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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3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1. 인터미션 VI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5.29 | 회차평점 0 0

 

 

 

 

 

*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과거에는 많은 이들이 이렇게 믿었다. 우주 만물이 끝없는 투쟁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이미 학계에서 자연 발생적 진화 이론이 쓰레기 가설 취급 받으며 사장되어버린 지금까지도 그 이론의 여파와 찌꺼기는 의외로 많은 영역에 녹아있다.

   여전히 인류는 경쟁을 주된 성장의 동력원으로 생각한다. 낮은 곳에 머물러 있는 일반인들부터 저 높은 곳에서 세상을 주물럭거리는 초인들까지도.

   “냉전, 친선경기, 이종족과 인간과 기계의 삼파전…….”

   그을린 피부를 한 검붉은 머리의 미남이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윤리가 남긴 유산 속에서 찌들어 살고 있군.”

   약간 사납고 거칠어 보이는 인상의 미남자,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료한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 마물왕이라는 악명으로 불리는 자, 태양을 삼킨 늑대는 현재 그의 걸작 ‘해처리 ver 23.3’을 조심스레 점검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숱한 업그레이드 덕분에 이제는 만능의 공장으로 거듭났다. 인간에게 친숙한 탄소 기반 생명체를 넘어 무기물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화학 원소를 기반으로 세워진 각종 신개념의 인공생명체, 생체 기계, 유사 생체형 기계, 나노머신 기반 생명체까지, 그 모든 부류를 전부 포괄하여 생산하는, 종합 선물 세트 부화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이 미학적으로 꼭 마음에 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종의 기원을 이런 식으로 억지로 구현해내는 것은 좀 불편한데.”

   태양을 삼킨 늑대는 턱을 한 손으로 받치고 중얼거렸다.

   “우리의 철학에도 어긋나고 말이지.”

   그는 과거 역사 속에서 무참히 학살 당했던 인디언 조상들을 떠올렸다. 그때도 외부에서 온 자들이 본토에 있던 자들을 몰아냈었다. 앵글로색슨 족속은 가증하게도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기치로 내세워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했다. 그들의 입술은 기독교를 제창하고 있었지만 실상 그들의 행동은 무신론을 부르짖고 있었다.

   “뭐, 그래도 그 녀석은 말과 행동이 다르진 않아서 좀 낫긴 하네.”

   침탈했던 그 민족의 현 후예들을 다스리는 자는 신수왕 일라이저였다. 확실히 그자는 일관되게 힘과 지배의 논리를 내세울 뿐, 말과 행동이 상이한 가증한 위선자 무리와는 달랐다. 태양을 삼킨 늑대가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그를 꺼려도 같은 인류연합의 간부로서는 인정하고 동경하는 데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성운과 일라이저의 대결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진심으로 궁금하군.”

   마음 같아서는 친분이 더 깊은 성운을 응원해주고 싶으나 그것이 그를 돕겠다는 의지와 직결되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번 난제 앞에서 어떤 해결책을 내밀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태양을 삼킨 늑대는 여태까지는 일부러 중립에 가까운 태도를 고수해왔다. 친구를 워낙 잘 아는 그는 성운이 곧 생각지도 못한 타개책을 고안하리라 믿었다.

   “그나저나 크로스솔져……, 유일신을 믿는 인간들을 이용해보겠다? 성운답지 않게 조금 낡은 발상이지만, 그래도 녀석이라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유일신을 내세우는 민족에게 원한이 깊은 늑대로서는 썩 달갑지는 않았다.

   ‘하긴 히어로즈니 신수(神獸)족이니 내가 신경 쓸 바는 전혀 아니지.’

   그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업무로 고정시켰다. 그럼 슬슬 업무를 마무리 지을 차례인가? 마침 연구 초기에 구상했던 레벨까지 모든 목표치가 거의 완전히 도달했다. 최종 점검만 마치면 된다.

