상과 떨어져 고고한 척 일을 벌여놓는 자들이 항상 있는 법이지.”
“설마 선교사들 말씀입니까?”
“그래, 한동안 놔뒀더니 요새 다시 활동이 잦아지더라고.”
현 세상에 단 하나만 남은 왕따 종교. 그리고 그 종교를 설파하는 자들. 과거의 브리타니아, 아니 영국은 그 종교의 선두에 서 있었지만, 지금의 그 나라 후손들은 완전히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지도자들은 포교 활동을 자중하겠다고 협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안타깝게도 저들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그런 제재가 불가능하지.”
눈앞의 홀로그램 데이터는 일종의 비공식 블랙리스트였다. 자기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권면하고 성서를 가르치는 순수 복음주의 선교사들. 법적으로는 제재할 명분이 없어 곤란하다. 현재 그들의 활동 영역은 구 중동 지역, 아프리카 연합, 태평양 섬 연합, 남미 연합, 네오 아메리카, 심지어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물론 그들이 직접적으로 거슬릴 이유는 없었다. 그 자체만으로는 연합을 방해할 능력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일라이저가 우려하는 문제는 다른 나비 효과에 있었다. 선교사들은 타 종교 세력의 핍박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류연합이야 선교사들이 뭘 하건 상관없지만, 크레센트 같은 일부 무리는 다르다. 잠적한 지금조차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확정성 요소. 선교사들의 도미노가 기껏 잠재워놓은 종교 분쟁을 수면 위로 올릴 위험성도 다분했다.
“특별히 이 인물이 제법 골치가 아프군.”
“리온 마흐무드. 구 이집트 출신 콥트 개신교 교회 신자였는데 현재는 남아있는 신실한 지구 복음주의자 연합에 소속되었군요. 특이 사항으로 선교사 중 유독 정보 획득, 언변과 설득, 세계정세 파악 및 신속한 대응에 능숙하군요. 돌발적인 타입으로 보이는군요. 하지만 그래봤자 고작 애송이 아닙니까?”
비서는 왜 이런 녀석을 신경 쓰냐며 갸우뚱거렸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야. 아주 온화한 친구지. 다만, 그 행동반경이 예측 불허라서 곤란해. 도저히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 불쑥 다가가서 포교하고 그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남겨두지. 제법 머리가 영리해.”
최고 보안이 걸린 이 블랙리스트에서도 리온은 가장 윗줄 이름이었다.
“그래봤자 고작 선교사 한 명 아닙니까? 당신 정도나 되는 위대한 분이 왜 그런 녀석을 신경 쓰죠? 게다가 나이도 갓 스물을 넘긴 애송이⋯⋯.”
“이런, 나도 스물일곱 밖에 안 되는데, 내게 대한 비하로 이해해도 되나?”
“아, 실언했습니다.”
비서가 땀을 삐질 흘렸다.
“하지만 당신 같은 최상위 초인을 일반인과 동격으로 둘 수는 없는 법이죠.”
일라이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흘깃 화면 위 사진을 보았다.
‘이 작은 인물이 신경 쓰이는 이유라.’
사실 선교사니 나비 효과니 하는 이유는 다 핑계였다.
“특이 사항이 있어. 어린 시절에 무려 ‘그녀’의 제자였다는 점이 걸리더군.”
그가 지칭한 대상을 곧바로 깨달은 비서는 흠칫 놀라며 얼어붙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그런 특징이라면 주목할 만하군요.”
“제 스승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걷는다니, 참 궁금하단 말이지.”
일라이저, 총리이자 왕인 백금발 남자는 조용히 웃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오래간만에 그를 흥미롭게 해줄 상대를 만난 덕택이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항상 예측과 다르게 끌어냈던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현재의 브리타니아 연방은 과거의 신실함을 버리고 신을 섬기지 않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포교의 불씨는 여러 다른 민족을 통해 살아남아서 역사를 바꾸는 바람을 잔잔히 일으키고 있었다.
일라이저는 한편으로는 나비 효과가 흥미로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미지의 것으로 느껴졌다. 리온이란 자는 그의 스승인 ‘그녀’와 비견될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무리일지도 모르나 ‘그 메시지’의 기묘한 위력이라면 또 모르지. 부디 이들 선교사들의 행적이 반경을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주군께서는 당장 이 문제에 대해서 별로 닦달하실 생각이 없군.’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얼마나 커질지, 대단하신 총리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내 선에서 적당히 감독해줘야겠군.’
주군의 손에 이 일이 넘어가면 파급력이 더 화려하게 커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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