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85회 아벨의 후예 Ch 14. 각자의 출발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6.19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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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원정에 참여하기 전, 리온은 여러 Upol의 교회들과의 온라인 교류로 바빴다. 그 말고도 그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전략 구상을 하랴 설교할 말씀을 탐구하랴 각 지역의 정보를 모으랴, 그야말로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곁에서 지구 교회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거들었지만 역시나 부족한 여건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지현 씨와 재현 씨가 실무 처리에 능숙해서 큰 도움이 되었네.’
영리한 둘 덕에 리온은 날개라도 붙인 듯 든든했다. 처음에 일부러 엄격하게 시험했던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특히 지현은 과연 수재 중의 수재라는 소문이 틀린 말이 아닌지 대단히 일 처리에 능숙했다.
“이렇게 해드리면 되는지요?”
‘이건 내가 생각도 못한 발상인걸.’
그는 리온에게 몇 가지를 인계받더니 이내 순식간에 업무에 익숙해졌다. 더불어 자신만의 독창성과 응용력을 십분발휘하여 열 사람 이상 몫을 해냈다.
‘주님께서 딱 적합한 인재를 보내주셨군’
우주 너머 2등 시민이 모여 사는 저 무수한 하늘도시들은 좁디좁은 지구와 달리 규모도 개수도 상식 밖이다. 한 마디로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곳들을 탐험하려면 방대한 정보를 간파해 함축적으로 요약하는 능력이 필수였다.
지현은 이 방면에 특출했다. 고만고만한 동급의 인재들이 아닌, 일반인이나 보통 초인은 절대 넘을 수 없는 제 큰형 같은 괴물을 바라보면서 공부해온 지현이었기에 이 정도의 성장은 거뜬히 이룩할 수 있었다.
한편 재현은 리온에게 성경을 열심히 배웠다. 또 그는 제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수련에도 정진했다. 당분간은 몸에 깃든 초능력을 제거할 방도는 없었다. 따라서 일단 차선책으로 최대한 힘을 안정화시켜야 했다. 또 이왕이면 유용하게 활용할 방법을 찾아서 나쁠 건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선용하는 게 낫다.’
그래서 재현은 거북함과 불편감을 무릅쓰고 크리슈나와 몇 차례 더 만나 대련을 나누었다. 폭주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힘을 제어하는 법을 연습하기 위해. 다행히 천부적인 재능 덕인지 특수한 체질 때문인지 숙련도는 금세 높아졌다.
그리고 때마침 새로운 동료도 하나 합류했다. 재현의 크로스솔져 시절 동료이자 친구인 찬영이었다.
“요새 몸은 좀 괜찮아요, 재현이형?”
“응, 덕분에.”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가볍게 해후의 인사를 나눈 재현은 찬영을 리온 앞으로 데려다준 뒤 소개를 해주었다. 리온은 찬영에 대한 소문을 윤혁에게 들었기에 별다른 테스트도 없이 곧장 환영해주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김찬영씨.”
“저야 말로요, 목사님.”
“앞으로 천재현씨를 잘 부탁드릴게요. 저도 신세 많이 지겠습니다.”
재현을 안정화시키려면 보조계 이능력자인 찬영이 꼭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비단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찬영을 신뢰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회심하기 이전부터 타인을 향한 희생정신과 용기가 몸에 박힌 천성은 둘째치고, 겸손하고 심지가 굳건했으며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솔직히 그가 살아온 행적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의 품성이 얼마나 깨끗한지를 알 수 있었다.
“저, 천재현씨, 유지현씨, 김찬영씨 이렇게 넷은 내년이 시작되기 직전에 지구를 떠나서 하늘도시 전역을 순회할 예정입니다. 주로 교회가 밀집된 지역을 타겟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더의 최종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이니 네트워크의 힘도 적극적으로 빌릴 것입니다. 인류연합은 물론 1조 개의 Upol의 시민 사회가 한꺼번에 우리의 행적을 훤히 볼 수 있도록 말이죠. 우리는 숨지 않고 최전선에서 앞장 설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소유한 네임밸류를 동원해서라도 일을 키울 겁니다. 그것이 보잘 것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신념에 동조하는 우주 교회들을 양지로 끌어내도록 유도할 생각입니다.”
“마치 종교개혁 때처럼 말이군요.”
“정확합니다. 건전한 정신은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다행히 이미 역사 속에서 훌륭한 16세기의 선배들이 다져놓은 기반이 갖춰져 있었다. 그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된다. 그리고 각종 이단과 교황권, 기복주의와 자유주의 등 이미 지구의 방대한 교회사를 반면교사 삼아 여러 유형도 거짓이 발생할 가능성도 학습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 우주 인류의 거짓 기독교들도 그리 독창적인 패턴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진리의 적들은 창조성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이미 존재하던 선례들을 다양한 변주곡으로 바꾸어 발현하는 것이 전부겠죠.”
