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8회 [1부] 8화. 개혁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6.18 | 회차평점 0 |
젊은 비서관이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본 알렉시스는 여러모로 특이했다.
올해로 서른여덟 살에 다가올 이듬해 서른아홉이 될 예정이니 어리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여러 번 살아보지는 못했을 나이였다.
그런데도 알렉시스는 흡사 수십 차례 기억과 경험을 간직한 채 인생을 반복해낸 사람을 연상케 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말 시간을 거슬러 수십 번씩 인생을 회귀하기라도 한 거 아냐?’
로빈은 솔직히 이런 감상평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인재라면 천 번을 고민하여 판단해도 실패할 확률 높은 일들을 하루에만 수백 개 이상을 결정하면서도 단 한 번도 최적의 결과를 내놓지 못한 적이 없었으니까.
더욱이 그가 숨 쉬듯이 내놓는 아이디어와 계획안은 하나 같이 범인의 창의력으로는 발상하기조차 힘든 것들이었다.
단순 명료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빈틈없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곁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점입가경이었다.
‘하여간 이 맛에 이 블랙 기업을 탈퇴하지 못하겠다니까.’
분주히 세계를 돌아다니며 피곤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난다.
또 쉴 틈 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명령하고 판단한다.
이것이 대륙들을 관리하는 리더의 일상.
비록 책무의 무게가 적다 해도 그런 사람 곁을 바삐 따라다니며 보좌 역할을 하는 것은 가볍다고 말하지 못할 일이었다.
더욱이 알렉시스가 거의 밤낮 없이 일하는 통에, 또 언제 위급한 업무를 맡을지 모르는 자리에 있었기에 로빈 역시 귀한 스물네 시간을 헌납하다시피 해야 했다.
프라이버시 또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중요 식사 미팅이 없는 때에는 식사하는 자리도 매번 공유했고 쉴 때에도 같이 붙어다녔으며 심지어는 숙실도 근접한 곳에 두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 워크 라이프 밸런스 차원에서는 좋지 못한 선택.
하지만 로빈은 끈기와 뚝심이 부족한 자신 세대의 청년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천재 이상의 초천재 곁에서 서당개 마냥 맴돌다보면 자신도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그 준하는 수준으로 성장하리라 기대했다.
‘게다가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노라면 대리만족이 느껴지기도 하고.’
알렉시스는 부임하자마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역들을 신속히, 그러나 불협화음 없이 정확하게 교정하였다.
먼저, 각 대륙과 그 부속 스테이트들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부정부패와 암묵적으로 자행되던 불법들을 색출하였다.
영토 병합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악습의 관행이 청소되지 않아 지저분하던 마당에 그의 개혁은 상당한 환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거대 사회의 행정 시스템이 작동하는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자기 몸의 생물학적인 리듬을 본능적으로 읽듯 능수능란히 이해했다.
아무리 비대하게 구축된 체계라 할지라도 가장 큰 단위에서부터 미시적인 범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유기적인 흐름에 통달할 수 있었다.
마치 전설적인 외과의사가 넓게 뻗은 종양을 체계적으로, 성공적으로 발라내듯이, 그는 부작용도, 상처도, 후유증도 거의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신중하고 신속하게 대형 수술을 집행하였다.
불법을 자행한 자들에겐 인종, 지위, 계급, 출신을 막론하고 합당한 처벌을.
고의로 악습적인 태만함을 전염병처럼 퍼뜨린 근원지에는 징계를.
본연의 의무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관행은 뿌리부터 절삭을.
이중삼중으로 암적으로 엮인 범죄 집단들은 대거 체포를 감행했다.
“워낙에 산적해서인지 이 일만 손 보는데도 오랜 세월을 공들여야겠군요.”
막상 말은 그렇게 하며 투덜댔으나 그 진척은 놀라우리만큼 빨랐다.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맡아 여유가 없는 주제에 경탄스러운 솜씨였다.
다음으로 그는 재정, 경제, 사업 쪽도 말끔히 수리했다.
심각한 국고 낭비를 유발하는 병폐 사업을 대거 정리했다.
유동적으로 자유 경제가 작동하는 데 훼방을 일으키는 요인들도 제거했다.
나아가 부자연스러운 외력 개입으로 인해 뒤틀린 자본의 흐름과 인플레이션 현상의 정상화까지 착착 이뤄나갔다.
동시에 균형 잡힌 범 대륙 범위 경제 교류의 장이 펼쳐질 수 있도록 밑바탕까지 체계적으로 닦아야 했다.
각지에서 등용된 수천의 인재, 펜대나 굴리던 탁상공론자들이 아닌, 실전에서 단련되어 경제 감각의 귀재가 된 자들.
그들은 황태자로부터 손수 따스하지만 무서운 참교육을 받으며 그의 모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밤낮 정성스레 갈려나갔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는 어차피 사용할 카드가 많아요. 그중 권력과 행정력은 가장 효율성이 떨어지고 불안정한 축에 속하죠.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역할만 똑바로 해내면 그만이예요.”
