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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35회 아벨의 후예 Ch 54. 승리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29 | 회차평점 0 0

 

 

 

Chapter 54. 승리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적막함 가운데서, 두 사내는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한 명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으며 오만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하나는 감정과 의지를 모두 내려놓고 겸허히 무릎 꿇은 자세로 앉아 처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되려 두려움으로 동요하는 건 전자 쪽이었다. 후자는 모든 아픔을 초월하기라도 한 듯 의연했다.

 

 

“큭, 크하하하하.”

 

 

가면을 쓴 장신의 남자는 분을 견디지 못했는지 섬뜩한 폭소를 터뜨렸다.

 

 

“네가 감히……, 나와의 화해를 논해?”

 

 

도시 속 무한공간이 거대한 농도의 패기(覇氣) 앞에 문자 그대로 기반부터 흔들리며 부르르 진동하였다.

 

 

“…….”

 

 

“아, 나를 설득할 생각인가? 네 동족의 속박을 풀 대책으로?”

 

 

“그렇지 않소. 그들을 당신 마음대로 처분하시오.”

 

 

태연하면서도 숙연하고 슬픈 표정의 스테판. 이에 카이젤의 분노는 더 끓었다.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려는 건가.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를 빌미로 나를 비난하며 악한 존재로 책망할 셈인가. 참으로 한심한 전략이로군.”

 

 

“용서의 여부는 당신의 권한이요. 가해자들은 그걸 강요할 자격이 없소.”

 

 

“혹은 내가 두려워서 그런 건가?”

 

 

최초의 우주 인류. 원죄를 저지른 당사자들. 그들은 실제로 직접 왕을 자기 발밑에 짓뭉개며 경박한 쾌락을 만끽했다. 피해자를 찌르고 폭행하고 학대하고 거세하고 강간했다. 수백 차례 넘게 죽이려고 위협을 가했고 실제로 죽이려고까지 시도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은 악마에 의해 붙들려 조정되고 있었다. 악마는 그 도구들을 통해 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위적으로 파괴하고자 했었다.

 

 

그 계획은 사실상 거의 성공할뻔했다. 그날 ‘멸망의 아들’은 일깨워질 수도 있었다. 선한 유대인의 이름 없는 희생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날이 종말의 초읽기가 도래한 날짜가 되었으리라.

 

 

지금은 그때와 달리 ‘우주 인류’와 ‘지구의 왕’의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왕을 살해하려 했던 자들의 후손은 막강한 권세 앞에 노예가 되어 굴복하게 되었다. 카이젤이 이 자리에서 손 한 번만 튕겨도 이 자리에 있는 스테판을 포함해 전 우주에 흩어진 범죄자의 후손들은 일순간에 소멸할 수 있다. 시스템, 표식, 피코머신과 기계 시스템이 우주 인류의 목숨을 겹겹 쥔 상태다. 족쇄를 풀겠다며 죄악된 방법을 택한 조상의 우매함 탓에 후손들은 더 끔찍한 족쇄에 묶이고야 말았다.

 

 

스테판은 이런 현실을 굴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난 당신이 두렵지 않소.”

 

 

그는 무거운 고개를 들어 카이젤의 선명한 금빛 눈을 또렷이 쳐다보았다. 만일 단순히 갑을 관계의 입장 차이와 두려움 때문에 무릎을 꿇었다면 그 진정성은 의심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의 무릎을 주저앉힌 힘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운명의 주관은 당신 손아귀에 있지 않소.’

 

 

이 시간 스테판을 굴복시킨 건 순수한 사랑과 긍휼에서 우러나온 애통이었다. 용감한 스테판이었기에 그는 전 인류를 다스리는 압도적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미 주님에게서 깊은 용서를 체험했기에 죄책감에 잠식되지도 않았다. 다만, 용서도 화해도 겪지 못한 채 방황하는 가여운 영혼을 보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뼈저린 연민을 느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강자를 보고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마음은 단순히 망가진 약자를 보고 느끼는 값싼 동정 따위와는 본질부터 다른 짙은 감정이었다. 자신도 상대도 모두가 다 ‘죄’라는 커다란 짐에 눌려 괴로이 허덕이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얻은 슬픔이었다.

