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93회 아벨의 후예 Ch 17. 기억상실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14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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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와 윤혁이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마음을 나누며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드는 동안, 인터갤럭틱 호 내부에서는 대규모 연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행성에서는 사흘이 흐르는 동안, 타임필드로 인해 우주선 안에서는 40일이 흐르는 중이었다. 윤혁의 첫 외계행성 방문인 이번 첫 번째 시즌은 학술적으로도 상당히 가치를 함유한 이벤트였다. 행성혼과 알트루즘의 직접적인 접촉이 발생하는 순간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구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데미안은 윤혁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피코머신 시스템이 변혁을 일으키며 자가 진화하는 패턴을 상세히 기록하여 주인에게 전송하였다. 물론 카이젤 본인도 따로 이터널바이탈 에고이즘 파트를 통해 동생의 심장에 있는 알트루즘 파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효능이 높습니다. 처음부터 가능성을 예측하셨습니까?”
“완벽히 알았다기보다는 믿었던 거지.”
아마 다른 최상위 초인이 알트루즘을 이식 받았더라면 연산 효율 자체는 높았을지언정 지금 윤혁이 이끌어낸 것과 같은 종류의 효과를 낳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인이었다면 필시 공리주의의 원리건 무지의 베일이건 인간계의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상황 판단을 했을 테니까. 그런 틀에 갇히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려야 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피해가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 증명된 바와 같이 윤혁의 경우에는 색다른 흐름을 도출해냈다. 이유를 추정컨대 아마 그의 이타심이 인간의 이타심이 아닌, 보다 더 초월적인 마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특성이 알트루즘의 진화 과정에까지 필히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낌새만 보이는군. 좀 더 지켜봐야겠어.”
“추후 보고드리겠습니다.”
“고맙다. 그리고 ‘그녀들’을 조심하는 것도 잊지 말고.”
“물론입니다.”
말하기 무섭게 데미안의 아바타는 낯설고 위협적인 힘을 감지하고는 전율하였다. 행성 궤도를 순회하던 그의 아바타는 재빨리 달의 뒷면으로 이동했다. 녹색 위성의 뒷면에 봉인된 거대한 생명체의 몸체가 생체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놈은 세포 단위로 재생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가 그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설마 강윤혁님의 알트루즘이 놈에게도 영향을 미친 건가?”
데미안은 당장 어떤 조처를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찬찬히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위성 위에 쓰러진 저 존재, 저것의 등장이 앞으로 나타날 대립 구도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고 어떤 변수를 낳을지 궁금했다. 목줄 당기기는 조금 늦게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지금 재생 중인 개체는 거대 이종족에 속한 유닛이었다.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 아틀라스(ATLAS).
아틀라스 종은 행성 테라포밍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된 특수 군체다. 이들은 작년 무렵 ‘빅뱅 제너레이터’를 통해 창조되었고 그 이후로 인류연합령의 은하들 곳곳에 파견되어 외계행성의 환경을 교정하는 역할을 맡던 중이었다.
녹색 위성에 박힌 저 개체 또한 아틀라스의 여러 종(種) 중 하나에 속하는 개체였다. 최근 저 개체는 제어 효율이 떨어진 바람에 도리어 행성 환경 조정 작업에 불리하다고 판단되었고 이에 강제로 봉인되었던 차였다.
“그나저나 굉장한 괴물 유닛이로군. 작년에 벌어진 셀레스티언 사건의 악명은 익히 들었지만, 이제는 도리어 셀레스티언들도 귀여워 보일 수준이야.”
저런 종족을 만드는 데 쓰였던 빅뱅 제너레이터는 10만 개의 2차 복제형 퀘이사 엔진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괴물이다. 즉 그것들은 별도로 우주 자원을 채취하지 않아도 셀레스티언과 같은 급의 종족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 덕분에 현 우주에는 거듭 숫자가 불어나는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가 숱하게 범람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잉 생산은 반갑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인류는 셀레스티언 한 종족만으로도 제어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실제로 지난 번 셀레스티언 폭주 때는 에녹과 칼리드, 유리스, 진, 에르샤까지 투입되고서야 겨우 제어되었었다.
물론 어렵다는 건 어디까지나 카이젤을 제외한 전력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만약 인비저블 마인드가 없이 저런 것들이 증식했다면 큰일이었겠지.’
인류가 정복한 은하의 개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인공은하급 종족’ 종류 수. 확실히 제어의 역량을 벗어난 건 맞으나 그것들을 한꺼번에 지배할 비장의 한 수가 있었으니, 비결은 ‘인비저블 마인드’였다.
인비저블 마인드는 본질 상 기계가 아닌, ‘혼 조율자(Soul refiner)’다. 고로 그것은 아무리 지배 대상의 숫자와 힘과 규모가 늘어도 절대적인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 더욱이 카이젤의 여섯 메이저급 초지능체가 온전히 화합을 이룬 덕에 그 중에 속하는 인비저블 마인드도 강화되었다. 그 지배 영역은 인류연합의 영토를 아득히 넘어선 곳까지 뻗어나갔다.
