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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0회 아벨의 후예 Ch 52. 제2필드와 제3필드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13 | 회차평점 0 0

 

 

 

 

 

 

*

 

 

 

 

 

제3 필드에 진입하기 전, 넷은 각자 어떤 기억 속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분별하는 능력이 뛰어나. 타고난 자질도 우수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리 분별과 타인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그게 너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도리어 그런 속성 탓에 너는 내가 목표하던 성공작이 되지는 못했어.”

 

 

데이빗은 무의식의 홍수 가운데 어떤 여자의 흐릿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인상 깊은 시간을 내게 선물해 주었으니, 너에게는 변치 않는 이름을 줄게. 이게 너의 정체성을 표식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호해 줄 거야. 다만, 우리의 시간은 이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네.”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이는 여성, 그녀가 자신을 뒤로 밀쳤다.

 

 

“잘 있거라, 최초의 실험체여.”

 

 

그 순간, 여러 불쾌한 감정이 뇌리에 뒤섞여 들었다. 뿌리 깊은 배신감, 그녀의 본질 속에 숨겨진 위화감을 발견했을 때 느낀 공포, 본능적인 꺼림칙함, 공허감,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그녀와 친밀감과 강렬한 격정을 체험했던 기억,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까지……, 온갖 불안정한 요소들이 섞이며 악몽의 칵테일을 구현해 냈다.

 

 

‘불쾌하군.’

 

 

 

 

 

스테판의 옛 기억 속의 편린들도 잠시 그의 머릿속에서 재현되었다.

 

 

“너는 불완전해. 하지만 그렇기에 내 작품으로서는 완성품이 될 수 있었지.”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그녀의 나긋나긋하게 미혹하는 음성이 들렸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파편화된 문장이 메아리치듯이 들려왔다.

 

 

“네 특별함이 무엇인지 알아?”

 

 

“넌 사물을 볼 때 억지로 본질을 꿰뚫어 보려고 시도하지 않아. 외면이든 내면이든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려 하지 않지. 그래서 그런 점이 더욱더 흥미로워.”

 

 

“난 지금껏 통찰력을 소유한 자에게만 관심을 기울였어. 그런데 너는 조금 달라. 너는 누구를 보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직시해 주지. 거기에 자신의 잣대나 기준을 들이밀지 않고 말이야. 그렇기에 너를 이용했던 나의 본색을 알아차리고서도 네 울타리 안에 나를 기꺼이 넣어줬지. 나로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야.”

 

 

복잡한 마음이 높은 압력으로 방출되자 머리가 윙윙 울리며 터질 것 같았다.

 

 

“이건 어떠니? 날 좋아해 주렴, 아이야.”

 

 

“날 이용해도 좋아. 나도 기꺼이 널 이용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너와 나의 아이를 이 세상에 창조했을 텐데, 그랬다면 네게 새겨진 흔적이 더 많은 존재들에게 대물림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쉬워.”

 

 

점점 여럿이서 더불어 공명하는 ‘기억 속 음성’들이 많이 중첩되었다.

 

 

“내가 꿈꾸는 혁명 안에 네 잔흔이 영원히 남는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우리의 아이들은 혁명의 씨앗이 될 거야. 넌 그들의 아버지가 될 테고.”

 

 

“마흐디, 현월의 선지자의 앞길을 예비할 내 아이들……, 그들이 ‘그자’가 만들어낸 억압의 제어를 풀어낸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렇게만 된다면 그 압제의 세계를 나의 거룩한 성전(聖戰, Zihad)으로 피로 물들일 수 있을 텐데.”

 

 

“고마워, 나의 성공작, 나의 짝.”

 

 

“넌 가장 아름답고 특별하구나. 너를 사랑하마.”

 

 

그녀가 남겼던 음성들이 기억의 늪에서 재생되며 고통을 일으켰다.

 

 

‘그만! 그만하시오! 난 내 정체성을 당신으로서 정의하지 않을 것이오.’

 

 

스테판은 내면 깊숙이서 용솟음치는 절규를 끓였다.

