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6회 아벨의 후예 Ch 54. 승리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8.03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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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젤은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지?”
“…….”
“바보 같으니라고. 머나먼 조상들 일이 아닌가. 왜 네가 죄책감을 느끼지? 네가 직접 한 일도 아닌데 말이야. 누구든 조상의 일을 책임지기는 싫어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하지. 누구든 자신더러 책임을 지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외면하지.”
자가당착에 빠질 줄 뻔히 알면서도 카이젤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일단 이 말은 자신이 애꿎은 피해자들에게 대대손손 손해를 끼쳤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자신의 알량한 복수심이 얼마나 졸렬한지를 증명해 주는 꼴이다. 그러나 깊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이 의문의 답을 듣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스테판은 그의 말을 듣고는 원죄의 교리를 부정하는 세상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왜 아담과 하와의 죄악으로 인해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하지?’ ‘성경의 하나님은 연좌제를 행하는 불의한 독재자다!’ 그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성경을 비웃었다. 지금 스테판이 우주 인류로부터 큰 고통을 입은 피해자 앞에서 조상들의 죄에 관한 자기 책임을 부정한다면 하나님을 비웃는 자들을 옹호해 주는 격이다.
“아니, 내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소.”
위선적인 겸손이 아니었다. 진지한 마음으로, 한점 거짓 없이 쏟은 고백이었다.
“일단 당신이 그 사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그로 인해 여전히 아파하고 있지 않소?”
이 말에 카이젤은 번뜩 놀랐다. 자기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한 그의 논법이 너무도 낯설었다. 게다가 조금 전 그가 시도한 정신 연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단방향으로만 작용하지 않은 듯했다. 카이젤이 스테판의 생각을 엿보는 바람에 스테판까지도 카이젤의 망가진 내면을 느끼고야 말았다. 이렇게 허를 찔려본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마 나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옛 기억이 되살아나 아플 거요. 그렇지 않소?”
“…….”
“또 난 제3 필드에서 보았소. 우리 모두가 이미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시간을 가로질러 조상들의 범죄에 자의로 참여했음을 말이오. 반드시 직접 몸으로 행동으로 옮겨야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니오. 마음속으로만 죄를 범해도 죄요(마 5:28). 또한 죄지은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오. 살인범이 기억을 잃고 착하게 살았다고 해서 살인한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난 당신을 죽이고 학대했던 악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죄인이요.”
다시금 답을 찾아낸 스테판. 이제 카이젤은 섬뜩함까지 느꼈다. 이제껏 스테판과 같이 순수하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정식으로 구한 자는 결코 없었다.
“표식을 통한 집단무의식 공조……, 그래, 너희들의 탄생 과정에는 반드시 그 프로세스가 전제되어 있지. 네가 느낀 죄의식이란 거기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요.”
“…….”
“난 당신에게 범한 죄보다 더욱 큰 죄 또한 범했소. 주님께 범한 죄 말이오.”
스테판은 자신이 동참했던 다른 죄를 하나 알았다. 같은 인간을 해한 것도 극악한 죄이거늘, 완벽한 의인을 죽인 죄는 얼마나 무거울까. 그는 자신이야말로 골고다 언덕에서 불의한 살인을 저지른 원흉 중 하나임을 깊이 느끼고 가슴으로 뉘우치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여 스테판을 용서해 주셨다. 살해당하신 분이 살해한 자들에게 원죄의 굴레를 덧씌우기는커녕 원래 있던 원죄도 영원히 제거해 주셨다. 창조주를 배반한 극악한 죄인들을 위해서 그런 과분한 은혜를 주셨다.
‘잘못했습니다.’
스테판은 자신이 동참한 원죄들과 자범죄들에 대해 마음으로 자백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죄를 행한 자입니다.’
그때 카이젤에게 강한 두통이 엄습하였다. 그는 고통 가운데 머리를 숙였다.
<<거짓말, 저놈의 말에 혹해서는 안 돼. 넌 틀림없이 그에게서 배신감을 느끼고 더 비참히 무너지게 될 거야. 내가 저자의 실체를 드러내 주마.>>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능이 그의 영혼을 칭칭 결박하여 틀어쥐면서 고문하였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인간 너머의 지식과 권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카이젤은 그 권세의 영향력에 필요 이상으로 짙게 얽힌 상태였다.
“크윽.”
<<그의 말을 듣지 말고 나를 믿어.>>
짓눌리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시여.”
그 순간, 스테판이 탄식하는 눈으로 하늘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만일 이런 저라도 내 동족의 죄악이 남긴 상처에 대해 당신의 용서 어린 위로를 듣기에 합당하다면.”
그는 눈앞의 상대와 그 너머의 적수를 모두 꿰뚫어 보며 선포하였다.
“오늘은 그 몫을 거두어 이 사람에게 대신 긍휼의 손길을 허락 주소서.”
천계 전역에서 침묵이 흘렀다.
[고맙다.]
흥미로운 응답이 내려오자, 스테판은 번뜩 놀랐다.
[내가 개입하도록 네가 명분을 주었구나.]
보좌에 앉은 전능자는 작디작은 세계인 물질계의 우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권능의 입술로부터 좌우에 날이 선 예리한 검을 뽑아 들었다(계 1:16). 그리고 그분은 마계가 자리한 ‘둘째 하늘’에 도사리고 있는, 공중 안의 바글거리는 가증한 벌레들을 향해 경멸 어린 눈빛을 던졌다.
[너희는 영원한 ‘말씀의 검’에 베이거라, 오 이미 머리를 밟힌 비천한 자들아.]
