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4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2. 크로스솔져 II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6.08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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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
-으아아악.
-크윽, 비겁한 녀석들.
자신들이 먼저 비겁한 전략을 펼치다 역으로 넘어가 놓고 야빈과 시스라는 뻔뻔스럽게 크로스솔져들을 노려보았다. 사실 크로스솔져들이 뛰는 전장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크로스솔져들은 악랄하거나 비겁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항상 신수들의 비열한 수법이 본인들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어서 버벡과 언더우드를 돕기 위해 지원군이 도달했다. 웨슬리와 친첸도르프가 미리 동료들이 만들어놓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격을 넣어주었다. 수차례의 교전이 오간 끝에 시스라와 야빈은 육체를 봉인 당했다.
“말이 많군.”
웨슬리가 시스라의 자신만만했던 뿔을 나노슈트 구두로 짓밟았다. 그의 슈트와 결합된 인공 중력원 소자가 발동되면서 단단했던 뿔은 바위에 짓눌린 듯 과자 부스러기처럼 부스러졌다.
“지원 감사드립니다.”
언더우드가 공손하게 감사를 전하자 웨슬리와 친첸도르프가 답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에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크로스솔져들은 기본적으로 열두 팀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항상 고정 멤버로 팀이 구성된 건 아니었다. 때때로 팀끼리 팀원을 교체해서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한 팀은 4인에서 6인 사이의 인원으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은 둘씩 쪼개서 활동하곤 했다. 그 덕에 서로 다른 팀들끼리도 교류할 기회가 많았고 전우애를 다지기가 쉬웠다.
“슬슬 추출하죠.”
친첸도르프의 제안에 버벡이 흔쾌히 끄덕였다. 그들은 늘 연습했던 대로 신수들의 뇌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손상이 작은 수술이었고 신수들은 원래 특유의 탁월한 재생 능력이 있었기에 적에게도 비교적 자비로운 처사였다.
-크윽, 그걸 모아서 무슨 짓을 하려는 속셈이냐?
-확률왕이 시킨 짓인가? 기술력을 모방하려고?
웨슬리는 다시금 시스라와 야빈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희를 심판하는 이유는 단 두 가지야. 첫 번째는 너희가 인류연합 간부의 비인도적인 계획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너희가 사탄의 장난감까지 되었기 때문이지.”
-빌어먹을 광신자 놈들! 이런 위선자들!
“실컷 떠들고 싶은 대로 해.”
그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발악하던 시스라의 목소리가 갑자기 돌변했다.
-<크크, 이 몸을 빌려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군. 물리계에 간섭하는 데 한계가 있는 탓에 시스템 자체를 지배하지 못하는 게 참으로 아쉬워.>
그러자 크로스솔져 넷은 일제히 긴장한 표정으로 놈을 주시했다.
“저거 저거 또 악령 들린 모양이군.”
“벌써 이번 달에만 세 번째로 나타나는 현상이네요.”
친첸도르프와 언더우드가 냉담하게 말했다.
“친첸도르프 씨, 유독 왜 신수들은 악마들과 잘 소통하는 걸까요?”
“아마도 가짜 영성을 주입한 탓이겠지.”
“가짜 영성이요?”
“신수왕(神獸王), 그자가 꾸미고 있는 모종의 일과 관련이 있어. 다른 사병들이나 이종족과는 달리, 신수는 확실히 뭔가 특별한 면이 있거든.”
“그가 도대체 뭔 일을 꾸몄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죠? 그 목적은요?”
그러자 이번에는 웨슬리가 대신해서 대답해주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인류연합 대표와 부대표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병을 운영하려는 게 이유이지 않을까? 하필이면 그자의 그런 시도 때문에 거짓 영성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신수가 악마의 도구로 이용당하기 쉽게 변해버렸지만.”
