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4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2. 크로스솔져 II (7)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6.15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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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개월이 더 지났다. 냉전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점수는 아슬아슬하게 성운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 있었지만, 아직 방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라이저는 상대측이 던전 공략 전략집을 충분히 확립하자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곤경을 만들어내었다.
“모양새는 조금 빠지겠지만, 2차 선발대를 공격해야겠군.”
히어로즈의 2군, 일명 2차 선발대. 정의감과 희생정신 말고는 솔져 출신 앞에서 별로 자랑스레 내세울 점도 없는 지구 시민 출신. 아무래도 이들은 전체적인 능력치가 부족한 탓에 던전 공략에는 직접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이전 냉전 때 히어로들이 수행했던 임무, 즉 던전 바깥 민간 지역에 흘러넘친 몬스터 사태를 막는 일들을 맡게 되었다. 어차피 민간 지역에는 보안이 걸려있어 위험한 몬스터가 출몰할 일이 적었기에 2차 선발대만으로도 충분히 공략 가능했다.
2차 선발대는 지구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기에 표식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을 묶는 지배층의 예속력은 매우 희미했다. 또한 그들은 식민지 출신과 달리 시뮬레이션 우주에 진입하는데도 제약이 많았다. 또 표식에 기본적으로 포함된 중요 수용체가 없는 탓에 아직은 초능력과도 호환이 맞지 않았다. 요약하면 2차 선발대는 막강한 1차 선발대와는 달리 그저 조금 강화된 군인 수준에 불과했다.
일라이저는 이들의 자격을 테스트해보기 위해 2차 선발대마저 끌어들일 수 있는 특수 던전을 개발한 뒤 다수의 2군 영웅들을 반강제로 함정에 빠트렸다. 느닷없이 던전 속으로 끌려들어 간 영웅들은 난생처음 감당하기 어려운 크나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일부는 그 고난을 이겨내고 전투력을 키웠지만, 대다수는 부상을 입고 패퇴했다. 신체 내 주입된 나노머신과 피코머신 덕에 신체는 원상 복구되었지만, 패배로 인한 정신적 충격은 상당히 오래 남았다.
자연히 가련한 2차 선발대를 구해주고 뒤치다꺼리해주는 일은 1차 선발대의 몫이 되었다. 이는 가뜩이나 아슬아슬하게 신수 세력과 줄다리기 중이었던 1차 선발대의 고충을 가중했다. 크로스솔져들이야 솔선수범해서 자기 자신보다 약자들을 챙겨주었지만, 여타 히어로는 2차 선발대를 짐짝처럼 여겼다. 자연스레 적잖은 수의 2군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은퇴를 택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영웅이 하나 있었으니.
-이제 포기하는 게 어때. 포기하면 편해.
“지켜야 할 동료들을 뒤에 두고 임무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김찬영은 2차 선발대 출신 히어로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무려 신수를 맞상대로 불리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신수(神獸), 아도니세덱은 별 가당찮은 녀석을 다 보겠다는 듯 찬영을 향해 물리 공격과 화염과 빔 일격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찬영은 슈트의 전투 기능과 에너지 상쇄 능력을 이용해 버텨내었다.
-넌 뭔데 왜 이리 열기와 빔 계열 공격에 강한 거지?
아도니세덱은 분석 능력을 발동해서 찬영의 신체와 슈트를 꿰뚫어 보았다. 물리 공격은 어느 정도 통한다. 그런데 에너지 계열 공격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강제로 공격 자체가 삭제되어 버리는 듯 했다.
-뭐 죽도록 패면 언젠가는 개미처럼 밟히겠지.
괴물은 이 대신 잇몸 격으로 물리 공격에 집중했다. 찬영은 날아드는 무수한 타격을 슈트의 물리력 상쇄 기능을 통해 막아내며 가까스로 견뎠다. 정면으로 상대하기에는 적이 너무나도 강했다. 찬영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면서 어떻게든 최적의 타이밍을 만들어내고자 애썼다.
-정신력이 엄청난 녀석이군.
아도니세덱은 펀치를 날려 찬영을 맞은 편 벽 쪽으로 날려버렸다. 신음을 흘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다시금 빠르게 날아들어 찬영의 배에 날카로운 손톱을 찔러넣는다. 찬영은 슈트의 팔 부분을 변형하여 아도니세덱의 손톱을 붙잡은 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서 놈의 신체로 무언가를 흘려보냈다.
-크아아악!
