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599회 아벨의 후예 Ch 45. 하르무트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4.17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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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루디아는 다급히 윤혁을 보호하려고 커버넌트의 힘을 본능적으로 사용했으나, 하르무트가 훨씬 더 빨랐다. 하르무트는 손가락을 탁 튕기더니 이상한 결계를 만들어내어 루디아가 있는 공간을 격리하여 반 봉인했다.
“소녀야, 안 통해. 우리도 파파의 계약자거든. 셋이 함께 한 세트이긴 하지만.”
“루디아를 당장 놔줘.”
분노한 윤혁이 으르렁거렸다.
“이런, 이런. 세미온이랑 합의했을 때 그녀도 내기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던 거 아니니? 그럼 관련이 없다곤 볼 수는 없지. 안 그래? 너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여기에 온 줄로 알았는데. 호호호.”
기분 나쁘게 웃던 하르무트는 별안간 기습적으로 윤혁을 초능력으로 포획하여 공중에 들어 올렸다.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윤혁은 발버둥을 쳐보았다. 그러나 근육섬유 하나하나까지 하르무트의 힘에 봉쇄당한 탓에 소용없었다.
그녀는 음산한 눈빛으로 윤혁의 온몸을 훑어내렸다. 핥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리라. 시선만으로도 무참히 희롱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저 눈은 투시력을 지니고 있을 테니 맨몸은 물론 내장과 세포 조직까지도 훤히 구경하고 있겠지. 하르무트는 초능력을 사용하여 윤혁의 감각 신경 속 전기 신호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희롱했다. 얼마나 절묘하고 부드러운 조작인지 마치 거문고를 타는 여인이 뉴런을 현으로 삼아서 연주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역겨운 쓰레기 같으니라고.”
극렬한 수치감에 격분한 윤혁은 화가 나서 평소에 안 쓰던 비속어를 쏟았다.
“난 쓰레기 맞아. 파파도 나를 질책하셨지. 너 내 별명이 뭔지 아니?”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야.”
“흥미로워할 텐데.”
윤혁은 하르무트의 기묘한 입놀림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패륜아. 아비의 하체를 조롱하는 자(창 9:21-22).”
의미심장한 그 말에 윤혁은 순간 흠칫하였다.
“뭐, 뭐라고?”
“기분 나쁜 별명이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야.”
순간 윤혁은 그녀가 자신을 더 수치스러운 나락으로 떨어트릴까 두려웠다.
“너무 겁먹지 마. 오늘은 음란한 짓은 안 할 거야. 오늘 목적은 다른 쪽이지.”
“당신 말을 어떻게 믿고?”
“뭐, 본 게임 들어가기 전에 조금 유희를 즐기는 편도 좋겠네.”
그의 표정이 썩어들어가자 하르무트가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농담이야, 농담. 겁먹었어? 귀엽기도 해라.”
하르무트는 순순히 초능력을 풀어 윤혁을 놓아주었다.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윤혁은 상대의 다음 태세를 잘 관찰하였다. 이번에는 하르무트가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마수의 체내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수백 개의 관처럼 생긴 물체들이 번개처럼 상승하여 윤혁과 루디아와 하르무트 주변에 배열되어 공중에 고정되었다. 관 뚜껑이 하나씩 열렸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
“대체 뭐 하시는 거죠?”
크게 놀란 윤혁이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로 되물었다.
“초인들이야. 정확히는 하늘도시 출신 중 우리와의 접촉으로 인해서 트리거가 발동되어 각성한 초인들이지. 말하자면 이들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이거든. 너도 세미온에게 대강 들었지?”
“그게 지금 내기랑 무슨 상관이……?”
“참, 네가 만난 녹색 머리 남자, 파파의 스승이었다던 자 말이야.”
“멜카드제윈 테일란드 씨?”
“그래, 그 사람도 파파와의 접촉으로 각성했었다지 않았니.”
듣다 보니 다시금 기억났다. 스쳐 가듯 말했지만, 세미온도 헬리웃을 비롯하여 몇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각성시켰다고 했었다. 지금 소환된 저들이 나머지인 모양이다. 멜카드제윈도 자신의 각성이 카이젤과 연관되었다고 했었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원리인지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었는데, 설마 어떤 연관성이라도?’
이윽고 하르무트로부터 난해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도 파파의 일을 비슷하게나마 흉내 낼 수는 있거든. 다만, 우린 그분보다 격이 떨어지기에 누군가를 초인으로 각성시키려면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해.”
“추가 비용?”