‘굳이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압도적인 과학 기술력의 힘을 덧입느냐 정도인가?’
리온은 지난 선교 여행의 체험을 떠올렸다.
‘그래봤자 하나님의 손바닥 안이지.’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 인류의 오만한 기술이 역으로 신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되는 장면은 수없이 봐왔다. 그때보다 몇천 배는 발전된 문명이 나타난다해도 마찬가지이다.
“잘 해봅시다.”
“네!”
네 팀원은 기쁜 마음으로 결의를 다졌다. 썩어지는 밀알로 희생하여 우주 전역에 진리의 불길을 되살리기 위해. 그리함으로써 부패한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다시금 거룩한 파도가 사회 전체에 쇄도하도록 하기 위해. 그 일에 작게든 크게든 쓰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크나큰 기쁨이었다.
“제가 곁에서 항상 지켜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재현이 자신의 코트를 벗어 리온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단순한 옷이 아닌, 그의 소유인 준 제복급 슈트에서 생성된 부속품이었다. 거기에는 모든 종류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효과도 깃들어있었다. 재현의 이 행동은 새 리더를 향한 순수한 존경과 충성심의 표시였다.
“고맙습니다, 재현씨. 하지만 명심해주세요. 폭력이란 불가피한 정당방위의 목적이 아닌 한 되도록 피해야 해요. 하긴 저보다 그 힘의 무게를 절실히 아실 테니 잘해내시리라 믿어요.”
“명심할게요.”
리온은 착실히 대답하며 싱글벙글 웃는 사내를 보면서 잠깐 엉뚱한 감상에 잠겼다. 첫 인상 때부터 느껴왔지만 저 형님, 천재현이라는 사내를 볼 때면 충성스러운 대형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반기는 듯한 심상이 스쳐갔다. 리온은 저런 순수하고 선량한 자에게 힘이 주어진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레리엔의 잔잔한 일상에도 변화의 잔물결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 무렵부터 세계를 논하였고 진리를 추구해왔던 그녀. 구도자였던 그녀는 늘 목말라 했었다. 더 완벽한 진리, 더 완전한 지식, 더 온전한 윤리, 이것이 그녀에겐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왔지만 무엇하나 시원스러운 해답을 주지 않았다.
카이젤과 결별하고서 섬에 칩거한 이후로도 그녀는 더더욱 탐구에 열중했다. 세상에 인간이 실존하는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그녀는 선행과 구제를 아끼지 않았고 어려움과 마주친 이웃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잠깐은 만족감을 주었지만, 본질적인 채워짐은 없었다.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을 되뇌이며 그녀는 수년간 연구와 사색을 거듭하며 올곧은 진리를 발견하고자 발버둥 쳤다. 그녀 곁에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삶에 녹아든 슬기는 그저 흔하디흔한 지식의 원천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절대적인 무언가를 발견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후임 초인들을 가르치며 첨단화된 지식을 축적했지만 갈급함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배울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음만 직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지식의 추구만으로는 해갈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신음하던 무렵, 최근 몇 년 사이에 우주 식민지에서 놀라운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영 지구를 무덤 삼아 사장될 줄 알았던 기독교적인 가르침이 우주로 건너가더니 불씨를 되살아났다.
그 흐름은 단순한 교리적, 윤리적 변혁을 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역사를 일궈냈다. 무려 인류연합이 창조해낸 종속력을 일부분이나마 깨트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힘과 권력을 믿고 폭주하던 옛 친구, 카이젤이 드디어 제지를 받았다는 생각에 고소함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는 성경이라는 고서가 가르치는 바를 개인적 차원에서 깊게 음미하는 체험을 누리진 못했다. 그녀는 그 말씀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나름 부분적으로는 인정했다. 보통의 종교보다 더 고차원적인 도덕성, 인간 본질에 근접한 정미함이 있음은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가 되지 못했고 일부러 그렇게 되도록 진지하게 도전해 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탓은 아니었다. 레리엔은 세상 모든 서적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당연히 성경 원본 텍스트도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또한 그녀는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직접 친분을 쌓고 그들과 교류를 나누며 그들의 인품을 배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여러 제자의 입을 통해 하늘도시에서 강윤혁 일행이 벌여놓은 일들의 실상을 전해 듣고는 면밀한 조사를 해왔다. 이레귤러에 대해, 하데스 챔버와 시뮬레이션 우주에서 벌어졌던 일들, 칼리드의 음모, 표식과 영적 현상의 상호작용 등. 지혜로운 그녀는 인류연합의 속내를 많이 파헤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윤혁 일행의 사명이 가진 힘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이렇듯 퍼즐 조각이 많았음에도 안타깝지만, 그것들은 그녀 머릿속에서 하나로 엮이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등잔 밑이 어두운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녀에게 방아쇠가 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장 가까운 가족인 양아버지의 회심 사건이었다. 이제껏 먼 발치에서 관찰만 했었건만, 이제는 자신의 코앞에서 지인의 회심이 벌어졌다. 비로소 실감 나게 와닿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레리엔은 우주 만물이 성경 속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당장 그것이 전적인 회심을 향한 적극적인 의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직 그녀 마음속에는 초인 특유의 오만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굴복하는 대신 오히려 그녀는 잠시 거리를 두고 물러나 이 문제를 인지적인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어쨌건 그녀의 무관심은 진지한 탐구 의지로 바뀌었으니, 발전은 발전이었다.
