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44회 하늘위의 도시들 Ch 53. 하이퍼스페이스의 기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6.17 | 회차평점 0 |
Chapter 53. 하이퍼스페이스의 기원
잠시 시간을 돌려 윤혁이 제로원을 두 번째로 방문했던 때.
진실게임이라는 섬뜩한 이벤트를 마치고 찝찝한 뒷맛이 가시지 않았던 윤혁은 며칠 뒤 식사 자리에서 과감히 형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저기요, 형.”
“무슨 일이지?”
카이젤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여섯 살 아래의 동생을 가만히 응시했다. 일부러 부드러운 눈매를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맹수같은 눈빛은 감춰지지 않았다. 윤혁은 그 위축시키는 기세에 질문을 계속해도 좋을지 망설여졌다.
“그……, 진실게임 때 말씀하셨잖아요. 생명의 자연발생 말이에요.”
“아, 그거 말인가?”
그 게임 당시, 윤혁은 형이 왜 절대적인 창조주의 실존을 알면서도 그분께 순복하지 않는 이유만 집중했을뿐(아직은 위버멘쉬라는 존재가 곧 적그리스도의 씨앗임은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떤 원리로 그가 무신론을 반증했는지는 주의깊게 고민해보지 않았었다.
‘원래 과학자로서 극의에 도달하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성경은 분명 신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한다.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라도 학문의 극의에 달해 자연계에 대한 지식이 정점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조물주의 존재를 더듬어 알게 되는 걸까?
“그때 네가 나를 염려해준대로…, 인간은 창조자를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은 나를 포함해 모든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이지. 그 두려움을 피해보겠다고 정신승리를 일삼는 자가 숱하게 등장했었지. 19세기에만 해도 셋이나.”
“정신승리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 안달난 패배자 말이지. 생물학자 하나, 정신과 의사 하나, 그리고 철학자 하나……. 그들은 어떻게든 창조주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 희망사항을 믿고 싶었던 나머지, 뇌내 망상을 지어내어 이론화하였지. 우스꽝스럽게도 그 망상들은 전염병처럼 몇 세기에 걸쳐 인류를 전염시켰다.”
“아.”
대강 어느 작자들을 지칭하는지 윤혁도 감을 잡았다.
“뭐, 초자연이 몹시 두려워 고의적으로 잊기를 택했을지도 모르지. 심정이야 이해해. 그러나 나태하고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적진 병력에 관한 보고서를 고의로 날조해 아군을 속이면 잠시잠깐은 기분이 편안할지언정 최후에는 패배를 향해 돌격하는 꼴이 되지.”
“저 같으면 도무지 가망성이 없을 땐 차라리 항복하겠어요.”
윤혁은 망대의 비유(눅 14:28-32)를 떠올렸다. 공사를 시행하기 전에 미리 비용을 계산하지 않다가 나중에 중도에 하차하면 모두가 비웃게 된다는 비유. 본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버릴 각오를 해야 하며,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를 미리 확인해보라는 비유이지만, 거꾸로 신을 적대하려는 자들에게도 이 교훈은 적용가능하다.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눅 14:31-32)]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에도 대가가 따른다면, 그리스도를 고의로 적대하는데는 무한히 더 큰 대가가 따르는 법. 그것도 알지 못한 채 스스로를 속여 무신론에 귀의한다면 후일 따를 곤혹을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적진, 곧 신의 존재에 대해 허술한 보고를 했다. 카이젤은 최대한 정확하게 상대측의 정보를 파악하려 노력하였으나 항복이 아닌 결사 항전을 작정하였다. 윤혁은 일찌감찌 상대가 불가항력임을 깨닫고 항복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으로 현명한 것인가.
“비방하지는 말아다오.”
카이젤은 씁쓸한 표정으로 동생에게 호소하듯 내뱉었다. 윤혁은 형의 얼굴에 침울함과 무거움이 내려앉은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초자연적 존재란 크고 무거운 짐인 듯했다.