조금 전까지 찬영을 압도했던 아도니세덱이 갑자기 전신 구멍에서 피를 내뿜으며 비틀거렸다. 마치 독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신체가 썩어들어갔다. 세포 하나하나가 부스러지더니 생체 갑옷이 각질처럼 흐드러졌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찬영의 슈트에는 상대가 가한 데미지를 축적한 뒤,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상대의 신체와 공명함으로써 데미지를 몇 배로 되돌려주는 기능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한 능력 같았지만, 찬영의 신체에 담긴 에너지 중화 기능을 응용해야만 작동이 가능한 특수 기능이었다. 더욱이 발동 조건도 워낙 까다롭기에 웬만한 깡과 맷집, 그리고 강한 정신력이 아니면 효용성이 없었다.
아도니세덱이 쓰러지자 동료 신수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신수 호람, 비람, 야비아, 드빌 넷은 아도니세덱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했으며 뒤따라오는 수십의 권속들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신수들은 찬영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2차 선발대를 구하기 위해 증원군이 도착했다. 아도니람, 허드슨, 더프, 크로포드로 구성된 크로스솔져 팀이 순식간에 진격하여 네 신수와 그 부하들을 협공으로 제압했다. 크로스솔져들은 신수들을 봉인한 뒤, 뇌에서 증거물을 추출했다.
“저들의 처분은 당신들에게 맡기죠.”
크로스솔져들은 살아남은 2차 선발대에게 포로를 넘겼다.
“감사드립니다.”
찬영은 존경하는 선배들에게 겸손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신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아도니람은 도리어 찬영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정직히 고백하자면 이전까지는 힘의 격차 때문인지 당신들을 얕잡아보았던 마음이 은연 중 있었습니다. 최소한 지켜줘야 할 약자로 여긴 건 사실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당신 앞에서 겸허해지는 기분입니다. 우린 이전 삶에서 그렇게 순수한 희생적 용기를 내어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상대로 맞서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허드슨과 크로포드도 경탄하였다.
네 영웅은 차례로 찬영과 악수하였다. 사실 찬영은 아무래도 출신 차이 때문인지 여타 크로스솔져들과 생사고락을 공유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들과 같은 카테고리 안에 넣어야 할지를 약간 망설여왔다. 내가 괜히 함께했다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런 생각도 자주 들었고 아무래도 힘의 한계란 것 자체가 쉬이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라면 달라질 수 있으리라.
“성한 아저씨께 김찬영 씨 이야기는 자주 들었어요.”
“아, 그렇습니까?”
크로포드가 친근하게 다가오자 찬영은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같이 잘 부탁드립니다, 동역자로서.”
“부족한 저를 인정해주셔서 부끄럽네요.”
“저희야 말로요.”
이날 이후로 찬영은 힘의 격차를 개의치 않고 크로스솔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다가갔다. 그의 선하고 정의로운 인품, 그리고 신실한 신앙심을 본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대등한 동료로 인정하고 받아주었다. 찬영은 크로스솔져들에게 기술과 요령을 배워 나날이 성장했으며, 크로스솔져들도 그에게서 긍정적인 도전을 받아 전보다 더 겸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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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저는 불리하게 흘러가는 전황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유치한 아이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그의 진짜 관심사가 아니었다. 애초에 성운에게도 그다지 악감정이 없었고 짓누르고 싶은 경쟁심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이번 냉전을 통해서 최대한 많은 경제적, 기술적 이익을 쟁취하고 카이젤의 신임을 얻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그건 성운도 마찬가지였지만.
“제1 철인왕, 아니 칼리드 씨. 곧 시작이군요”
“그래, 프로젝트의 완성이 무르익었다, 신수왕.”
칼리드와 일라이저, 둘은 오래전부터 함께 준비한 모종의 공동 계획으로부터 좋은 추수를 거둬내기 위해 우주 요새에서 회담을 가졌다. 전에 칼리드가 광역 최면 기술의 일부분을 건네고 그 대가로 일라이저가 레전드급 신수들을 제공한 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둘은 각자의 사업이 지닌 잠재력, 그리고 그것들이 만났을 때 발생할 상승효과의 잠재력에 관해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후로도 둘은 지속적으로 산업과 학문을 거듭 교류하였다. 이 둘의 위험한 관계는 발전을 거듭하여 끝내 다소 위험한 영역에 도전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지적설계종(種)이라…….”
칼리드가 감탄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마침내 완성되었군요.”
일라이저도 자신들이 해낸 과업이 믿기지 않는지 거듭 탄복했다.
‘그래, 보스의 ‘투명한 마음’, 그 엄청난 게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칼리드와 일라이저는 신수를 베이스로 수없이 다양한 개조실험을 거친 끝에 마침내 완전히 새로운 특수종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이곳 적색거성 규모의 초거대 실험실 내부에는 종류만 수십만 종, 개체 수로는 수천억이 넘는 거대 생명체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산보다 거대했으며 기존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형태, 재질, 물리적 특성을 보였다. 잠든 그들의 뇌수에서 강력한 정신파와 권능이 뻗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적설계종.