“세미온에게서 들어서 알 테지만, 우리에겐 우주 인류의 ‘자아’와 ‘초자아’와 ‘이드’를 추출해내어 유사 물질화한 뒤 흡수하는 능력이 있어. 그 ‘망할 인간’들을 뿌리로 둔 자손들 한정으로만 가능하지만 말이야.”
세미온에게서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김질 해보았다. 그녀는 흡수와 관련된 카리스마타와 변형과 관련된 카리스마타, 둘을 소유하고 있다. 또 초기 세대의 하늘도시 주민들로부터 ‘자아의 잔흔’ 비슷한 무언가를 흡수함으로써 하늘도시의 기원과 관련된 비밀을 깨달았다고 했었지.
“우리는 흡수한 자아와 초자아와 이드의 흔적, 그것들을 농축해 둔 뒤 틈이 날 때면 조금씩 남들에게 나눠줬거든. 초인으로 각성할 가능성이 짙어 보이는 사람들만 골라서 말이야.”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했죠?”
“파파와의 프로젝트 때문이지. 우주 인류 가운데서 초인을 각성시켜 양육하고 나아가 표식을 완성 단계로 끌어올리려면 우리가 반드시 그 작업을 해야만 했어. 뭐, 이제는 다 완성되었으니까 더 할 필요가 없어졌지.”
여하튼 요약하자면, 세미온과 야르베스와 하르무트는 자신이 흡수한 자아, 초자아, 이드의 흔적(trace)을 가공하여 몇몇 우주 인류 출신에게 나눠준 바 있었다. 그 모든 씨앗 심기가 성공의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실패한 경우 과감히 흔적을 다시 회수했다. 그러나 몇몇은 나중에 실제 초인으로 각성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의 것도 회수해 와야 마땅하나, 카이젤은 한번 초인으로 각성한 자는 무조건 자기 수중의 소유물로 두는 정책을 고집했기에 셋에게 다시 넘겨주지 않았다.
“파파의 고집 때문에 우린 한동안 우리 것이었던 소유물을 못 찾았지.”
“설마 헬리웃도 그런 자들 중 하나입니까?”
“그래, 나머지 녀석들도 이제야 파파께서 내주셨지.”
“저들은 당신들에게서 받은 그 농축물을 회수당하면 죽습니까?”
“아니, 그렇진 않아. 한꺼번에 급하게 회수하면 그렇겠지만, 우리 셋이 나눠가며 자기 몫을 천천히 회수하면 죽진 않아. 옛 기억과 정체성만 잃을 뿐. 물론 초인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은 그대로 남은 채 말이야.”
하르무트는 관속에서 잠든 초인들의 이마를 살며시 손으로 쓸어내렸다. 수천 개의 관을 모두 그렇게 처리하는 건 그녀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손이 하나가 아닌 덕이었다. 그녀의 등에서 촉수가 튀어나오더니 한꺼번에 수많은 흡수 작업을 처리해 버렸다. 잠시 후, 넋인지 혼인지 에너지체인지 모를 뭔가가 이마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더니 초인들은 혼절해 버렸다.
“덕분에.”
이어서 하르무트는 윤혁 쪽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 너에게 재밌는 걸 보여줄 수 있게 되었어.”
*
한참 뒤 하르무트는 다시 넌지시 운을 뗐다.
“강윤혁, 넌 우주 인류의 시초에 대해서 궁금해해 본 적 없니?”
“우주 인류라고요?”
당황스러운 질문에 대화를 멈췄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왜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을 안 해봤었지?’
윤혁이 아는 바로는 그들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문서가 없었다. 아무런 자료도, 뉴스도 없이 침묵 속에 묻힌 수수께끼였다. 그들이 시작된 때가 대략 우주 표준 시간 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14년에서 15년 전쯤이라는 말은 초인들 사이에서도 어렴풋이 들어봤다. 다만, 그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하늘도시란 건 대체 언제부터 창조되었을까. 그 전부터도 무인 시스템이 열심히 우주를 개발해 왔고 심지어 항성이나 행성의 요새화 기술도 꽤 진척되었으니 건설 여건 자체는 충분했으리라. 그 당시는 이미 타임필드 기술도 갖춰졌을 테니 수천 년 분량의 건설도 순식간에 해냈겠지.
정작 궁금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영토는 어찌어찌 만들었다 치자. 거기에서 살아갈 주민들은 대체 어디에서 마련했을까. 그가 알기로는 지구 사람 중에서는 자발적으로 콜로니로 이주했던 사람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22세기에 들어 테라포밍 기술로 인해 환경이 회복되었고, 우주에서 가져온 무한한 자원 덕택에 과거에는 흔들렸던 지구가 낙원처럼 개량되었으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무모한 탐험가 정신을 발휘해 우주로 이주할 리 없으리라.