“저기, 그러면 오늘날의 과학계는 무신론적 진화론을 부인하나요?”
“나와 초인들은 현 인류 과학의 최정상이자 최첨단……, 우리의 입장이 그러하니, 그래, 인류의 견해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초인들은 대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아냈나요? 과거의 역사를 직접 들여다볼 수도 없잖아요. 창조와 진화 사이의 논쟁이 지지부진했던 것도 그런 이유인데 말이죠?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도저히 반증이나 증명이 안 되니까요.”
형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호기심을 잔뜩 머금은 동생을 바라보며 귀엽고 순수하다는 생각을 잠깐 하였다. 장난으로 머리를 한껏 헝크러뜨려주고픈 욕구가 들었으나 애 취급한다고 기분 나빠할까봐 잠시 억눌렀다.
‘과거를 보지 못한다라.’
그건 과거의 이야기. 사실 간접적으로는 얼마든지 볼 방법이 있다. 관측 기술은 이미 극 고도로 발달했다. 나아가 현 인류에겐 원거리 타임머신도 있다. 아니 어른들의 세대 때부터 이미 과거 검증은 불가능한 과업이 아니었다. 이미 인류는 우주의 역사에 관해 제법 풍부한 간접 자료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데이터를 얻으면 얻을수록 자연발생적 우주론과는 모순되는 결론만 도출되었다. 현 시점에서는 이미 진화론을 완전히 폐기하고도 남을 정도로 풍부한 근거가 확립된 상태였다.
“이런 말을 하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괜찮아요.”
“그래, 고맙다. 나와 인류연합은 여러 분야에 걸쳐 야망을 갖고 있어. 그 중 하나는 창조에 대한 갈망이지. 특별히 나는 생명체, 천체, 자연환경, 상위계, 그리고 우주를 인공적으로 제작하거나 설계하고 싶어했지. 물론 지금도 변함없고.”
형의 충격적인 발언에 동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물론 날고 뛰어도 진정한 창조는 될 수 없어. 어디까지나 모방이나 조작에 지나지 않았지. 현재까지는 말이야. 그래도 마냥 성과가 없지는 않았어.”
이종족, 테라포밍, 아공간 기술, 시공간 조작, 이매진 기술, 시뮬레이션 우주 등의 고차원적 기술도 따지고보면 카이젤의 이런 큰 포부와 야망으로부터 나온 산물이었다.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려면 엄청난 양의 시뮬레이션과 시행 착오가 소요되지. 예를 들어 생명권(Biosphere)이나 인공 우주를 제작하려 할 때는 현존하는 피조물을 참고해야만 했지.”
“그게 우주와 생물계의 역사를 샅샅히 파헤치게 된 계기였군요.”
“그렇지. 또한 나는 만물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도 숱한 시뮬레이션을 시행했었다. 그렇게해서 지식과 데이터가 쌓이다보니 차츰 우주의 본질이나 우주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게 되었어.”
“그 지식들이 무엇을 말해주던가요?”
윤혁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간접적인 증거이긴 해도 초자연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해주었지.”
카이젤은 다소 씁쓸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주는 물론이고 지구나 생명권 또한 무작위적인 프로세스로는 결코 만들어지지 못해. 다중우주 이론을 이용해 그 결론을 피해보려고 해도 무의미해. 다중우주 그 자체도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설계되고 기획된 완성작들이기 때문이야.”
인공생명체를 만들어내려면 필연적으로 수학적으로 조합 가능한 모든 DNA 조합을 시도해보아야 한다. 나아가 DNA 체계와는 별도로 모든 분자 패턴에서 나올 수 있는 독창적인 유전 패턴 기전까지, 가상의 이론까지 동원해 모조리 점검해야 한다. 이 거대한 계산 과정을 거쳐 초인들은 20세기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진화론적 생물 중간 단계’가 허구임을 증명해내었다.