이어서 버벡은 전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재작년 막 냉전이 벌어졌을 시기에……, 지구의 시민들이 주님의 복음에 대해 냉소적으로 돌변한 현상도 신수들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건 모르지. 아직은 심증밖에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가 증거를 찾아야 해.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를 파헤쳐서 고발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인류연합 대표가 신수왕을 저지하거나 징벌하도록 유도해야지.”
대화를 마친 직후 네 영웅은 더는 악마가 시스라의 몸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시스라의 뇌를 산산조각내버렸다. 일반적으로는 불살(不殺) 원칙을 고수하는 크로스솔져들이었지만, 악마가 개입되는 순간만큼은 가차 없었다.
<너희를 영원히 저주해주마.>
악마의 단말마가 메아리치며 희미해졌다.
“그런 저주는 우리에겐 무효해.”
과거에도 발람이라는 이름의 거짓 선지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저주를 퍼부은 바가 있었으나 주께서는 저주를 허용치 않고 도리어 축복으로 바꾸어버리셨다.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크로스솔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들은 자신들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굳게 보호하시는 이의 의로운 오른손을 의지했다.
*
다시 2개월 후.
지구 필드에서 벌어진 냉전의 전세는 시시각각 엎치락뒤치락했다. 그 와중에도 신수들과 히어로들의 데이터는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 데이터는 셀레스티언과 바이오닉 솔져를 진화시키는 용도로 유용하게 쓰일 예정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쓰이는 중이기도 했다.
이렇듯 인류연합이 더욱 큰 그림을 그리며 농락하는 중이건만, 싸우는 당사자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던전을 공략하고, 사람들을 지키고, 힘을 키우고, 이익을 획득하는 일에 정신이 팔렸기에 우주에서 벌어지는 거시적 흐름을 볼 턱이 없었다. 심지어 크로스솔져들조차도 자신들의 행보가 히어로즈 전체는 물론이고 바이오닉 솔져들의 성장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최상위 초인인 성운과 일라이저는 자신들의 벌이는 전쟁의 영향력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둘은 비밀리에 일곱 철인왕은 물론 에녹과도 거래를 행하며 정보를 교류했다. 둘은 이 게임이 장차 인류연합 발전 방향에도 영향을 줄 열쇠임을 잘 알았기에 더욱더 최선을 다했다. 어떻게든 유익한 기여를 하여 주군에게 두둑한 신임을 받기를 원했다.
“수고하십니다.”
“오냐.”
성운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유유이 시찰 목적으로 초거대 던전을 방문했다. 크리슈나가 그를 맞이하였다. 그곳은 이미 궁극의 난이도에 도달한 던전이었다. 수많은 아공간, 변형 공간, 시뮬레이션 우주, 홀로그래피 우주, 하늘도시와의 연결고리가 겹쳐져 생성된 거대 무대였다. 원래대로라면 단단히 무장해도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성운은 양복 차림이었다. 이미 최강의 히어로가 이곳을 공략해 싹 정리해버린 뒤라 여유만만했다.
“벌써 다 쓸어버리셨군요. 최소 한 시간은 유닛들이 재생되지 않겠네요.”
“뭐, 별것도 아니더구먼.”
보통 히어로는 여러 팀이 달려들어도 이기기 어려운 영웅급 신수 수천 마리, 여기에 더해 그것들의 부하들과 권속들, 무엇보다 소형 개체의 힘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거대 유닛들까지, 도합 억 단위가 넘어가는 수효의 군단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SS 클래스 초인의 초능력 앞에서는 전투력 측정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영웅들의 왕, 크리슈나는 가볍게 장갑을 털며 여유 부렸다.
“오랜만에 몸도 푸시고 즐거웠겠습니다.”
“아주 시원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숨통은 트이는군. 지구의 다른 곳들보다는 나아. 제로원 권역 안에서는 힘도, 기술도, 초능력도, 심지어 초지능체의 능력마저도 큰 제약을 받잖아. 뭐, 지구를 안전하게 지켜야 하니 제약을 거는 건 이해는 가지만.”