‘게다가 귀소 본능이란 게 있으니 더더욱 불가능한 소리지.’
그러면 그 엄청난 인구, 이미 숫자로는 표현이 어려워 10의 지수 승 방식으로 표기가 되는 저 거대한 수효의 우주 인류 인구는 어떤 씨앗에서 시작된 걸까. 저들이라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닐 텐데.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클론이거나, 모종의 이유로 강제로 데려온 인간이거나.
‘허나 그들은 분명 인간이었어.’
우주 인류는 지구 인류보다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강화되었다 뿐이지 본질 자체는 동일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만들어진 생명체는 분명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뿌리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 정자와 난자를 확보해 수정시켜 키운 아기들이건, 인공적인 자궁에서 배양했건, 혹은 진짜 인간을 데려왔건, 그들도 아담의 후손이어야 한다.
“넌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하르무트가 윤혁의 생각을 독심술로 읽어내더니 교묘히 유도신문을 했다.
“그건…….”
“궁금할 테지. 참고로 우린 저런 비열한 자들의 후손들에게 합당한 번식 방법은 다름 아닌 ‘인공 수정과 인공 자궁’이라고 주장했어. 하지만 끝내 파파는 전통적인 가족 방식을 저들의 번식법으로 고수하셨지. 너도 봤을 테지. 하늘도시 안에서도 나름 지구에서와 동일한 번식 방법이 횡행하는 걸 말이야.”
분명 그건 그랬다. 하늘도시 안에서도 사람들은 보통의 삶을 영위했으며 결혼을 통해 자녀를 낳았다. 그나저나 윤혁은 하르무트가 왜 그들을 ‘비열한 자’들이라 지칭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인지 알려줄까?”
그녀는 다시금 생각을 읽은 뒤 대답했다.
“네가 이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와의 내기, 즉 본 게임이 개시된단다.”
“…….”
“자, 마음의 준비는 다 됐니?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준비 말이야.”
하르무트는 달콤한 꿀을 입술에서 흘리는 음녀처럼 유혹의 속삭임을 던졌다.
‘이대로 동의하면 저자의 속셈에 휘말리게 될까?’
마음속에서 복잡한 고민과 함께 내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덮어만 두면 결국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진실을 보게 될 것이 두려웠다. 하르무트는 계속 노래하듯 유혹했다.
“넌 그들을 불쌍하게 탄압받는 민중이라고 여기는 모양이구나.”
그때 별안간 스테판이 몇 달 전에 보내준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번뜩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인류연합의 압제로 인해 괴로워하는 불쌍한 자들, 영적 도덕적 가치를 누리지 못한 채 자유를 빼앗긴 자들, 억울한 피해자들, 실험체 신세로 고생하면서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가여운 민중, 아마 넌 그들을 그렇게 봐왔겠지.”
귀를 간지럽히며 파고드는 속삭임, 번뇌를 유발하는 달콤한 유혹의 고통, 귀를 틀어막고 싶은 욕구가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이뤄지는 의사소통은 텔레파시를 매개로 이뤄지는지라 저항은 무의미했다.
“괜찮겠어? 내가 보여주는 순간, 그들을 보는 네 시선이 달라질 텐데.”
“…….”
불편감이 커져만 가는 윤혁, 그는 저 멀리서 지켜보는 루디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이 만일 속임수라면 어떡하지? 하지만 반대로 만일 진실이라면? 진실이 무섭다고 도망치기만 한다면 자신은 불신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네가 고민하고 판단해서 네 의지로 결정해야 해.’
루디아의 눈은 이렇게 조언하는 듯했다. 조종당하는 방식으로 휘둘려서는 안 된다. 보건 보지 않건 스스로 결정해서 분명한 줏대를 세워야 한다. 윤혁은 자신이 책임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함을 직시했다.
“알겠습니다.”
어렵게 대답한 그를 향한 하르무트의 음흉한 눈이 희열로 물들었다. 그녀는 방금 전에 초인들로부터 회수한 ‘무언가’를 제 손에서 잘 버무려 뒤섞더니 본연 그대로의 액기스 상태로 정제해 냈다. 그것은 흡사 수십만 명의 무의식이 뒤섞인, 즉 ‘집단 무의식’이 물리적 실체로 현현한 듯한 모양이었다. 하르무트는 마침내 완성해 낸 원본 집단 무의식을 일부 추출해 윤혁에게로 투사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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