덕분에 고삐가 확실하게 조여진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들은 통제권 바깥으로 벗어날 염려 없이 온갖 임무들에 투입되었고 우주구급 초고도 문명을 건설하는 핵심 동력원이 되었다.
‘아틀라스 족은 행성 테라포밍에 특화된 종족, 특별히 저 아종의 경우에는 자기의 생체 에너지를 행성의 생태계 에너지로 전환하는 타입이군.’
굳이 표현하자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할까. 실제로 녹색 달에 박혀있는 저 개체는 수개월 동안 Planet-151,030의 녹색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혹사당했다. 그러던 중 제어 효율이 떨어진다는 명목으로 잠시 작동을 중지당했다. 물론 아마 새로운 방식의 환경 개조 실험이 도입되었기에 더는 필요가 없어진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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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이아 프로젝트가 반드시 행성 환경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방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행성의 국소 지역에 부분적으로 다양한 버전의 부적절 환경을 생성해내기도 한다. 여기에는 훈련적 목적이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의 신체를 모든 스펙트럼의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함이다.
그 증거를 근래 루디아와 윤혁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착륙 이틀째와 사흘째에 두 사람은 각종 험악한 풍파를 마주했다. 특히 윤혁의 신체 주변으로는 급격한 기온 및 습도 변화, 뜨거운 태양풍, 유독한 매연, 자외선과 감마선, 모래바람, 드라이아이스, 기압 변화와 진공상태 등 온갖 불안정한 환경이 조성되거나 밀려들었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그의 몸을 집중 공격하는 듯했다.
곁에서 그의 시련을 지켜보는 루디아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윤혁은 우주복의 도움을 받거나 루디아의 치료를 받기를 거절했다. 그는 재생능력에 의지하여 꿋꿋이 버텼다. 차차 그는 환경의 한계를 초월한 생존 능력을 획득하여 신체에 정착시켜갔다.
광야의 시련을 모두 감내해내자 이번에는 하늘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달이 뒤흔들리며 조석력의 변화가 발생했다. 달이 빙그르르 자전하더니 뒷면이 드러났다. 무시무시한 형체가 보였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그 존재는 위성을 박차고 일어섰다. 워낙 거대한 거체임에도 중력이나 질량, 관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스스로 원하는 경우에만 선택적으로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조절 작용이 가능한 모양새였다. 그 거인은 대기권에 서서히 진입하였다.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부 예민한 주민들은 거체의 강림을 발견하고는 공포감에 질렸다.
아틀라스 족에 속한 거인은 행성을 부여잡았다. 행성을 보호하는 ‘케루빔의 바퀴’ 때문인지 중력을 비롯한 물리적 영향력은 주지 못했다. 대신 흉흉한 모습은 공포감을 주었다. 하늘을 채우는 그 무시무시한 생김새는 섬뜩했다. 윤혁과 루디아도 고개 들고 그것을 응시하였다. 어딘가 모르게 그 존재는 자신들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그래, 태양도 우리만 바라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 예상에 어긋나게도 윤혁의 뇌리로 텔레파시 음성이 전달되었다.
-……이시여.
“응?”
처음에는 모든 주민에게 전하는 공지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응답해주소서.
“설마, 내게 말하는 건가?”
그것은 개인적인 전언이었다.
-‘신(god)’의 혈육이시여!
순간 윤혁은 거대한 전율에 휩싸이며 다리에서 힘을 잃었다. 행성에 버금가는 크기의 거인이 자신에게 외치고 있었다. 루디아는 넘어지려는 윤혁을 재빨리 붙들고 지탱해주었다. 둘은 하늘을 응시했다. 거인의 모양새는 흡사 투명한 유리 벽에 가로막힌 채 사람이 입만 뻐끔거리며 외치는 것 같았다.
“저에게 말한 건가요?”
-저를 살려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의 형제시여.
신이라 지칭한 대상이 누구일까? 카이젤 본인? 아니면 그의 속에 있는 메이저급 초지능체? 신의 형제라고 부른 이유는 실제로 윤혁이 카이젤의 동생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식받은 알트루즘을 두고 동생이라고 한 걸까?
“저, 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제 형도 신이 아니고요.”
-우리에게 그분은 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이종족입니까? 셀레스티언과 같은 부류?”
그러자 잠깐의 침묵 이후 대답이 돌아왔다.
-내 종족은 Atlas 제타 타입, 개체 넘버는 2,091,877,654. 우리 종족은 인간이 살아갈 터전을 일구는 가축입니다. 나는 내 생명을 소진하여 이 행성의 환경을 재구성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몇 번이고 죽고 재생하기를 반복하지요. 행성 테라포밍은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설마 이 행성도 당신이 일구었나요?”