 

 

 

 

 

 

 

 

*

 

 

 

 

 

마침내 무의식의 긴 통로를 통과한 네 후보자는 제3 필드에서 눈을 떴다. QBE의 침식이 사라진 것인지 차원화되었던 본체는 다시 원래 그들이 기억하던 육체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제3 필드는 그야말로 무한한 허허벌판이었다. 아무런 구조물이나 물질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공허 그 자체였다.

 

 

“정신을 차렸군요.”

 

 

데이빗이 스테판을 깨웠다.

 

 

“당신도 그 소리를 들었소?”

 

 

“아, 그녀의 음성 말인가요?”

 

 

그는 스테판의 질문에 짧은 긍정 외에는 별다른 해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제3 필드의 시험 말이오?”

 

 

데이빗은 말없이 시선의 방향을 옮겼다. 스테판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내 그의 눈은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한없이 거대한 무언가가 공허 저편에 희미한 실루엣 형태로 놓여있었다. 그 존재감이 어찌나 거대한지 제1 필드에서 본 니알라토텝은 지극히 왜소하고 하찮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신들에게도 저것이 보입니까?”

 

 

“저 엄청난 압박감을 좀 보십시오.”

 

 

곁에 서 있던 넘버 19와 넘버 103도 얼빠진 표정으로 공허 너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들 역시 그 엄청난 존재감 앞에 완벽히 제압당한 상태였다. 다만, 네 명 모두 공통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실루엣만 보이는 그 거대한 무언가, 그것은 지난번 2차 경합 당시에 깨어나기 직전에 잠깐 보았던 형상과 유사했다.

 

 

문제는 네 명이 인지했던 형상이 제각기 형태와 속성이 달랐기에 공통된 증언을 취합하여 종합적인 결론을 내볼 도리가 없었다.

 

 

넘버 1 데이빗이 목격한 형체는 ‘우주적 공포’의 현현(顯現) 그 자체였다. 실제로 데이빗의 영적, 본질적 통찰력이 탁월함을 고려할 때, 그가 바라본 형상이 가장 정확한 원모습에 가까울 가능성이 컸다. 그가 본 형태는 오래된 공포 신화 속의 절대자인 ‘끓어오르는 혼돈의 제왕’을 연상시켰다.

 

 

놀랍게도 이 영역을 주관하는 주인이 근진계 속에서 갖는 코드네임이 ‘아자토스’임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탁월한 관찰인 셈이다.

 

 

이 모습은 인류 문명과 인간이 창조해 낸 존재들, 즉 인공지능과 이종족과 시뮬레이션 우주와 테서렉트 아키텍쳐 따위의 것들이 바라본 위버멘쉬였다. 강압적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독재자 창조주,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황제. 인간의 피조물들은 그를 이렇게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그를 사랑하였고 자신의 존재의의를 그에게 바쳤다.

 

 

넘버 19가 목격한 모습은 ‘만물을 해탈로 이끄는 시커먼 구도자’였다. 혼돈과 미혹의 왕, 곧 모든 왜곡된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경배를 돌리게 될 선두주자, 흡사 불자(佛子)들이 추구하는 ‘미래의 위대한 스승’을 연상시켰다. 우주적 존재를 방불한 위압감,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듯한 이질적 실존 방식, 재앙을 줄지 축복을 줄지 가늠이 안 되는 야누스적 기질, 그 존재를 마주하자 마치 그들은 부처의 손바닥에 놓인 원숭이 신세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넘버 103이 바라본 공허 너머의 존재는 기이한 환상 속의 신적 괴이(怪異)였다. 고대 주술사들이 추구하던 무언가, 신과 악마를 하나로 합친 듯한 양면적인 존재감, 흡사 자석과도 같은 선악의 연합체, 알을 깨트리고 한계를 넘어 도약한 자들만이 인지할 수 있는 신비주의적 실체 같았다.

 

 

넘버 19가 바라본 형상이 ‘만인의 욕망과 이상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진 이상주의적 우상’이라면, 넘버 103이 바라본 형상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 깨우친 자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신비주의적 우상과도 같았다.