 

 

카이젤은 분명 강압적인 지배의 방식으로 수천 해(垓) 단위의 인구의 인간들을 억압했다. 이런 태도는 분명히 변명할 길 없는 잘못이다.

 

 

하지만 시작점을 돌아보니 정작 가해자는 그가 아니었다. 피해자인 줄로 알았던 스테판의 동족들과 그 조상들이 먼저 나서서 한 인간의 영혼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아픔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든다. 그 절망은 누군가를 폭주하게 만들고 끝내 어리석은 길로 향하게 만든다. 상처 입은 자가 어리석어지고 결국 악의 길로 흘러가게 만드는 죄의 연쇄. 멈추지 못하는 증오의 사슬. 얼마나 잔인한 비극인가. 스테판도, 카이젤도, 우주 인류도, ‘비극의 권세’ 아래 짓눌린 희생자였다.

 

 

‘당신에게 연쇄를 멈춰달라고 부탁하진 않겠소.’

 

 

아마 그럴 능력은 없겠지. 스테판은 상대에게 지혜로운 선택을 강요하려는 욕심마저 포기했다. 그런 강요는 진정한 존중이 아니며 진정한 긍휼이 아니다. 이 시간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받아주며 희생하는 일뿐이었다. 상대의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것. 다 내어주고 난 뒤에는 일이 잘 해결될까. 결과는 기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스테판이 지불할 수 있는 희생, 심지어 그의 목숨까지 더하더라도 값이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르지. 뒷일은 아예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그렇군. 그런 건가? 동정인가?”

 

 

이를 자극하자 한층 더 왕의 분노가 짙고 섬뜩해졌다.

 

 

“크, 크큭.”

 

 

냉정함을 유지하던 그가 스스로를 비웃으며 조소하였다.

 

 

“가당치도 않군. 피지배자가 너희 지배자에게 동정심이라니.”

 

 

“…….”

 

 

“그래, 이제 좀 우스운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내 모습을 보니 한심할 테지.”

 

 

불행히도 과거의 망령에서 못 벗어난 자는 카이젤 한 명뿐이었다. 이미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인 우주 인류 첫 세대는 오래전에 아크삼형제의 손에 단죄당해 죽어 없어졌다. 이후 태어난 우주 인류는 표식을 통해 원죄에는 참여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나름의 복수라고 여겼던 우주 인류 프로젝트는 카이젤에게 아무런 만족감도 해방감도 주지 못했다. 일반인, 초인 가릴 것 없이 우주 인류 모두가 그를 숭배했으나 상처는 점점 더 곪아갈 뿐이었다.

 

 

매일 자기 몸에 난 흉한 상처를 볼 때마다 트라우마는 강렬히 재현되었다. 수만 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그는 매일 밤 중단되지 않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게 끙끙 앓는 동안, 그의 깊은 마음속 소원은 무엇을 향했을까. 완벽한 복수인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재정의할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이었을까.

 

 

그 모든 것을 성취했음에도 허망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깊은 내면에서는 화해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과의 화해, 타인과의 화해, 그리고 운명과의 화해를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 사실을 극구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스테판은 조심스레 다시 입을 뗐다.

 

 

“내게는 소원을 빌 자격이 없다고 말했소. 또한 나는 소원을 원하지도 않소. 내 소망을 충족시킬 궁극의 기쁨, 그 근원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은 아직 그것을 모르오.”

 

 

“…….”

