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83회 아벨의 후예 Ch 14. 각자의 출발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6.19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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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조적으로 탄식하며 지난 일들의 성과를 평가하였다.
“티아라의 ‘융화 정책’의 입김도 닿았고, 우주 인류 스스로도 내가 만든 ‘마의 경계’ 안쪽에 설치된 인공 다중우주 속에서 마음 놓고 기괴한 짓을 벌였지.”
온갖 이능, 갖가지 시대를 앞질러간 과학 기술들, 그리고 변이된 사상들이 합쳐진 결과물. 이것이 오늘날의 인류의 현 주소였다.
“덕분에 인간과 비인간이 죄다 섞여 혼종들이 넘쳐나게 되었지. 유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는 어찌 보면 피코머신 기술이 크게 한몫했어.”
“하지만 그것을 기술을 창조한 대표님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올바른 룰로부터 어긋난 방향으로 활용한 자들의 책임이 전적이라고 봅니다만.”
“어쨌건 뒷수습은 능력과 역량이 되는 자가 해야겠지.”
“고통스러운 직책이로군요.”
“사실 나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마냥 책망만 하지는 않아. 인간들의 우주 적응력과 신체 능력을 높여준 점은 있으니까. 하지만 순수성이 선을 넘어 망가지면 곤란하지. 최소한 생물학적 존엄성은 지켜줘야 하니까.”
윤혁을 우주로 내보내는 데는 이 문제를 교정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바로잡아야 할 대상은 인간과 비인간이 섞여 만들어진 갖가지 혼종들과 변종들이었다. 비단 우주 인류의 환경 부적응만이 윤혁이 짊어지게 될 짐의 전부가 아니었다. 어쩌면 혼종을 인간화하는 과정, 곧 유전적 질서 재정립이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고통과 데미지가 환원되어 전달될지도 모르겠다.
“그 애에게는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지경이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왜 그리 그를 신경 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하긴 너는 고향과 가족을 모두 저버리고 초인으로 각성한 녀석이니 무관심하겠군. 분명 거기에는 내 탓도 있었지.”
“딱히 과거의 일들에는 미련이 없습니다.”
“그렇게 평가하니 더 미안해지는군.”
데미안 같은 우주 인류 출신 초인들에겐 혈육이라는 개념은 낯설었다. 아니 왜 굳이 혈육에 집착하는가. 그들은 정에 휘둘리는 일반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얕잡아보았다. 그랬던 그들에 속한 데미안이었으니 정작 존경하던 지도자가 저런 면모를 보이는 게 몹시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충성 대상에게 반문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윤혁이 그 아이는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특별한 면이 있지.”
“지구에 통용되는 사회 관습을 정리한 데이터에 따르면 그 관용어구는 보통 팔불출들이 즐겨 쓰는 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카이젤은 부하의 우매함을 비웃으며 작년에 벌어졌던 충격의 역사를 상기시켜 주었다. 하늘도시에서 벌어졌던 표식의 변혁, 강윤혁이 지나갈 때마다 벌어졌던 예측불허의 사태, 무시무시한 핍박과 위기를 헤쳐나가는 위용, 티아라 로페즈라는 거물을 상대로 흔들리지 않았던 굳건한 신념까지.
“그것들 모두를 우연이나 요행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확실히 이런 활약들은 카이젤의 이복동생으로서의 면모와는 무관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강윤혁이라는 한 개인이 지닌 어엿한 믿음의 역량이었다. 그 정도까지 온전히 영적 순종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그를 한 번 주시해보겠습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잘 감시해라.”
데미안도 미지의 힘인 초자연의 힘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었다.
과연 몇 년 전 하늘도시에 벌어졌던 ‘부흥’은 영적인 현상으로 간주해야 할까? 그것은 어떤 숭고한 도덕적 충격에 의해 발생한 일시적인 감흥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실체에 의해 벌어진 필연적이고 실제적인 흐름이었을까?
만일 후자가 맞다면 이것이 인류연합의 미래에 시사하는 바는 희망일까 위협일까? 지혜로운 초인에게도 풀리지 않는 여러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질문이었다.
‘만약 강윤혁의 영향력이 대표님에게마저 닿는다면?’
어느 덧 데미안은 이 가능성을 기우가 아닌, 위중한 시나리오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과연 변화는 긍정적인 방향일까, 부정적인 방향일까.’
차라리 필요에 따라서는 방해물을 눈에서 치워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데미안은 그 순간 더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카이젤은 태연히 마인드리딩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데미안은 공포감에 얼어붙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지만.”
긴장감에 데미안의 몸이 흠칫거렸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 넌 내 미래를 판단할 자격이 없어. 시키는 일만 성실히 하면 돼.”
회상을 마친 데미안은 청년을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왜 하필 거물과 얽히는 바람에 저런 생고생을 다하게 되었을까?’
차라리 평생 모르고 지냈으면 편안하기라도 했을 터인데. 하지만 태어나기를 형제로 태어난 것을 어찌해볼 도리는 없었겠지. 카이젤의 동생인 것이 억울하다면 다시 태어나는 것말고는 방도가 있겠는가.
저 청년이 선교 여행이니 뭐니 하며 무려 우주를 활보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평범한 삶에서 어긋나버린 덕이겠지. 형의 애정을 받고는 있다만 그런 부적절한 수준의 과도한 정서 교류는 도리어 연약한 인간을 부러뜨릴 것이다. 호랑이와 강아지는 애초에 상종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참 딱하게 됐군.’
데미안은 끌끌 혀를 찼다.
*
윤혁은 떠나는 12월이 이르기 전에 최대한 몸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전에는 마음으로 고난을 짊어져야 했다면 이번에는 온간 고생을 몸으로 짊어져야 할 테니까. 그걸 미리 감안한 그는 단단히 각오한 뒤 매일매일 혹독한 운동 일정을 소화하였다. 찬영이나 다른 크로스솔져 형님들이 옆에서 친절하게 코치해주었다.