‘신기하리만큼 모든 퍼즐이 딱딱 맞아.’
이제껏 고려하지 않았던 에드레이 어르신의 가르침들과 조언이 생생히 무게감을 더하며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아울러 이렇게 깨달음을 얻다 보니 모종의 눈이 열렸는데, 그 영향인지 카이젤이 벌이는 여러 프로젝트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전투와 긴밀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토론할 상대가 필요해.’
레리엔은 근래 몇 년 전부터 메시아닉 유대인들 사이에서 책사 노릇을 하는 중이라던, 베일에 싸인 여인을 자신의 정원으로 불러들였다. 소환을 받은 아나스타샤는 여주인 앞에 나아가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인사를 하였다.
“지혜로우신 레이디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찬입니다. 오늘 부른 것은 그대와 상의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아나스타샤도 성령께서 지시하신 당부 사항이 이런 식의 파격적인 결과로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기에 내심 탄복했다. 하지만 영리한 그녀는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성급한 감정을 억누르며 신중히 표현을 갈무리했다.
“어찌 감히 저 같은 어리석은 이가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토론에는 본래 높낮이나 자격이라는 개념이 없는 법이에요.”
과연 레리엔이라는 인간이 풍기는 인상은 예사 위인의 것이 아니었다.
“자, 받으세요.”
별안 간 레리엔은 아나스타샤에게 일련의 자료집을 넘겨주었다. 그곳에는 111명의 인물, 곧 이레귤러라 불리는 인류연합의 요주 인물들, 그리고 전직 히어로였던 멤버들의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인적 사항뿐 아니라 해독하기 어려운 인격 데이터 일부까지 섞여 있었다.
‘이레귤러? 어떻게 얻었지?’
혹시 제자라던 진에게서 몰래 받은 건가?
‘그럼 히어로즈 데이터는? 유성운 쪽이려나?’
정황상 브로커는 그들 정도였다. 이것도 참 재주는 재주였다. 섬에 사실상 갇혀 살고 있으면서도 최상위 초인들과의 거래를 이토록 능숙하게 수행해 내고 이를 통해서 정보통도 챙기고 앞가림도 다 하는 것을 보면 과연 초인 위의 초인은 맞구나 싶었다.
“이걸 왜 저에게 주신 건가요?”
아나스타샤는 직설적으로 되물었다.
“돌려 말할 테니까 이해해 주세요. 저로서는 ‘통일시스템’에 잡힐 꼬리를 남기고 싶지는 않아서요.”
“알겠습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조만간 인류연합 대표는 여기 나온 이 사람들을 이용해 뭔가를 벌일 겁니다. 모르긴 해도 기독교계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겠죠. 그 구체적인 방안은 보안 탓인지 아직 발설되지 않은 듯하군요.”
이미 레리엔은 오롯이 간접적 정보와 추리력만으로 이 정도의 과감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녀는 ‘서바이벌 경합’의 존재는 물론이고 보조 인원 배치 방식에 대한 사항까지, 놀라우리만큼 분명하게 추론해 냈다.
그렇게 할 수 있던 이유는 뛰어남의 문제 이전에 레리엔이 카이젤이라는 인간의 심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굳이 일 인당 보조 인원을 스물넷으로 추정하신 이유가 뭔가요, 레이디.”
뜬금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예측에 아나스타샤는 어안이 벙벙했다.
“추리라기보다는 일종의 감이죠. 서로의 민낯을 그래도 꽤 아는 입장이라서요. 그 남자, 생각보다 꽤 유치하거든요. 그는 경합에 투입된 후보자들을 냉혹한 평가의 심판대에 올릴 생각입니다. 그런 그가 평가자로서 심리적 만족을 가장 직관적으로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자기 자신과 그 후보자들을 동일시하면 됩니다.”
“동일시라면?”
“비슷한 처지, 즉 통치하고 책임지는 처지에 두는 것입니다. 왕을 향해서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 이들의 실체를 벌거벗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에게 비슷한 왕좌를 만들어 주어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나스타샤는 곧장 이해하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일종의 역할극을 만들어 대표 자신의 역을 맡아보라고 명령할 셈이군요.”
