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21회 아벨의 후예 Ch 2. 재회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1.29 | 회차평점 ![]() |
Chapter 2. 재회
선교 여행을 마치고 지구에 돌아온 지도 일 년가량 지났다. 그새 윤혁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우랴, 친구이자 신임 목회자인 리온의 사역을 도우랴, 다방면의 학문을 터득하랴 몹시 분주한 시간을 보내었다. 게다가 매달 일주일씩 형을 찾아가 여러 첨단과학 관련 지식을 교육받는 일정이 추가된 바람에 한층 더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다행스럽게도 재혁은 부족한 제자의 눈높이에 맞춰줄 줄 아는 탁월한 교육자였다. 그는 동생을 당장 천재 공학자로 만들기보다는 변화하는 세태를 빠르게 인지하도록 안목을 키워주는 데만 초점을 두었다.
“다녀왔습니다.”
제로원에서 수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윤혁은 문을 활짝 열고 씩씩한 목소리로 부모님께 인사하였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들이 그를 대신 맞아주었다. 듬직한 근육질의 시커먼 사내들이었다.
“윤혁아!”
“우리 윤혁이 왔네.”
“이야! 녀석은 어째 가면 갈수록 훤칠해지냐.”
“아버지가 성한 아저씨니까 그렇겠지. 유전 법칙은 정직해.”
“하여간 귀염둥이라니까.”
형님들? 선배님들? 아니면 삼촌들?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윤혁은 아직 이 수다스러운 단골손님들을 어떻게 칭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전의 그들은 크로스솔져라고 불렸다던데 그 호칭은 어색해서인지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오셨으니 간식이라도 대접할게요.”
윤혁은 머쓱하게 웃으며 예의 바르게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에이, 그러지 말고 편하게 대하렴.”
“그래, 우리한테도 성한 아저씨는 아빠나 마찬가지거든.”
“윤혁이 같은 막냇동생은 얼마든지 귀여워해 줄 수 있는데.”
케리, 아도니람, 브레이너드, 리빙스턴, 크로스비, 웨슬리까지 여섯 명이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였다. 근육 덩어리 여섯이 뭉쳐 앉으니 자리가 비좁았다. 그들은 윤혁과 친해지자마자 허물없이 다가왔고 어느덧 가벼운 스킨십도 서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윤혁으로서도 그게 썩 싫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근육에 짓눌려 질식하는 곤란한 사태는 사양하고 싶었다.
“하하, 마음만 받을게요.”
“에이, 언제쯤 우리를 형, 누나라고 불러주려나 모르겠네.”
케리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투정을 부렸다. 그때 신해가 웨이터 로봇들과 함께 다가와 장난치는 동료들에게 꿀밤을 먹였다. 그는 최근 성한 부부네 식당에서 수석 주방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저 자신이 원해서 내린 결정이라고는 말했지만 내심 이 집의 식구들을 보호하고 싶다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잘 다녀왔어, 윤혁아?”
“네.”
신해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동료들 앞에서 자신과 윤혁의 친분을 과시했다. 애초에 함께 나눈 시간의 양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격차였다. 용사들 몇이 불공평하니 자신들과도 친하게 지내달라며 항변 아닌 항변을 토로했다. 윤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형들 누나들 덕분에 심심하지 않을 테니 다행이에요. 예전에는 저 혼자만 키우셔서 심심하셨을 텐데.”
“내가 부모였으면 윤혁이 한 명만으로도 열 자식 안 부러웠을 텐데?”
크로스비가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
“아니에요. 저번만 해도 제가 얼마나 부모님께 큰 걱정을 끼쳐드렸는걸요. 심지어 제가 죽을 뻔했던 몇몇 사건들은 아예 말씀도 못 드렸어요. 전부 다 들었으면 큰 충격을 받으셨겠죠.”