 

   태양을 삼킨 늑대는 그가 열다섯 살이었던 시절을 회상해보았다.

   아직 초야에 묻혀있었던 소년 시절의 그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식물들을 유달리 정성스레 보살피는 것이 지루한 일생의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는 종종 스스로 개발해낸 여러 변형 종자들을 커다란 버드나무 앞에 심어놓고 하나의 살아있는 도감을 만들곤 했다.

   하루는 먼 나라, 지금 기준으로야 지척이나 다름없지만 그때는 멀다고 생각했던 낯선 세계에서 온 친구가 태양을 삼킨 늑대를 따라 그의 아늑한 아지트 안에 입장했다. 늑대는 평소처럼 여러 화분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의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고 성운은 곁에서 차분히 구경하였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그거참 재미있는 취미 활동이네요.”

   기계, 우주선, 로봇, 양자 역학 같은 딱딱하고 메마른 기계 문명의 수풀 속에서 일평생 거닐고 탐구해온 성운으로서는 늑대의 생동감 넘치는 전원적 취향을 보면서 흥미가 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깝지 않습니까? 당신 정도나 되는 인재가 시골에 묻혀있다니 말이에요. 슬슬 제갈공명처럼 세상으로 나와 패권을 잡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흠, 그러면 밭과 숲의 식물들은 못 만지게 되잖아.”

   “하하, 그런 걱정일랑 마세요. 초인들의 사회, U-society의 정식 멤버가 된다면 당신 역시도 정치와 경영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연구를 실컷 즐길 수 있습니다. 고작 식물 몇 종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성운은 커다란 도면을 펼쳤다. 이에 늑대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런 낡은 폐기물 이론을 왜?”

   “퀴퀘그도 자연 발생 진화론의 허구성을 벌써 깨달아버린 겁니까? 이건 저희도 나름 수천 차례의 실험을 통해서 겨우겨우 증명해낸 사실인데요?”

   늑대는 피식 웃었다.

   “여어, 도시 촌놈 씨. 원래 자연 생명체들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연 발생론 같은 헛소리는 안 믿어. 하긴 너희야 기계로 잔뜩 뒤덮인 세상에서만 살아왔으니 자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겠지만.”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걸 보여드린 겁니다.”

   “왜?”

   “생물 진화 계통도, 이 그림은 허구를 담고 있습니다. 적어도 자연 상태에서는 유의미한 복잡성이 저절로 발생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기에는 확률도 너무도 희박하고, 무엇보다 중간 단계를 밟고 건너갈 안정적인 보호막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하지만 말입니다, 발상을 전환해보죠. 만일 우리가 인위적으로 진화 현상을 구현해낼 수 있는 튼튼하고 자율적이고 지성적인 보호막을 만들어내면 어떨까요?”

   성운의 희한한 제안에 늑대의 입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아하, 그러니까 생체 공장 또는 유전자 편집 장치를 지구 혹은 항성계 규모로 구축한 뒤, 이론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유전자 조합을 현실화해 시험해보자 이거구나. 자연적으로는 진화가 불가능하니 인위적으로 유도해내자는 건가?”

   “정확합니다. 하지만 굳이 기존의 탄소 기반, 아니 DNA-RNA-단백질 기반의 생물학적 고정관념에 묶일 필요도 없습니다. 규소 기반, 금속 기반, 반물질 기반, 나아가 나중에는 기초 핵물리학의 기본 입자 세트마저 벗어난 범주의 입자들로 만들어진 빌딩블록(building block)을 써서 생명체의 기본 도그마 자체를 재창작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성운의 발칙하고 과감한 지적 능력은 상상력의 나래를 더욱 넓게 펼쳤다. 인간에게 금기된 영역들을 송두리째 꿰뚫는 것을 넘어 자연계에 금기된 신질서에까지 손아귀를 뻗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 두려운 것은 초인들의 지성이 이 모든 상상력들을 실제적으로 이룰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흥미로운 주장이네. 그래, 한 번 실험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

   늑대는 자신 앞에 놓인 커다란 버드나무를 바라보았다. 옛 조상들은 버드나무의 정령에게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숲의 나무와 풀과 잡초들과 작은 동물들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허황된 애니미즘적 미신이긴 하다. 그러나 미신이라고 무시하기 전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수호자 버드나무 대신 무한히 다양한 종을 창출해내는 생체 제너레이터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 인간도 자연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지 않을까?’