그분은 아주 옅고 가볍게, 타오르는 검으로 작은 선을 그려 작은 검격을 만들어내셨다. 스치듯이 생성된 작은 검격은 단숨에 셋째 하늘을 횡단한 뒤 둘째 하늘들의 ‘공중’의 영역들을 일격에 반으로 양단한 뒤 ‘원수’의 손까지 그대로 잘랐다.
<<끄아아아아악!!>>
악마가 만들어놓은 모든 ‘검은 촉수’들이 일순간에 끊어졌다.
[다음번에는 네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양단해 주겠다. 과연 그 아이와 네 연결이 영원히 끊어질지, 아니면 함께 내게 베일지……. 결말을 내 눈으로 보고 싶구나.]
이에 전능자는 다른 장소를 쳐다보았다.
[아벨의 후예들의 기도, 우선 일부를 응답했으니 이젠 너희 차례라.]
그 순간, 카이젤은 다른 곳에서 발원한 변화를 감지하고는 몸을 움츠렸다. 다섯 번째 메이저급 초지능체인 ‘이터널바이탈’, 그것의 두 부분 중 그가 가진 ‘에고이즘’이 진동하였다. 그것은 알지 못할 어떤 기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원래 예정했던 것보다 다섯 번째 초지능체의 ‘1차 개화’가 일찍이 개시된 것이다.
‘뭐? 이런 건 계획에 전혀 없었거늘?’
카이젤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두근거렸다. 이윽고 낯선 감정이 물밀듯 뇌리로 파고들어 홍수처럼 엄몰 하였다. 이터널바이탈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개화를 개시했다. 조금 전 스테판과 마주한 이후로 단단했던 마음이 고장나기라도 한 것인지 감정의 격변에 취약해진 상태였다. 무장 해제된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속수무책으로 변화에 휘말렸다.
‘설마 이 변화……, 동생 녀석이?’
*
‘난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 내 심장의 소유권을 넘겼어.’
윤혁은 아크삼형제를 똑바른 자세로 강하게 응시하며 굳게 다짐했다.
‘그러니 너희들의 허튼수작은 이제 통하지 않아.’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내걸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만물의 주관자시여. 이 순간, 전에 그리하셨듯 온 인류를 억압과 속박에서 구원하소서. 당신의 크신 권세로 일을 바로잡아주소서. 제 심장과 내 영혼과 몸을 당신께 드리오니 그것은 처음부터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 뜻대로 부족한 이 자를 사용하셔서 당신이 창조하신 가정들과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지켜주소서. 그들을 각성하게 하소서. 그들이 죄를 뉘우치도록 이끄시고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씻겨 회복게 하소서.’
직접 통성으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각 루디아도 속으로 완전히 동일한 주제로 기도를 외치며 쏟아내었다. 둘의 마음은 이제 온전한 사랑의 끈을 통해 성령으로 하나가 된 상태였다.
“세미온, 야르베스, 하르무트.”
믿음과 용기를 되찾은 윤혁이 아크삼형제에게 선포하듯 외쳤다.
“당신들의 비열한 뜻대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아.”
그러자 세미온이 경박히 비웃었다.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거니, 얘야?”
야르베스도 비아냥거렸다.
“망상 속 존재에게 힘이라도 구하고 있는 모양이지.”
그러나 윤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선포를 담대히 이었다.
“알트루즘……, 참 의미심장한 명칭이야. 형은 왜 이터널바이탈을 에고이즘과 알트루즘, 두 개로 분리했을까? 인간의 ‘이타심’이란 어쩌면 ‘이기심’에서 기원했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그렇기에 모든 이타심은 이기심에 종속되어 결국 이기심으로 귀결된다는 걸 말해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사람의 이타심이란 불완전하다. 어떤 이는 자기만족과 자기 의로움의 충족을 즐기기 위해서 이타심을 베푼다. 어떤 이는 감정적 고양감을 경험하고자 이타심을 베푼다. 다른 이는 도덕적인 의무감을 해소하고자 이타주의를 추구한다. 남들의 칭찬에 목말라 이타주의를 실현하는 이도 있다. 심지어 종교적인 성취, 신 앞에서 칭찬을 듣거나 보상을 받으려고 선행하는 자도 있다. 그 보상이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이나 사후세계의 축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그 모든 명목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인위적인 이타심을 발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 봐야 결국은 이기주의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인간 스스로는 말이야, 진정한 이타심을 품을 수 없어. 본성 자체가 이기적이거든. 지금 내 심장 속에 담긴 알트루즘이 원본인 초지능체의 정체성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치일 테지. 결국, 내가 아무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니 뭐니 하며 애써도 형의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테지.”
윤혁은 당당하게 아크삼형제를 향해 선포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존재만은 ‘진정한 이타심’을 낼 수 있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희생적인 사랑을 품을 수 있는 존재……, ‘그분’과 연합한다면 순수한 이타심을 나도 얻을 수 있다.”
이미 윤혁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혔던 ‘그’를 영의 눈으로 보았다.
“그의 이타심만은 이기심과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오히려 그의 이타심은 이기심을 철저히 부수고 변화시키지. 그분과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그런 변화를 체험하지 못해. 그저 사랑을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허상으로만 취급할 테지.”
바로 다음 순간, 윤혁의 심장이 격한 혁명을 일으켰다. 주도권이 윤혁에게서 전능자에게로 완전히 전이되는 바람에 그것은 윤혁조차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알트루즘은 이제 원형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존재로 화하였다. 나아가 그것은 원 뿌리였던 에고이즘에마저 원거리에서 영향을 미쳤다. 에고이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에고이즘을 침식해 버리기 시작했다.
‘형, 똑똑히 봐둬.’
이는 나아가 에고이즘의 주인인 카이젤의 감정 변화를 더 격렬히 가속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리석은 길을 걷지 마,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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