그런 이유라면 왜 하필 숫자가 스물넷인지도 쉬이 설명된다.
“카이젤 대표님의 최측근에 들어가는 최상위 초인들은 정확히…….”
“스물넷. 우리는 그자들을 TFE라 부릅니다.”
과연 이레귤러들은 그 무겁디 무거운 짐에 눌려 질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쩐지 이 경합이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가혹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 불안감이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러면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요?”
“가르쳐 드리죠.”
레리엔은 상세한 설명과 함께 아나스타샤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하였다.
“크로스솔져라고 불리는 이 예순여섯 명의 인물,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배치 방법이 관건입니다.”
이어서 그녀는 세부적인 힌트를 주었다.
“지금부터 제가 정보통을 통해 조사한 111명 이레귤러들에 대한 데이터를 들려줄 겁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기록하지 말고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주의 사항과 팁도 알려줄 테니 그것들도 참고해 보세요.”
“네.”
정보 전달의 시간이 몇 시간 동안 쭉 이어졌다.
“여기서 구성된 전략집과 당신의 구상을 크로스솔져들에게 전하세요. 지구에 거주하는 다른 히어로들도 이번 일에 참여할 텐데 그들과의 접촉은 제가 맡을게요. 크리슈나는 카이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그를 경유해서 접선을 마련하면 일이 쉽게 풀릴 겁니다.”
이렇게 레리엔은 아나스타샤에게 서바이벌 경합의 인원 배치를 맡겨둠과 동시에 그 작업에 필요한 모든 지적 자원을 공급했다. 아무래도 레리엔보다는 아나스타샤 쪽이 인류연합의 주목을 덜 받으니 추후 추궁을 피하기에는 적합했다.
‘카이가 뭔가 계획을 꾸미기 전에 미리 나도 준비해 둬야 해.’
이렇게 대응할 한 수를 위한 포석은 깔아졌다.
“선뜻 혜안을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감사하긴요. 이건 카이의 계획을 파헤치려는 의도이니 고마워할 것 없어요.”
“설마 레이디께서는 그의 계획을 파훼하실 생각인가요?”
“글쎄요.”
레리엔은 속내를 알기 힘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한번 평가해 보고 싶어요.”
마냥 어느 한쪽만을 편들어 주겠다는 기색은 아니었다.
“당신들이 따르는 가치, 과연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은 절대성을 함유하고 있는지, 만약에 그렇다면 인류연합과 인류의 미래는 그 진리와 어떻게 하나로 엮여있는지……, 냉혹한 심판대 위에 올려볼 생각이에요. 그 과정에서 카이의 유희를 훼방할 의도도 있지만 그저 부수적인 목적이죠.”
아나스타샤는 레리엔의 심경 변화와 사태 개입이 과연 어떤 예측치 못한 흐름을 만들어 낼지 기대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긴장되고 두려웠다. 과연 키루스 대왕을 감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이 섬의 여주인인 고귀한 레이디에게도 비슷한 감동을 부어주실 것인가.
“그러면 저도 한 가지만 당신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이디.”
“말씀하시죠.”
“메시아닉 유대인들……, 당신의 은총과 선대를 통해 살아가는 그분들이 이 기회에 저를 도와 같이 사역할 수 있도록 출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당신의 관찰 목표를 성취하는 데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음에도 레리엔은 아나스타샤의 진의를 쉽게 간파했다. 레리엔은 잠시 고민하였다. 섬 주민들의 자유의지를 지배하는 것은 그녀의 권한도 아닐뿐더러 관심사도 아니었다. 어떻게 대답할까? 저 영리한 소녀가 어떤 맹랑한 계획을 꾸미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우려가 동시에 들었다.
“알았어요. 허락하죠.”
한참 후에야 레리엔은 대답했다.
“부디 신중하게 처신하셔서 인류연합의 노기를 피하시길.”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마무리된 줄로 알았던 마당에 첨언이 들어오자 아나스타샤는 멈칫했다.
“스테판이라는 이름의 111번 이레귤러, 되도록 그하고는 직접 접촉해서 일을 논하세요. 강윤혁 군에게서 면회권을 넘겨받으시면 됩니다. 내가 추론하건대 그는 매우 특수합니다. 다른 이레귤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질이 있어요. 변화를 위한 히든카드죠.”
대충 빠져나가는 법이 없구나. 감도 좋다.
“잘 알겠습니다.”
“하나 더. 만약에 이 경합에 로스트엠페러들이나 다른 최상위 초인이 개입한다면 절대로 경솔하게 맞서지 마세요.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나스타샤에 대한 염려와 배려의 표시가 아니었다.
“그 녀석들은 내가 직접 상대할 테니까요.”
아나스타샤는 저 여인만큼은 적으로 두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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