이 말에 로빈은 절실히 동감했다.
무리한 개입으로 황금 거위의 배를 가른 전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균형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 많이 한 지식인답게 로빈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평했다.
물론 그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런 답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평이요, 책임지지도 못할 참견이라고 여기며 자조했다.
자유로운 섭리에 의해 돌아가는 시장.
인간의 본연적 탐욕을 다스리고 억제하기 위한 권력.
그 두 무형의 힘이 서로를 향해 선을 넘지 않고 조화의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는 인류 대망의 숙제를 누가 모르겠는가.
‘정답의 방향을 안다고 해서 아무나 해낼 수는 없지.’
아니, 방향을 아는 이도 드물다고 해야 하려나.
대개의 경우 경제라는 난제 앞에서 사람은 탁상공론식 이론적 망상에 빠져 한쪽 또는 다른 한쪽으로 균형을 잃기 십상이니까.
그런 이들을 정의하는 용어가 바로 범부(凡夫)이리라.
그나마 조금 낫게 과업을 수행했던 이들도 카오스 이론을 연상케 하는 경제 차원 속 무수한 변수들 앞에서는 결국 속절 없이 꼬리를 내려야 했다.
‘하지만 저 사람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
로빈은 알렉시스에게 부여된 카드가 권력 이외에도 또 있음을 잘 알았다.
황태자로서 날 때부터 계승한 ‘언약’이라는 영적 자산, 승전의 영웅으로서 얻은 명성과 명예, 국가로부터 자질을 인정 받고 아버지에게 신뢰를 얻어 획득한 권력.
이 세 종류의 무기와는 별도로 또 다른 재능을 통해 쌓은 능력.
어쩌면 진정한 주력은 그쪽일지도 모르겠다.
‘통치권을 이용해 적당히 구대륙을 좋은 밭으로 기경해놓은 다음 신대륙에 뿌리를 둔 그 재력과 경영권으로 세계 경제를 제대로 재편할 셈인가.’
스스로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자유 경제의 최정점에 섰으니 굳이 국가 주도적 경제 행위라는 불안정한 무기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으리.
거위 배를 가를 유혹에 휘말릴 일 없으니 참 편하기도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독하리만큼 무시무시한 책략가라는 감상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 한달 동안 대대적으로 갈아엎어진 영역은 교육이었다.
알렉시스는 의외로 이쪽 영역에서 대단히 진심이었다.
그는 인류의 미래가 올바른 교육과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음을 믿었다.
전적으로 그것 하나에만 예측 변수를 두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파급력을 무시하는 우매함을 범하지는 않았다.
그는 크고 작은 반발의 폭풍을 거뜬히 받아내가며 과감히 진전했다.
어린아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민이 받는 교육 체계를 상세히 수정하고 수리하였다.
지역과 문화권을 막론하고 이 일은 예외 없이 강행되었다.
교육 공급의 보편화와 상향 조정.
범 대륙 단위의 안정화된 공교육 시스템 확립과 균형 조율.
다양화되고 고도화된 ‘기회의 장’들을 성장케 하고 양성하는 일.
산업 혁명 시대에 걸맞도록 인재 양육의 패러다임을 조정하는 작업.
각종 경쟁 과열의 부작용의 최소화 및 장기적인 후유증 완화.
하나하나가 결단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으며 실패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 지독한 완벽주의자는 여기서도 실수를 용납지 않았다.
물론 그 엄격함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장 신랄히 발휘되었다.
그리고 그는 분명한 성과로서 자신의 길을 입증하였다.
“한 달 사이에 이만큼이나 개혁되다니,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격이군요.”
찬란한 서구 문명의 요람이었던 북서부 컨티넌트는 그렇다 쳐도 낙후되었던 서남부 컨티넌트를 이 단계까지 끌어올리다니.
가히 혀를 내두를 기염이었다.
아직은 갈 길이 남긴 하지만, 이런 추세라면 모든 지역의 모든 시민이 문명인으로서 충분한 교육을 받아 성장하는 미래도 꿈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었어요.”
황태자가 기획하는 그림은 인류 전반의 성장과 상향 평준화.
나아가 다양한 능력의 자유로운 개화가 극대화된 텃밭도 추구했다.
허울만 좋은 그저 그런 인재들이 아닌, 시대에 걸맞은 창의성 넘치는 인재를 다양한 영역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강력한 인재 풀을 원했다.
“다양한 지역,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속에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개성과 잠재력이 깃들어 있죠. 나는 그 꽃들을 전부 피워내야 해요. 어느 것 하나 억누르지 않고 올바른 본연의 모습으로 길러내어 날개를 펴고 날게 해줘야죠.”
로빈이 곁에서 지켜본 주군은 실제로 인재의 냄새를 맡는 데 귀재였다.