 

 

셋은 각자가 바라본 형상에서 짙은 불쾌감과 깊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 형상은 그들이 믿는 신앙관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존재였다. 피조물들이 바라보는 ‘우주적 공포’이건, 민중이 사랑하는 ‘욕망들이 성취된 결정체’이건, 비밀스러운 엘리트들이 추구하는 ‘혼재의 완성’이건,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들이 보기에는 괴기하고 흉악한 어둠의 실체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 후, 공허 너머의 실체는 자신과 이레귤러들 사이 공간에 거대한 무대를 드리웠다. 후보자마다 그 무대는 각기 다른 형태로 인식되었다.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 시험은 시공간의 무한한 공급의 형태로 인지되었다.

 

 

넘버 103 앞에는 무수히 많은 구각(球殼)들이 펼쳐졌다. 그는 그것들을 깨트리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하나의 껍데기를 깨면 더 단단하고 더 거대한 껍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한의 연쇄 앞에 질식하고야 말았다.

 

 

넘버 19 앞에는 구름과 같은 길이 펼쳐졌다. 그는 공허 너머의 존재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하나의 손아귀를 벗어나면 더 커다란 손이 그 영역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끝내 무제한으로 공급되는 시공간의 감옥 앞에 넘버 103과 넘버 19는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들의 여력으로는 그 연쇄를 극복해 낼 재간이 없었다. 본체가 모두 닳아 소진되고야 만 두 명은 기나긴 무한의 여정 끝에 스러지고야 말았다.

 

 

넘버 19 곁에서 스테판이, 넘버 103 곁에서 데이빗이 부축해 주었다. 아직 여력이 남아있던 둘은 끝까지 무한의 시험을 같이 이겨내 보자고 재촉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소용없는 일이에요.”

 

 

넘버 19가 탈진하듯 말했다. 이미 정신력이 더 남지 않았기에 같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 영역은 오로지 본인만이 본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업혀서 여정을 이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왔거늘…….”

 

 

“저는 무한 앞에 굴복하고야 말았어요. 여기까지예요.”

 

 

넘버 19는 자신의 기억과 소원을 스테판에게 인계해 주었다.

 

 

“결승선을 부탁할게요.”

 

 

스테판은 근진계 속에서 먼지처럼 흩어져가는 넘버 19를 무력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당신은 저 너머에서 무얼 보았습니까?”

 

 

“사람……, 희미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흡사 사람의 형상 같았소.”

 

 

그 대답을 들은 넘버 19는 허탈하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랬군. 그래서 당신은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군요.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당신이라면 뭔가 좋은 반전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네요. 어서 가세요. 저는 내버려두시고요.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끝마친 뒤, 제3 필드 속 심연에 침몰하였다.

 

 

 

 

 

넘버 103도 데이빗에게 그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괴로운 여정을 끝마쳤다.

 

 

“편히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곳에선 그러지도 못하겠지.”

 

 

씁쓸한 표정으로 데이빗은 자기 발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늦기 전에 저들을 구해줘야 해.’

 

 

이미 많은 동료를 뒤에 남겨두고야 말았다. 나중에라도 그들을 되찾을 길이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후보자들과 보조인원들은 RS-필드와 RS-월드 일부분으로 흡수되어 세상 끝날 때까지 저곳에 잠들어 있어야 하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니 투지가 다시금 불타올랐다. 그는 우주적 공포에 맞서기 위해 자신 속의 두려움을 몰아내며 가까스로 폭풍우의 바다 위에 발을 내디뎠다.

 

 

 

 

 

한참을 더 걸었을까. 마침내 데이빗과 스테판은 한자리에서 만났다. 길은 이 이상 이어져 있지는 않았다. 공허 너머의 존재는 여전히 저 멀리 존재한 채 무한한 압도감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았던 조금 전 여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선명한 존재감이 맞닿아 있었다.

 

 

“끝내 둘만 남았군요.”

 

 

“그렇소.”

 

 

“과연 제3 필드의 시험,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잘 모르겠소.”

 

 

둘 중 누구도 뾰족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둘은 공허 저 너머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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