통칭 ‘블라인드 워치메이커(Blind watchmaker)’.
이종족이면서도 독자적인 고도 문명, 기계 공학, 하위 개체, 인공 인격, 나아가 또 다른 이종족을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는 종족.
이곳에 진열된 블라인드 워치메이커 144,000종은 하나하나의 개체가 작은 세계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재편해나갈 만큼 강력하고 지능적이었다. 이들은 다른 이종족과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괴물로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 이상을 제외하면 가히 우주 최고의 인공 종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수의 제공이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 비결이었다. 감사를 표하지.”
만일 거짓 영성이라는 기묘한 특징을 지닌 신수에 대한 해부 연구가 기반이 되지 않았더라면 지적설계종이라는 반칙급 발명품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별말씀을요.”
일라이저는 태연히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나야 내 사병인 신수가 이종족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다 보니 부대표나 주군으로부터 독립성을 획득하고자 신수 종족을 꾸준히 진화시킨 것이지만……, 당신은 주군의 맏아들이잖습니까?”
이에 칼리드의 이글거리는 붉은 눈이 잠시 일라이저의 핏빛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칼리드는 오른손을 올려 자신의 턱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 이종족이 다른 이종족을 창조하고 설계하고 진화시킨다? 그것도 모자라 별도의 문명을 구축할 잠재력까지 허용한다? 나아가 지적설계종이 만들어낸 종족들도 스스로 재생산을 꾀해 자체적인 문명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한다? 인류로서는 겁먹을만 한 일이지.”
“놀랍군요. 칼리드 당신 같은 충신이 이런 일을 지원할 줄이야.”
“하지만 바로 그래서 나만이 이 일을 맡아야 해. 의심스러운 갈트론이나 진, 유리스, 킴벨리아에게 맡기면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버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차라리 이 계획을 처음부터 철저히 내가 주도해서 장차 발생할 불상사를 원천 봉쇄하도록 미리 예방 주사를 놔두면 위험도가 낮아지지.”
칼리드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기로 했다. 그가 지적설계종을 제작한 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 번째, 장차 이종족이 끝없이 자가 개조해서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불상사를 미리 방지하는, 소위 예방의 목적. 두 번째, 에녹의 이종족 제어 시스템에서 벗어날 존재들을 일부러 만들어냄으로써 카이젤이 직접 움직여 손수 이종족의 제어권을 회수하도록 유도하는 것.
“호오! 하긴 그렇게 하면 주군께서도 안일한 태도를 버리시고 완벽한 제어책을 마련하시겠군요. 지적설계종이 아무리 몇 세대씩 창조의 연쇄를 거듭하건 그들의 발버둥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도록, 영원한 속박을 작정하고 시행하실테죠.”
“아버지의 적극적 행동을 촉구하는 것도 내 계획 중 하나이지.”
칼리드는 지적설계종 중 현재 곧바로 투입 가능한 개체들을 점검했다.
“내 역할은 그분을 철저히 보좌하고 보완해주는 것이니까.”
곧 적합한 후보를 찾아낸 그는 제 48,723번째 종인 아간렉스(Aganlex)들을 백 마리 정도 깨워냈다. 고작 100기라지만 분신, 아바타 기술, 그리고 진의 호문쿨루스인 ‘보리붓다’를 해부해 얻어낸 ‘무아지경(無我之境)’ 기술을 접목했기에 수백만 마리나 다름없이 활동할 능력이 있었다.
“준동해라, 백신들이여. 인류의 영원한 미래 자산이 될 피조물들을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확장시켜내라. 우리는 너희들의 신이나 마찬가지니, 너희와 너희 생산물들은 우리에게 복종하고 충성하여라.”
칼리드는 자신의 강력한 초능력을 빌려 세뇌의 힘을 증폭시켰다.
“너희가 낳을 자손, 그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드넓은 우주 곳곳에 건설할 문명은 물론 그들이 확보할 자원까지 모조리 주인인 우리에게 바쳐라. 진정한 인간의 시대를 알리는 개막의 종을 울려라.”
칼리드는 아간렉스들을 비롯한 모든 지적설계종들의 정신 속에 매우 강력하고 원천적인 명령어를 또렷하게 새겼다. 설령 이들이 그 명령어를 자체적으로 개조할 위험을 내포했다고 할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모든 변수는 인류연합의 영광으로 귀결될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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