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1회 아벨의 후예 Ch 53. 카이젤과 스테판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15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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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3. Survival Contest : 카이젤과 스테판
“때가 되었군.”
문 바로 앞에 손님이 당도하자 카이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무하군.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아픔과 좌절, 그리고 보복과 원망의 발산. 그 악순환은 왜 이리 허망하고 무의미한 것인가. 세상 모든 것을 쥐고도 절망의 연쇄와 고뇌의 심연은 그의 삶에서 끊기지 않았다. 더욱 높은 곳에 닿으면, 근원적 한계를 넘어 초월자의 영역에 다다르면 무언가 달라질 줄로 기대했다. 하지만 자신의 본질 속 깊은 좌절은 한 움큼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어린아이마냥 부질없는 보복이나 계획하고……, 나도 참 어이없군.”
그는 완성 단계에 거의 다다른 커버넌트 링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승자가 문을 넘어서 이곳에만 당도한다면 이 여섯 번째 링이 완성된다. 남은 네 개는 아직 조건이 완벽히 충족되지 않은 탓에 청사진과 뼈대만 존재한 채, 형상화되지는 못했다. 여섯 번째 커버넌트 링은 최고조로 활성화된 QBE를 특이점 밀도를 넘겨 압축시킨 끝에야 비로소 형성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 물건의 완성을 위해 남은 한 가지의 필요, 그것은 우승을 이룩한 최후의 1인의 이레귤러, 정확히는 그 사람의 근진계 속에 나타난 본체다. 어느 설화 속에서는 에밀레종을 완성하기 위해 한 아이가 희생되었다고 했던가. 이제 우승자는 생명 대신에 더 값진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바로 자신 속의 투명한 욕망, 그리고 투명한 신념이다.
“대표님, 아크삼형제가 강윤혁님과 함께 드디어 ‘그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데미안이 깊은 상념에 빠진 주군에게 조심스레 보고했다.
“그런가. 동생에게 또 모난 짓을 하고야 말았군. 형으로서도 실격이야.”
카이젤의 한숨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부디 그 애가 나를 저주하지만 않았으면…….”
“대표님…….”
“데미안, 즉시 레반과 룬을 데리고 가시우주 경계에 있는 123번째 보이드로 이동하라. 물론 네 본체를 이끌고 직접. 거기에는 No.1 방주의 핵심 코어가 있다. 거기 주둔하는 아크삼형제의 분신은 본체에 가장 근접한 모델이야. 너희 S 클래스들로는 분신 갖고는 어림도 없어.”
“설마 거기서?”
“일단 내 권한을 빌린 뒤 거기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 시험의 최종 결과를 낱낱이 확인해. 진행 과정까지도. 그리고 아이를 잘 추슬러서 안전히 데려와라. 혹시라도 결과가 나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자신의 주인인 아브락사스(Abraxas)의 진정한 실체 앞에 무릎 꿇어 경외감을 나타난 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즉각 자리를 떴다. 카이젤은 비서관들이 보이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신격화 장벽을 뒤틀어 길게 늘어뜨린 뒤 우주 너머로 이어지는 일종의 ‘압축 터널’을 창조해 주었다.
‘자, 그러면 나도 손님을 맞이하러 가볼까.’
카이젤은 유유히 공중을 가로질러 제로원의 웅장한 도심으로 몸을 옮겼다.
*
“스테판 씨.”
“왜 그러시오.”
막다른 길에서 멈춰 선 데이빗은 앞날에 대한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심사숙고의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경합을 나누는 자리에는 스테판과 데이빗, 단 두 사람만 남았으니까.
게다가 시간은 많았다. 근진계에서 이미 억겁의 세월을 수없이 거쳐왔는데도 현실 세계에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근진계라고 해서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물리계의 시간축보다는 훨씬 더 예속에서 많이 벗어났다. 당장 1차원을 넘어선 고차원 개념의 시간축이 존재하는 것만 해도 그렇고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비율도 타임필드는 감히 견주지 못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러니 토론하고 대화하고 상의할 시간은 차고도 넘쳤다.
“전에 말했었죠. 저는 ‘영을 분별하는 감각’이 탁월하다고요.”
“기억하오.”
“저는 미처 회심하기 이전부터 그런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했어요. 그래서 과거에 하늘도시 식민지에서 일개 주민으로 살던 시절에는 종종 의식이 흐려질 때면 악한 영들이 지상에 남긴 잔흔을 맨눈으로 보기도 했었죠.”
데이빗도 과거의 기억이 일부나마 돌아왔는지 자기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하늘도시가 막 형성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 비교적 원시적인 형태의 콜로니였던 초기 하늘도시 안에서 살았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식민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표식’이란 게 새겨졌다. 그 이전에도 ‘족쇄’는 있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해제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불완전한 주박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의 세대 때부터 시행된 ‘표식’은 달랐다. 탈출할 수 없는 절대적인 속박이요,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우성 유전’되는, 심지어 임신이 아닌 실험실을 통해 태어난 인간에게조차도 전달되는 규칙, 더욱이 일곱이 분리될 수 없는 한 세트가 되어 완벽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기능까지. 그런 속박이 처음 시행된 세대인 만큼 데이빗은 표식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한 편이었다.
“차라리 이후 세대처럼 완벽히 길들여진 채 태어났다면 표식이 내 속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 채 무덤덤했겠죠. 그저 현실에 순응한 채 가축처럼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는 속박에 눌린 첫 세대인지라 상대적 박탈감을 은연중 깊이 느껴왔죠. 바로 그렇게 속박에 허덕이던 우리 세대 가운데 내가 선택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말이죠.”