그나마 던전은 비교적 힘의 제약을 덜 받는 무대였다.
“저도 사실 근질거리긴 합니다. 철인왕들처럼 마음 놓고 권능을 사용하려면 최소한 먼 항성계나 다른 은하계로라도 출장 가야 하니까요. 던전이 이럴 때는 대용품이 되는군요.”
“큭, 어차피 힘쓸 일도 별로 없으면서.”
“그야 그렇긴 하죠.”
성운은 초토화된 던전 내 벌판을 넌지시 구경하며 본론을 꺼냈다.
“슬슬 제어에서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 뭐냐…, 십자군이니 뭐니 하는 놈들?”
“크로스솔져입니다. 그들은 십자군이라는 표현을 멸칭으로 여기는지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역사적으로도 프로테스탄트는 항상 가톨릭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었지만요.”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제어에서 벗어나면 뭐? 네가 그걸 어쩌게.”
사실 크리슈나도 어렴풋이는 눈치채고 있었다. 초인이자 영웅인 그는 킹 오브 히어로즈라는 별칭답게 히어로 전체를 제어하는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해왔다. 솔져 출신이건 지구 시민 출신이건 그에게 거역할 자는 없었다. 압도적인 힘과 지혜도 문제지만 상대의 정신을 종속시키는 카리스마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반례가 생겨났다. 크로스솔져들은 이상하리만큼 크리슈나의 종속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물론 그렇다고 적법한 명령 체계를 위반하거나 명령에 불복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모범적인 시민답게 정해진 규칙들을 누구보다 잘 준수했다. 심지어 크리슈나의 명령에도 복종하였다. 허나 그들은 이제 킹 오브 히어로즈도, 심지어 성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두 관리자의 철학과 사상과 미학으로부터 독립하여 별도의 노선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영웅의 권리, 곧 사람들의 희망의 아이콘이 되어야 하는, ‘스타로서의 명예’마저 노골적으로 거절하고 있어. 아울러 자신들의 따뜻하고 물러터진 도덕 체계가 기존의 냉혹한 원리보다 낫다고 확신하고 있지. 더욱 골때리는 점은 그런 신념이 옳았음을 실전에서 증명해 보인다는 거야.”
“단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슬슬 그자들은 제 속내를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찌들대로 찌든 네 영혼을 말인가?”
“그렇게 말하시면 저도 상처받습니다. 합리주의자라고 해두죠.”
크리슈나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둥 피식 비웃었다. 하지만 성운의 고민은 생각보다 깊고 심각했다. 지속적으로 히어로들의 정신 패턴을 관측하며 감시해본 결과, 유독 크로스솔져들에게서는 타 히어로와 구분되는 특이한 변화가 많이 나타났다. 단순히 도덕적 역량의 성장만 빠른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 속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제어 불가능한 운동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로마 황제들도 초대 교회를 상대로 동일한 이질감을 느꼈을까나?
‘나름 일라이저와의 승부를 판 엎으려고 수를 두었건만……, 이제는 일라이저뿐 아니라 나의 예상까지도 벗어나는 것 같아.’
저러다가 정말로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만에 하나라도 저들의 특이한 행보가 보스에게까지 영향을 준다면? 물론 감히 거기까지 가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지만, 마냥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크로스솔져의 정신적 지주는 더 이상 크리슈나도 성운도 아니다. 영적으로는 자신들이 믿는 신 하나뿐, 그리고 굳이 이 땅에서 저 영웅 청년들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어른을 한 명만 꼽자면 역시나.
‘강성한 씨.’
그 사람은 무려 카이젤 라흐블뤼크라는 존재에 닿는 통로이다. 이대로 이 흐름을 내버려 둬도 괜찮을 걸까? 그런 점 때문에 처음부터 성한을 눈여겨보긴 했다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자충수를 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다.
‘어쩌면 내 걱정과는 반대로 호재일지도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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