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22회 아벨의 후예 Ch 26. 지구 해체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9.19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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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 층 더 무서운 채찍이었다. 이른바 ‘1등 시민세(稅)’라는 제도가 선포되었다. 사람들은 날벼락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인류연합은 이제껏 세금이라는 제도 자체를 전혀 실행하지 않아 왔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인류연합 소유의, 아니 그 지배자의 소유인 무인 시스템이 무한에 가까운 우주 자원을 통해 생산을 감당하는 마당에 사람의 노동력이나 세금을 취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1등 시민세는 뭔가를 받아낼 목적이 아닌, 징벌용이었다. 그것은 어떤 자본 포인트로도 지불이 불가능했다. 오로지 1등 시민세 전용 포인트를 통해서만 납세가 가능했다. 전용 포인트는 여타 포인트와의 환전이나 거래가 불가능했다. 노동으로 얻을 방법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우주 인류처럼 아래서부터 차례차례 징검다리를 밟아 올라오며 시민권과 적법한 자격을 쟁취해온 자들에게만 공급되는 것이었다. 혹은 초인처럼 전 인류를 통틀어 최상위권의 실력자로 인정받으면 특혜로 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지구 시민들은 이 둘 다에 해당사항이 없었다.
물론 당장 서둘러서 쫓아낼 생각은 없는 것인지 일단은 지구 시민에게도 조금씩, 마치 약올리는 듯이 소량으로 1등 시민세 전용 포인트가 공급되었다. 대신 그 누적 속도는 서서히 느려졌다. 1등 시민세 지불 요구량은 점점 증가했고.
이러한 변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앞에 닥친 급작스런 현실을 직시할 숙고의 시간을 벌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즉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았으며 어떻게 행동해야 현명할지 자발적으로 판단하도록 촉구해주었다
지구 시민권을 포기하는 자에게 막대한 사회경제적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권고도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고향 땅을 밟지는 못하겠지만 대신에 머나먼 우주의 식민지에서 부족하지 않게 부유하게 살도록 허락해주겠다는 선언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 당근에 혹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뒷면에 숨겨진 함정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평생 지구에서 살아왔으니 우주에서 귀소 본능이 얼마나 큰 욕구로 작동하는지 몰랐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무지요, Upol의 2등 시민들의 우수성을 간과한 것이 둘째 무지였다. 안일해진 지구 출신이 Upol의 현 시민과 경쟁해서 밀리지 않을 리가 없잖는가.
물론 그럼에도 미리미리 나가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지구 해체 3단계까지는 어디까지나 아직 자비로운 처사였으니까. 강제로 험한 꼴로 내쫓기 전에 최대한 시민들의 편의를 봐준 것이었다. 자율 선택의 기회를 준 셈이다.
며칠 후 닥쳐올 우주인들의 침투를 마주하면 그들은 절망감에 압도될 것이다.
한편 스테판은 점점 더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단순히 상황을 지켜봄으로 인한 좌불안석이 아니었다. 시민들의 감정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주입되는 듯했다. 이 또한 통일시스템의 정신 간섭일까?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지구 시민들, 아니 곧 쫓겨날 이들의 심정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우주에서 태어나 줄곧 우주에서 살아온 스테판으로서는 지구 시민권의 의의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민족주의라는 개념도 낯설었다. 민족끼리 뭉친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지도 실감할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지구 시민들의 마음을 이해할만한 한 조각 단서는 알았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행17:26-27).”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 하게 하자.(창11:6-7)]
지구 역사에 익숙지 않은 스테판도 왜 지구 인류는 ‘민족’이라는 단위로 쪼개어졌는지 정도는 성경을 배움으로써 알고 있었다.
니므롯이라는 독재자가 바벨탑을 건설해 온 인류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뭉치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라는 경계와 민족이라는 경계를 만들어 각 경계 안으로 거주의 한계를 정하셨다. 그분은 이러한 분절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 뜻대로 되지 않는 인류 역사’를 마주하고 이를 통해 주권자 하나님에 대해서 더듬어 알도록 기회를 주셨다지.
“하지만 인류연합의 수장이여, 지금 당신은 정확히 그 반대로 행하고 있소.”
실패한 고대의 니므롯이 아닌 성공한 현대의 니므롯. 그는 신이 규정해놓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그것도 지구촌 안에서 통합하는 방식이 아닌, 우주 인류라는 거대한 종족을 번식시켜 그 가운데 지구 원주민들을 흩어 보내는, 상식을 깨부순 방법으로. 인간의 왕은 주님께서 행하신 ‘제자들을 흩어 보냄’이라는 전략을 모방하되 자기 멋대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덧붙였다. 기가 막힐 정도로 영리하고 영악한 자라는 감상이 들었다.
‘윤혁, 설마 당신, 지금껏 이런 무시무시한 자를 상대로 맞서온 거요?’
이제 지구 시민의 쫓겨남은 기정사실로 확정되었다. 염려되는 점은 단 하나였다. 스테판과 이레귤러들은 이 축출 과정에서 어떤 용도로 이용당할 것인가. 보조인원들은 무슨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인가. 왜 하필 인류연합 수장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레귤러들을 이 자리에 세웠을까.