“현월의 선지자 말이오? 그녀에 대해 기억나는 게 좀 있소?”
“많지는 않아요. 단편적인 기억의 편린들뿐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는 이제 확실하게 기억해요. 그녀는 내가 담지한 ‘영 감지 능력’을 주목했어요. 어떻게 해서 그 능력을 눈치채고 발견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녀를 지도해준 악령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나는 선택당했습니다.”
아마도 데이빗 속에 내재된 영 감지 능력은 그에게 설치된 우주 인류 제어용 표식을 어그러뜨려 ‘최초의 오류’를 창조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매우 적합한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데이빗은 완전체 이레귤러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목표하던 청사진에 당도하지는 못했다. 이후 그녀는 냉정히 데이빗을 버렸고 조금씩 선발 기준을 바꿔가며 각기 다른 실험체 후보를 택했다.
“그리고……, 최후에 이르러서는 나를 선택하게 되었구려.”
“스테판 씨는 왜 그녀에게 발탁되었습니까?”
“자세한 정황까진 모르겠소. 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그녀는 후손이라는 형태로 이레귤러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것 같소. 단순히 표식이 어그러진 존재를 만들어내는 차원을 넘어서 그 어그러짐을 유전시킬 수도 있는 자를 만들고자 했소.”
데이빗은 그 말에 몹시 놀라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인즉…….”
“그렇소. 나는 그녀와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였소. 그 부분의 기억까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아마도 그녀의 남편, 혹은 그 비슷한 것이었던 것 같소.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오. 비단 후손을 낳기 위한 씨앗으로서만 택한 건 아니었소. 그녀에게는 영혼이 통하는 상대가 필요했소.”
“사랑의 짝 말입니까? 그 무지막지하고 악랄한 선지자에게요?”
스테판은 심란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히도 내게는 그녀와의 추억이 소중한 감정의 잔흔처럼 어렴풋이 남아있소.”
“그랬군요.”
“그녀는 내 씨앗을 경유하여 후손을 낳아 ‘혼돈’을 대물림하고자 했소.”
스테판은 윤혁 일행에게 전해 들었던 ‘지구의 혼돈 시대’를 상고하였다. 혹시 현월의 선지자는 인류연합에 반기를 들고는 그런 시대를 재현하기를 원했을까. 아니면 그저 독재에서 벗어나 인간과 이종족이 자유롭게 독립하는 시대를 원했을까. 스테판으로서는 판단을 하기 어려웠다. 그녀와의 친밀했던 추억의 잔흔이 선입견으로 작용했다. 그녀가 꿈꾸는 미래가 ‘악’일지 ‘선’일지 냉정히 분별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그녀이니 그 추구하는 바가 선한 것일 리가 없잖습니까?”
데이빗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분명 그렇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건 ‘차악(次惡)’을 말하는 거요. 인류연합과 그녀, 과연 그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차악이 되겠소?”
“글쎄요. 저로서도 대답하긴 어렵군요.”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하오.”
스테판은 다시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그녀의 눈에 띈 이유라……, 사실 내겐 특별한 구석이랄 게 없소. 그래서 지금껏 난 내가 무작위로 우연히 선택된 줄로만 알았소. 그런데 제3 필드로 들어오기 전에 한 가지 단서가 될 만한 말이 떠올랐소.”
데이빗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게 뭐죠?”
“내게는 당신처럼 깊은 차원의 영적 본질을 민감히 탐지해 내는 재주는 없소. 하지만 그 대신 영의 본질 너머에 파묻힌, ‘인간으로서의 흔적’을 볼 줄 안다……, 라고 그녀가 말했던 바를 막 기억해 냈소. 그렇기에 난 어떤 인격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소.”
그 능력은 영적 감지와는 무관했다. 아마 그녀에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적의 스테판도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데이빗은 인간이든 천사든, 어떤 영의 본질적인 성질, 곧 영적 차원에 놓인 ‘거대한 본질’의 색채를 기가 막히게 잘 간파한다. 그렇기에 외모를 잘 보지 않는다. 대신 악한 천사 혹은 죄악된 인간의 ‘영 속의 시커먼 부분’을 잘 감지해 낸다. 또한 회심하여 중생한 자에게는 시커멓게 죽은 혼 속에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깨끗한 영’이 일부 파묻혀있는데 데이빗은 이것 또한 예민하게 감지하였다.
스테판은 그와는 달랐다. 그는 영의 색깔을 감지하는 특별한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더럽혀진 인간의 영 속에 파묻힌 잔흔, 곧 탯줄이 잘려 나간 흔적인 배꼽과도 같은, 희미하게 남은 ‘신의 형상’을 바라볼 줄 알았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인간이라면 반드시 내포하고 있는 그 흔적. 데이빗이 외모를 넘어 본질을 꿰뚫어 본다면 스테판은 그 본질을 넘어 더 깊은 곳을 바라볼 줄 알았다. 이는 영민한 영 감지 능력이 아닌 ‘믿음’의 차원이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회심하기 이전부터도 나는 ‘그녀’를 억압자 또는 악한 구도자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싶소. 그리고 회심한 후에는 비로소 그 재능을 올바르게, 그리고 온전하게 활용하게 되었소.”
이 순간에도 스테판이 온전하게 포용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저 너머의 미지의 존재였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스테판은 본능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비인격적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임을.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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