 

 

“동정이라……, 그건 높은 처지의 인간이 낮은 자를 내려다보는 알량한 감정이오. 그런 게 동정이라면 내게는 그런 마음을 품을 자격이 없소. 지금 나를 지배하는 건 슬픔이오. 당신의 괴로움이 나의 것처럼 느껴지니 어찌 된 일이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 스테판 자신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본 저 사람의 깊은 신음이 왜 이리도 자기 것처럼 생생하게 절실할까. 근진계 안에서 그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접해보았기 때문일까. 그런 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깊은 한을 함께 느낄 이유로서는 부족했다. 마치 어떤 영이 직접 움직이며 스테판의 마음속에 울림을 심어 넣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

 

 

“의심된다면, 당신에게는 내 속을 파헤칠 무기가 있지 않소?”

 

 

스테판은 존엄성의 보호마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내 마음을 파헤치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정신 분석을 염두에 둔 언급이었다. 카이젤은 인간의 뇌를 입자 단위로 송두리째 분석할 정도로 탁월한 마인드 리딩 기술을 보유하였다. 아울러 인류 최강의 전무후무한 초능력도 보유했다. 그가 스테판의 말을 허울뿐인 거짓말로 의심한다면 얼마든지 정신을 꿰뚫어 속을 파헤쳐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스테판은 무참히 짓이겨져 존엄성의 파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카이젤은 차마 책의 다음 장을 펼치기가 두려워 망설여졌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서슴지 않고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대의 심리를 해부하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무서웠다. 애써 외면하고는 있었지만, 그도 스테판 위에 임한 자신보다 강한 권위를 느꼈다.

 

 

‘그가 진심이면 어떡하지?’

 

 

그의 연민과 사랑, 깊은 공감이 진심이라면? 상대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화해를 원한다면? 그토록 자신이 무의식중 갈구했던 화해의 손길이 그의 안에 존재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천재인 카이젤도 이번만큼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기대해 본 적도 없었고 미처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만약 상대가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를 품어주기를 원한다면, 자신은 무슨 선택을 해야 할까. 태어나서 처음 겪는 난해한 딜레마였다.

 

 

“난.”

 

 

망설이던 카이젤을 향해 스테판이 한 번 더 말했다.

 

 

“만일 과거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얼마든지 내놓을 작정이오. 아니, 존엄성마저도 내버릴 수 있소. 그러나 나라는 존재의 값이 그대의 슬픔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야말로 무가치하고 가벼운 값이라는 사실 또한 자각하고 있소. 어찌 감히 내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겠소.”

 

 

스테판이 아는 한, 그 상처를 갚아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한 분뿐이었다.

 

 

“당신이 미리 준비해 둔 그 반지의 힘, 난 그걸 쓰지 않겠소. 필요하다면 당신이 취하여 사용하시오. 만일 과거에 받았던 상처를 그걸 사용해서 조금이라도 지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오.”

 

 

“불가능해. 커버넌트의 힘으로도 인과율을 위배하지는 못한다. 역사란 건…….”

 

 

“그렇소. 철필로 새겨진 기록이지. 우리의 죄 또한 없었던 일로 바꿀 수는 결코 없을 것이오. 설령 당신이 잊어버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고 갚으실 거요. 그 어떤 위대한 권능과 지식과 과학 기술로도 ‘죄의 기록’만은 씻어낼 수 없소.”

 

 

이제 카이젤은 저도 모르게 숙연해져 잠잠히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오, 지구의 왕이여.”

 

 

카이젤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마음이 자꾸만 뒤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울분이 터져 나올 듯 간질거렸다. 동시에 상처의 압박감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도 내면에서 울부짖었다. 두 내적 갈등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짝 스테판의 사념파와 뇌리 구조를 읽으려 시도했다. 살짝 책을 펼쳐본 것만으로도 거대한 무서움이 느껴졌다. 그는 벌벌 떨면서 책을 재빨리 닫았다. 자칫 열어보았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보다 압도적인 힘 앞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 힘의 본질은 스테판의 내면에 진심을 생성하는 권능이었다. 한 사람의 깊은 슬픔과 회개의 마음이 카이젤에게도 생생히 전달되었다. 이 정도로 짙고 강력한 순수함은 동생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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