지난번 선교 여행 때 겪은 사건들은 하나같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평생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은 아마 소설 속의 장면 같은 그 사건들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도 비밀은 지켜줄게.”
아도니람이 대표로 다짐했다. 다행히도 크로스솔져들은 워낙 세상 경험이 많았기에 부모님과 달리 윤혁의 경험담을 전부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몇몇 이야기를 듣고는 충격을 받긴 했지만. 크로스솔져들은 윤혁과 동료들이 당했던 험난한 고난들이 성한의 귀에 안 들어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고마워요.”
“그래, 그나저나 윤혁아.”
신해가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꾸어보았다.
“지난주에 그 사람……, 아니 그분을 만나고 온 거, 맞지?”
별안간 테이블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신해는 괜히 자신이 폭탄을 투척했나 싶어 좌불안석이 되었다. 케리와 리빙스턴은 헛기침하며 눈길을 돌렸다. 불편감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윤혁에게도 확연히 느껴졌다.
‘하기야 지금의 저들에게는 재혁이 형이 위협적인 존재일 테지.’
아예 몰랐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크로스솔져들은 표식의 존재를 깨닫고 그 영향력에서 막 벗어난 처지이다. 속박자를 좋게 봐줄 리가 없었다. 더욱이 그들은 과거 식민지 주민으로서 인류연합에 휘둘리던 삶을 살아왔다. 휴먼 솔져가 되어서도 시민권을 얻기 위해 동료들을 경쟁에서 짓누르면서 발버둥을 쳐왔다. 그렇게 고생해서 자유인이 되었거늘 우주 인류의 행정 영역을 재편성하겠다는 선포가 지금 와서 내려졌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사실상 크로스솔져들은 은연중에 인류연합 대표를 성경에 예언된 최후의 적으로 의심하는 중이었다.
‘반쯤 맞는 예측이긴 하지.’
문제는 그 용의자가 하필 윤혁과 성한과 피를 나눈 친족이라는 점.
“……맞아요. 그와 만난 거.”
“괜찮아?”
신해가 한층 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윤혁에게 물었다. 괜찮냐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윤혁은 매번 형을 만날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재혁은 늘 자신에게는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강재혁이라는 좋은 형, 그 부드러운 가면 뒤에는 카이젤 라흐블뤼크라는 초인적 실체가 있었다. 어쩌면 윤혁은 멋모르고 불구덩이 속에 제 발로 뛰어든 격일지도 모른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거짓말로 안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은 제가 알아서 책임질게요.”
윤혁의 표정이 심란한 내면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드러내자 크로스솔져들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오늘 모인 여섯은 인류연합 대표와 연루되는 것을 피하겠다고 이 집으로의 발걸음을 자제하는 동료들과는 달리, 대표를 가까이서 감시하려는 쪽이었다. 그가 얼마나 엇나가는지를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 적절한 조처를 하려는 의도였다. 그들은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설령 강윤혁이라는 착한 아이를 이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감수하리라고 각오를 다졌었다.
‘우리가 정말 미안하다, 윤혁아.’
‘네게만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는데.’
물론 내심 이런 기대도 해보았다. 카이젤이라는 인간 곁에는 착하고 경건한 가족들이 있으니 그들이 그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마냥 그런 동화 같은 일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크로스솔져들은 너무도 현실적인 성격이었기에 희박한 가능성에 의지하진 않았다.
모두가 고민에 잠긴 그때.
“왜 다들 심각한 분위기이시죠?”
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식당에 들어오더니 푹 가라앉은 일행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인기척에 놀란 윤혁은 손님을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선량한 인상이 돋보이는 잘생긴 얼굴, 솔져들만큼은 아니어도 탄탄한 체격이 꽤 매력적이었다. 외모는 성한처럼 대략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재현 씨, 반가워. 어서 와.”