다만 그들에게 앞으로의 여정의 진상에 대해서는 털어놓지 않았다.
“이번엔 왜 또 그렇게 열심히 한대?”
한 번은 찬영도 궁금했는지 이렇게 물었다.
“하하, 그럴 일이 있어요.”
“너무하네, 윤혁이. 형들한테도 비밀로 하고…….”
“섭섭해하지 말아요. 저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으니까요.”
“그래, 우리 윤혁이는 비밀도 많지.”
눈치 빠른 크로스솔져 몇 명은 그 사정이란 게 ‘그 사람’과 모종의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다. 윤혁이 입을 열지 않아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꽤 그럴 듯하고 타당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그러건 말건 윤혁은 말없이 몸 단련에 전념했다.
‘그나저나 피코머신이 저절로 생성된다고는 해도 딱히 몸매가 확 좋아지지는 않네.’
윤혁은 아직 희미한 복근의 윤곽을 더듬어보았다. 여전히 적당히 옅은 피하지방과 적당한 두께의 근육이 섞인 몸이었다. 전보다는 발전했다만 근육 붙는 속도 자체는 변화되기 이전과 비슷한 것 같았다.
‘재혁이 형 복근은 무슨 골짜기처럼 쫙쫙 갈라지던데. 어깨랑 팔도 흉기 같고.’
이런 면에서는 은근 부러움도 들었다. 영이 아닌 육체를 신뢰하는 건 사실 좋은 태도가 아니지만 본능적인 동경이 드는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알트루즘 덕에 회복 속도가 빨라져서 자주 운동할 수 있는 점은 좋았다. 다만 대신에 압도적인 회복력 덕에 운동 시 근섬유가 파열되는 현상도 현저히 적어져서 근육 부피를 키우기는 좀 더 어려웠다. 또 세포의 에너지 생성 효율이 높아져서인지 되려 군살도 전보다 몇 배 이상을 운동해야 겨우 빠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형은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는 별개로 몸 관리에도 철저한 모양이네.’
그 정도로 고도화된 육체면 아무리 수련해도 근 자극을 일으키기가 어려울 텐데. 그렇다면 평소에 운동할 때 얼마나 무거운 역기를 든단 말인가? 설마 상위 차원의 물체나 은하계 같은 걸 사용할까? 재혁이라면 가능하겠다는 엉뚱한 상상도 들었다. 여하튼 그 사람의 독한 근면 성실성에 윤혁은 자극을 받았다.
한편 부모님께는 조만간 있을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물론 프로젝트의 세부적인 목적과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감춘 채로. 과연 예상했던 대로 걱정어린 표정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또다시?”
“윤혁아, 당분간 몇 년은 쉬면 안 될까?”
아들을 생각해주는 부모님 마음은 이해했지만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이번에는 선교 여행이 아니에요. 그보다는……, 출장에 가까워요.”
“출장?”
성한은 의외라는 눈초리를 지었다.
“네, 사람들을 돕는 데 꼭 필요한 일이 생겨서요.”
“……그렇구나.”
사실 데미안에게서 임무 브리핑을 받을 때, 윤혁은 재혁으로부터 정식으로 채용됨을 알리는 공식 증표도 함께 받았다. 그러므로 이번 임무는 인류연합 입장에서도 철저한 공적 업무인 셈이다. 윤혁이 사사로이 선택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알트루즘이라는 보배를 이식받은 이상, 윤혁도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값을 수행해야만 했다.
값이 언급된 마당에 말하자면 이번 채용 때 윤혁은 봉급도 같이 받았다. 기겁할 정도로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입금 확인 당시 윤혁은 이렇게 반응했었다.
“자, 잘못 들어온 것 같은데요, 비서관님?”
“오류는 없습니다만.”
“천문학적인 양이잖아요.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
“생명 값이니 그리 불로소득은 아닙니다. 앞으로 강윤혁씨 덕에 살아날 인간들의 숫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요. 피코머신 시스템 강화를 통해 얻어질 장래의 수익까지 고려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죠.”
“그냥 기부하면 안 될까요?”
“상관은 없지만 아마 무익할 겁니다. 어차피 그 돈을 풀건 안 풀건 인류의 경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테니까요.”
실감나는 설명을 위해 데미안은 ‘무한의 플랜트’라는 것의 존재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미 그 생산기가 발명된 이상, 우주의 자원 희소성이라는 개념은 영영 소멸되었다나. 윤혁이 돈을 남에게 기부하건 말건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가난한 자가 없는 데 무슨 기부를 할 의미가 있겠는가.
“혹시 언제 쓰일지는 모르니 갖고는 계시죠.”
“……네.”
용돈을 한사코 거절했건만 이런 식으로 보응해주다니. 머리가 아파졌다.
여하튼 한참의 설득 이후에야 부모님은 마지못해 아들의 길을 축복해주었다. 자식으로써 최악의 불효란 부모님께 아픈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했던가. 몹시 죄송스러운 마음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의 표정에서 전쟁터에 당당히 나서는 용사의 결의를 엿본 성한과 유진은 애틋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윤혁이 떠나기 전까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아들을 보살펴주었다.
그리고 성한은 큰아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재혁아, 윤혁이가 뭔가 숨기는 일이 있는 듯한데…….”
“아, 제가 윤혁이를 정식으로 고용하여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 이런! 무탈해야 할 텐데.”
“최선을 다해서 지켜줄 테니 염려하지 마시죠.”
큰아들은 반복하여 다짐했다. 동생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보증하겠노라고. 성한은 반신반의하며 그 다짐을 믿어주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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