그날 저녁, 스테판은 레뮬로스 시(市)로 소환되었다. 그 자리에는 111명의 이레귤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보조인원들과는 격리되었다. 현재 보조인원들은 모종의 물품들을 배당받으며 수일 후부터 전개될 본격적인 게임에 대한 지시사항을 듣는 중이라고 공지되었다. 낌새를 보아 조만간 그들도 이번 일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후보자 111명은 서로 대화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받았다. 그날부터 그들은 밤낮 방대한 교육을 받았다. 지구 역사 전반에 관한 내용이었다. 상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배웠다. 시간은 제한적이었으나 자동 교육 시스템, 뇌파 공명, 시뮬레이션 우주, 가상 현실 등을 활용한 덕에 여유는 넘쳤다. 수십 년 공부해도 다 소화 못할 지식이 한순간에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되고 정리되었다.
하지만 구태여 왜 이런 공부를 시키는지, 그리고 이후의 일정과 지금의 교육 내용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후보자들은 불안해하였다.
*
지구 해체 프로세스가 시작된 지 열흘째.
그날 아침은 유독 잠잠했다. 마치 태풍의 눈 한가운데 고요가 일 듯. 열흘 동안 쉴 새 없이 통보되던 메시지들도 간데없이 조용했다.
지난 며칠간 얼마나 숨죽이며 긴장감 속에 떨어왔던가. 다들 불확실해진 미래로 인해 두려워했다. 당장에라도 머나먼 미지의 세계로 강제로 이주당할까 봐.
그래서인지 소식이 잠시나마 잠잠해지자 헛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어쩌면 누군가가 잠깐 짓궂은 장난을 쳤던 게 아닐까. 아니면 긴 악몽을 꾸었던 것인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애써 잊어보려는 이들도 생겨났다.
허나 오후가 되자마자 헛된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인류연합 측은 장난 삼아 게임에 임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수천 년 역사를 깡그리 밀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지구 시대를 열 작정이었다. 낡은 구세대는 이를 위한 희생양이자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심지어 바로 그 구세대로부터 태어난 지구 출신의 초인들조차 그렇게 판단했다.
“마스터,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명령만 내리면 강림하겠습니다.”
“좋다. 지금부터 천지합일(天地合一)을 개시한다.”
제로원의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야경이 선명한 금빛 눈동자 속에 비쳤다. 카이젤은 부하인 태양을 삼킨 늑대에게 미리 전에 예고했던 그 명령어를 제시했다. 천지합일. 이제 하늘도시와 지구의 경계가 허물어질 차례가 도래했다.
{지구 해체 4단계 발동}
통일시스템도 프로세스를 가동했다.
{천지합일(天地合一) 진행.}
{선택받은 자들의 영역 일부를 지구로 소환하겠습니다.}
{오비탈 링 재조립, 케루빔의 바퀴, 2단계 모드로 전환.}
대기권 너머를 감싸던 지구 보호용 축조물들이 구조 변형을 일으켰다.
{워프 및 게이트 채널 접속 허가.}
{공간 융합 필드 전개.}
{시뮬레이션 우주 실체화 발동.}
{대기권 전역 퍼머먼트(Firmament)화(化), 개시.}
통일시스템은 지구를 둘러싼 구조물을 차례대로 변형하였다.
먼저, 지금껏 접속이 금지되었던 게이트들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막혔던 워프도 하나둘 허가되었다. 이어서 외부 세계인 하늘도시나 징검다리 권역의 일부분을 지구로 소환해 융합시키는 프로세스가 발동되었다.
아울러 이제껏 지구와 겹친 상태로 존재하던 시뮬레이션 우주나 시빌링 홀로그래피 차원, 오버랩 월드와 어나더 멤브레인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 섞는 정교한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었다. 이에 지구 대기권도 변형을 일으켰다. 전보다 더 넓고 거대해져 마치 만물을 포용할 기세로 뻗어나갔다.
사람들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격변에 소금기둥처럼 딱딱히 얼어붙었다. 경외감이 그들 눈에 어렸다. 천지가 뒤엎어지고 있었다. 파괴자의 손이 아닌 그들이 믿고 따르던 인류연합의 손에 의해서.
정책 선포는 그저 프롤로그에 불과했다. 진정한 게임은 이제부터였다. 사람들은 수억 개의 은하를 지배하는 막강한 우주급 정부 앞에서 민간인들의 세계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비로소 뼈저리게 실감했다.
“잘 봐두시죠, 아버지. 이게 지구에 세들어 살던 민족들의 말로입니다.”
성한은 뇌리로 파고드는 아들의 목소리에 긴장했다. 그러나 대답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우주쇼가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모든 인간의 시선이 모조리 그 경악스러운 풍경에 집중되었다.
그 광경은 흔히 상상하는 세계 종말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화려하고 찬란한 문명 세계가 지상에 침투하였다. 지구 원주민들이 축출당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오히려 행성을 위대하게 개혁하는 대변혁이라 평할만했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외, 외계인?’
‘외계 종족 문명?’
‘초고도 문명?’
‘저건 대체 어디서 내려온 것이지?’
어리석고 나태한 지구의 인간들이여. 저 존재들은 외계 문명이 아니라 그대들을 다스려왔던 초인들의 왕이 직접 건설한 인공 세계들이거늘. 그러나 여태 나태하게 안주하며 문명의 편리한 은택을 받아먹기만 해왔으니 뒤쳐질 수밖에. 하늘에서 강림한 문명들이 그들 눈에는 외계인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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