우주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인들은 모의 빅뱅 유도 실험을 통해 수없이 다양한 버전으로 조율된 물리법칙 세팅을 각 인공 우주에 적용해보았다. 그러나 완벽하게 안정화된 우주를 만들어낼 ‘최적 방정식의 해(解)’를 형성하기란 지적 존재의 인위적 간섭 없이 우연적 프로세스로는 불가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중우주 가설도 고려해보았다. 무작위적으로 여러 세팅의 우주들이 다양하게 생성되도록 실험해보았지만, 이렇게 생성된 결과물 역시 최근 관측된 진정한 상위 차원의 구조와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위 차원들의 발견으로 인해 전체 우주의 미시 조정에 담긴 정교함은 이전보다 더욱 부각되었고 다중우주 가설은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기는커녕 더더욱 긍정해주는 근거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나와 초인들은 초자연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지. 지금껏 관측해낸 ‘자연계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한, 진정한 미지의 영역 말이다. 이제 우리 중 누구도 우주의 형성 과정에서 초자연의 개입이 존재했음을 부인하지 않아.”
“저는 그렇게까지 철저히 검증했었다는 점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윤혁에게 하나님의 천지창조란 어릴적부터 들어온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진리였다. 그러한 당연한 결론을 증명하겠다고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벌이다니, 어디선가 1+1이 2임을 증명하는 논술이 보통의 수학 문제보다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떠올랐다. 어쨌건 윤혁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창조의 비밀에까지 다가갈만큼 지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크게 성장했음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알기만 알았지, 달라진 건 없나?’
불행히도 그 지적 성장은 인류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깨닫게 해주었을 뿐, 겸손한 마음으로 순복하도록 이끌어주지는 못했다. 도리어 큰 성과는 스스로의 우수함을 돌아보고 자만심을 부추기는 결과만 낳았다.
*
“이번이 드디어 스물두 번째로구나.”
어느덧 여정은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계약 기간인 3년이 만료되기까지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한 동안 거듭 마주했던 만연한 초능력 문화는 열여덟 번째 텀부터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추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을 맞이하는 세계마다 초자연적인 힘보다는 이성주의와 과학주의에 의존하는 문명을 보였다. 마법적인 요소를 동원하지 못하니 관측에만 기반하여 사물을 이해하는 이성만능주의의 팽배는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열여덟 번째 텀부터 스물한 번째 텀까지 본 세상들은 초능력적인 세계와 과학주의적인 세계의 과도기에 놓인 곳들이었다. 하지만 스물두 번째부터는 마침내 초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순수 과학 문명이 나타났다. 오로지 과학에만 몰두해서 그런지 그 수준은 무려 22세기 초반의 지구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물론 초인들이 없으니 지구처럼 무한한 문명 성장은 불가능하겠지만.
문득 윤혁은 모든 하늘도시들이 개방될 시기가 어느덧 성큼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꼈다. 슬슬 인류연합도 식민지를 각종 미혹으로 속이기보다는 현대 문물에 익숙해지도록 적응시키는 방향으로 전략 노선을 정한 모양이다.
“저건…, 오로라?”
여행 중 리온이 상공을 올려다보며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과연 수많은 색의 오로라가 하늘 위에 펼쳐져있었다. 흡사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짜인 자수와도 같았다.
“저것들은 오로라가 아니오.”
이제 어느덧 스테판은 불특정 하늘도시의 세계관 본질을 감지하는 감각을 원래의 수준만큼 회복한 참이었다. 덕분에 불완전하게나마 선교지가 된 하늘도시 내부의 각종 기초 정보를 자율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라기보다는 느낌과 직감에 가까운 형태로 얻긴 하지만.
“스테판 씨의 말이 맞는 듯해. 저건 오로라가 아니야.”
여러 번의 패턴을 겪으며 눈치가 빨라진 윤혁도 금세 알아차렸다.
“포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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