때마침 성한이 부엌에서 나와 갈색 머리 사내 천재현을 맞아주었다. 재현은 예의 바르게 동료들에게 인사하였고 그들도 반갑게 받아주었다.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도 예의가 바르고 겸손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
‘인품이 괜찮은 사람 같아. 성격은 좀 수줍음 많고 여려 보이지만.’
윤혁이 느낀 재현의 첫인상은 이러하였다. 저런 사람들에게는 먼저 다가가서 친근감을 표해주는 편이 낫겠지. 윤혁은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강윤혁입니다.”
“아, 아저씨네 아드님이군요. 꼭 뵙고 싶었어요.”
고운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깃들자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 이름은 천재현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정말로 반가워요.”
“어어! 죄송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네요.”
윤혁은 왠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애매한 감을 느꼈다. 아주 어렸을 때 한 번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출처가 어디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옛 뉴스를 조사할 때도 언뜻 스쳐 가듯 본 것 같다.
“아마도 그러실 거예요.”
재현은 어색해하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아마도라뇨?”
“천수현 회장, 사실 그 사람이 제 친동생이거든요.”
이에 윤혁은 입을 떡 벌리며 놀랐다. 그러고 보니 언뜻 그런 내용의 뉴스를 읽었던 것 같은 기억이 든다. 한 걸출한 천재 청년이 형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여 경영 전선에 나선 후 비약적인 대약진을 끌어냈었다고 했었던가?
“14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친형이 바로 접니다.”
“아니, 잠시만요. 어떻게 회복하셨죠?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유성운 회장님이 저를 살려냈죠. 부작용으로 이능력을 얻었지만요.”
재현은 지난 12년간의 공백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말해주었다. 성운으로부터 명목상의 자유를 얻은 후로도 대중에게 실험 내용을 설토하지 못하도록 제약은 걸려있었지만, 윤혁처럼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아는 경우는 예외였다.
“우와! 그런 실험을 겪고도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니…….”
“충격적이죠?”
“조금요.”
약간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일도 수없이 보았던 윤혁에게는 이 정도는 약과였다. 정작 그보다 궁금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러면 재현 씨는 다시 가족들과 재회하셨나요?”
재현은 수줍은 웃음으로 답했다. 옆에서 잠자코 대화를 듣던 크로스솔져들도 은근 놀랐다. 늘 위축되어 있고 슬퍼하던 재현이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기는 그들로서도 처음이었다.
“네, 얼마 전에 부모님과 동생을 다시 만났죠.”
재현은 몇 달 전의 일들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풀었다.
*
마지막 사냥 이후 다른 크로스솔져들은 무장을 정부(인류연합)에 반납하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돌아갔으나 재현의 경우는 문제가 복잡했다. 먼저 그는 애초에 표식을 지니지 않은 지구 태생이었고 신체의 물리적 속성 자체가 특수했으며 성운과의 계약도 몸에 심겨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부여받은 ‘유사 제복’은 소유권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마음대로 버릴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다른 동료와는 달리 재현은 이능력과 강력한 무력을 제거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자연히 인류연합과 초인들의 감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과연 크로스솔져와 히어로즈의 해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슈나가 직접 재현을 찾아왔다. 히어로즈가 휴먼 솔져 시스템 휘하의 정식 특수부대로 개편된 덕인지 그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줄어들어 여유시간이 많아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남는 시간에까지 인류연합을 위해 봉사하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재현을 찾아와서 이런저런 제안 아닌 제안을 늘려놓는 것을 보면 말이다.
“네 힘, 아직 불안정하군.”
귀신같이 정확한 크리슈나의 분석에 재현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재현의 이능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하게 증폭되는 중이었다. 본인 몸에는 별 손상이 없었으나 문제는 타인과의 접촉이었다. 힘을 충분히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물체 일부분까지 재현의 텔레포트 이능력에 휘말려버렸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성운에게 받은 유사 제복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타인과 일상생활을 하기도 어려울 수준이 될 것이 뻔했다. 크나큰 염려거리였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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