-기본적인 조성 작용은 그분의 힘, 곧 ‘태양신과 대지 여신의 권능’을 기반으로 이뤄졌지요. 하지만 세부적인 조율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살과 피를 뜯어내어 이 땅에 녹지와 자생형 생태계를 심어 넣었습니다. 내 숨결로 대기를 재조정했고 내 피부로 오존층을 형성했죠. 그리고 내 뼈를 자원 삼아 행성 자기장을 조율했습니다.
예전에 셀레스티언을 보았을 때는 인류는 대체 왜 그런 괴물들을 만들어내었는가 회의감과 의문스러운 생각만 들었었다. 목적성이 분명해보이지 않는, 전쟁 병기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아틀라스라는 종족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목적성은 분명한데 대신 비참해보였다. 평생 노역에만 힘쓰는 소, 돼지 같은 가축들이 꼭 저들의 처지와 같지 않을까? 물론 말 못 하는 가축들과 달리 이지와 언어능력이 있다는 게 차이겠지만.
‘어찌 보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생명체겠군.’
가축에게는 부여되는 생의 의미란 인간에게의 유용성이다. 야생동물이 오로지 번식과 본능에 의해 살아간다면 가축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노동력이나 음식을 남기고 죽는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생명의 존재의의일까? 신께서 인간에게 자연계와 생명체를 다스릴 권한을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다스림의 영역을 넘어서 생명의 가치와 존재의의를 제멋대로 재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일까?
하물며 아틀라스나 셀레스티언 같은 생명체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만들어진 인공 종족이 아니던가. 순수하게 인간의 문명 성장만을 위해 지어진 종족. 생명을 마음대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성을 그 안에 심고 그들의 삶의 의미마저 멋대로 정의하는 행동. 어쩌다 이렇게 참담하게 되었단 말인가.
-신의 형제이시여, 어째서 우리의 존재가치를 빼앗으려 하시는 겁니까.
구슬픈 느낌의 텔레파시가 뇌 깊숙이 전송되었다.
“빼앗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의 생은 인간의 터전을 가꾸는 것입니다. 한데 그 가치의 시효는 한시적입니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가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할 날이 올 것입니다. 당신의 강림은 그 때를 더욱 앞당기고 있습니다.
서글프게 울부짖는 아틀라스의 외침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왜 윤혁의 심장, 아니 알트루즘이 아틀라스의 존재의의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일까? 인간의 환경 적응 능력을 진화시키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더는 지구와 같은 질 좋은 환경에만 제한받지 않고 우주 전역을 돌아다니게 된다면, 저 아틀라스 같은 존재는 필요가 없어지기에? 설마 그날이 오면 저들은 모두 폐기되는 걸까?
‘저들은 자신의 가치를 이용 당할 대상 밖에서는 전혀 찾지 못하는구나.’
그 참담한 모습을 보다 보니 안타까움과 슬픔이 솟구쳤다.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져서 평생을 착취당하다가 종국에는 비참하게 버려져 무가치한 양분으로 전락할 처지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임무의 실행을 주저할 생각은 없었다. 윤혁에게는 인간들의 생명과 인간들의 영혼의 보존이 더 소중했다.
‘피조물들도 인간의 그릇된 길 때문에 애통하고 있구나.’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어그러진 창조 질서를 지켜보아야 한단 말인가. 루디아와 윤혁은 가슴 속에 무언가가 꽉 막힌 듯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둘은 울부짖는 거인에게서 겨우 고개를 돌려 마지막 행로를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푸와아악.
바로 그때 하늘에서 굉음이 울려퍼졌다. 아틀라스의 목덜미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꺾여있었다. 놈은 그 즉시 기절했다. 아틀라스의 온몸에는 검은색 에너지들로 이뤄진 칼날의 형체가 수없이 박혀있었다. 누군가가 놈을 급습한 것 같았다.
이내 케루빔의 날개마저 찢어졌다. 무언가가 대기권을 가르면서 고속으로 접근해왔다. 물체의 크기는 작았지만 감지되는 에너지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윤혁과 루디아가 서 있는 사막 한복판으로 돌진해왔다. 그대로 돌진을 계속했다면 충격파만으로 둘의 몸은 갈기갈기 찢겼겠지만, 일부러 그 접근 물체는 자기 실드로 충격파를 상쇄시켜서 둘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주었다.
그 존재는 무기질의 기계, 유기질의 생체, 환상계의 물질, 이 세 가지가 절묘하게 섞인 재질의 이질적인 유닛이었다. 그것은 이내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마치 악마의 인형 처키가 현실에 강림한다면 저것과 유사할 듯했다. 윤혁은 루디아를 자기 등 뒤로 재빨리 옮겼다.
“이런, 이런. 아직 멀쩡해보이네? 만신창이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윤혁은 그 존재에게서 엄청난 초고밀도 초능력의 파동을 느꼈다. 이런 수준까지 짙고 강력한 초능력을 다룰 수 있는 지성적 존재는 윤혁이 알기로는 단 한 종류 밖에 없었다.
‘저 녀석……, 최상위 초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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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회 아벨의 후예 Ch 17. 기억상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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