   전원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것처럼 보여도 본질은 초인이었던 늑대.

   이후 태양을 삼킨 늑대는 성운의 소개를 받아 U-society에 가입했고 곧 카이젤의 신임을 받아 인류연합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북부 섹터의 주인인 된 그는 정치적으로 여러 종류의 개혁을 일으키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분주한 경영 일정 가운데서도 그는 짬짬이 틈을 내서 어린 시절 즐겼던 취미를 이어나갔다. 식물 관찰 일지 대신에 우주 규모의 대대적인 생물 창조 실험으로 바뀌긴 했지만.

 

   회상을 마친 늑대는 피식 웃었다.

   “뭐, 신을 내세우는 자나 신을 자처하는 자나 골때리는 건 매한가지네.”

   앵글로색슨 족속 같은 과거의 위선자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신 이제 그 자리에는 훨씬 더 위험한 생각과 사상을 지닌 자들이 섰다. 위대한 그분, 초인들의 왕, 그리고 능력은 적으나 사상은 그 못지 않게 위험한 그의 부하들.

   “마스터도 그렇고 에녹 씨도 그렇고 다들 무슨 생각인지.”

   늑대는 마무리 작업을 이어나가며 투덜거렸다.

   “한 명은 아무도 몰래 우주를 뒤엎을 위력의 초강력 엔진에다 초능력 시스템을 창조하질 않나, 다른 한 명은 종의 기원을 통째로 신개념으로 재구성할 생체 공장을 나한테 주문하질 않나. 하여간 둘 다 신 놀이에 취했다니까.”

   최종 점검 작업을 마치자마자 최신 버전 해처리가 우주 저편으로 텔레포트 되었다. 생명공학 부분은 태양을 삼킨 늑대가 깔끔히 완성해주었으니 이다음부터는 에녹의 몫이다. 아마 그의 손을 거친 이후로 해처리는 상위 차원에서마저 상호작용이 가능한 물체로 개조되리라. 아무래도 이종족들에게 강력한 기계형 무기와 초능력을 심어주려면 그게 필요할테니까. 아울러 이종족에게도 자체적인 생산 기능과 기술 개발 능력을 심어주는 일도 가능케 되겠지.

   ‘대체 무슨 프로젝트를 벌이려고 그러시려나.’

   아주 잠깐 걱정이 들었으나 이내 안심하며 신경을 껐다.

   “워낙 원칙주의자니까 사고 치진 않으실 테고 나름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에녹 아담즈라는 인간은 누구처럼 대책 없이 호기심만으로 프로젝트를 벌일 인간은 결코 아니다. 필요 시 기행을 감당하긴 해도 그는 항상 인류의 번영과 안전과 승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다. 그러니 이번 계획도 틀림없이 장차 임할 여러 불확정 요인에 대비하기 위한 거시적인 노력의 일환이리라.

   “그래도 여러 사람이 불똥을 맞을 일은 불가피하겠지.”

   늑대는 미리 그들에게 애도를 표하였다. 진심 담기지 않은 가식적이고 얕은 마음가짐으로. 애당초 인간들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는 뜨거운 열정은 늑대와는 별 상관없는 감정이었다. 그에게는 자연이나 인간이나 하나의 객체에 불과했으니까. 최종 승리만 보장된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할 필연적 고통은 얼마든 용인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고방식은 그가 무시하던 자연 발생론적 사상과 일견 통하는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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