어쩌면 귀신이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르지.
보통의 사람은 이미 개화된 재능만을 바라볼 수 있고, 제법 좋은 리더는 잠재력을 엿볼 수 있으며, 더 훌륭한 지도자는 잠재력을 끌어내어 줄 수 있다지.
그런데 알렉시스는 뭐랄까, 다른 카테고리에 속했다.
처음부터 아예 보이지 않던 재주를 미리 읽어낸다고 해야 하나.
그것도 완벽하게 개화된 상태가 어떤 모습일지를 읽는 듯 했다.
마치 신의 명부에 적힌 각 사람에 대한 달란트 목록 장부를 마음대로 컨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혹은 요새 유행하는 흔한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신적 시스템의 힘을 빌려 타인의 모든 잠재력과 능력을 미리 읽는 주인공이라던가.
현실에 그런 기인(奇人)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그 모든 유형의 인재의 포텐셜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부화(孵化)시키는 데도 도가 트신 듯해. 나로서는 도통 원리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천재 교육자는 저런 사람이 아니려나.
그가 매일 무수한 통치와 경영을 감당해야 하는 일꾼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그간 다른 컨티넌트와 스테이트들을 통치하면서도 그런 천부적인 재능을 요긴하게 활용했었으리라.
그 증거로 현 제국에는 알렉시스가 발굴하거나 키워낸 인재가 수두룩했다.
그들은 실제로 각 영역에서 천재성과 위대함을 자랑하며 세상을 여러 의미로 바꿔나가는 중이었다.
그들 중에는 소년과 소녀부터 해서 청년은 물론 알렉시스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주군께서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가실 때 필요한 자원들을 풍부히 키워낼 텃밭이 앞으로 더더욱 풍요로워겠군요.”
“글쎄요. 생각처럼 쉽진 않을 거예요. 산업 혁명도 5차로 접어드는만큼 아무래도 창조적이고 영적이고 지혜로운 인재가 필요한 시대이니까요.”
“그런 풍토를 건설하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하신 장본인이 하실 말씀으로서는 부적절합니다만.”
“쓰라린 팩트 폭력이네요, 로빈.”
그럼에도 대륙을 막론하고 어린 세대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참에 알렉시스의 개입과 노력은 하나의 긍정적 반전 징후임이 분명했다.
한편 개개인과 사회의 능력 향상만이 그가 교육의 터전을 개량하는 목적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전쟁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사상전이었다.
제국이 수호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와 그 속에 함유된 진리.
그것을 널리 확산할 의무가 차기 황제인 그에게는 부여되었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에게 장래 위협이 될 왜곡되고 치운 이념들의 독소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특별히 무슬림 신정제국의 옛 터전이었던 중앙 컨티넌트와 대 연방의 망령이 아직도 웅크리는 중인 북부 컨티넌트는 정신적인 개조와 정화가 시급했다.
‘지금의 개혁들만으로 그 위협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진 않아.’
알렉시스는 눈에 보이는 적보다 위험한 것이 무형(無形)의 적성 권세임을 누구보다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현재 노력이 그 뿌리를 꺾는 데 턱없이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였다.
그는 결단코 부하들 앞에서 지금 거둔 성취를 자랑하지 않았다.
“너무 과도하게 염려하시는 건 아니신지요?”
항상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상관이 안쓰러운지 비서는 위로를 건넸다.
“이미 충분히 잘 감당해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에 황태자는 나직이 자조의 웃음을 흘리며 무서운 발언을 꺼냈다.
“비서관, 우리의 세계에는 제국은 물론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폭발적 잠재력을 담은 씨앗이 여럿 숨어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 온 뒤로 새로 거둬들여 후원하기로 한 몇 아이들의 사진을 잠자코 바라보며 씁쓸한 맛을 삼켰다.
재능을 바라보며 거둬들인 새싹들이 아닌, 고향 땅의 냉혹함과 비정함으로 인해 뭉그러지고 훼손된 불쌍한 도망자들.
“아직 그것들을 발본색원하기에는 내 힘이 턱없이 부족하죠.”
“주군보다 큰 힘을 가진 인간이 지구상에 누가 있단 말입니까?”
로빈으로서는 도통 잘 이해되지 않았다.
권력으로든, 재력으로든, 명성으로든, 지혜로든, 저자보다 우위가 있던가.
사실상 황제마저도 아들이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든 권좌를 넘겨주겠다고 공공연히 선전한 마당에.
그런 저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대적이 있다고?
“아마 적당한 수준의 일인자로서는 불가능하겠죠. 궤가 다른 경지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해요. 이 지구 위를 거닌 그 어떤 현인보다도 더.”
청년의 자색 눈은 의미를 모를 묘한 이채로 물들었다.
야심인지, 아니면 앞날을 내다본 현자의 고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겁니다, 로빈. 내가 상대할 적들의 실체를요.”
그들을 실은 커다란 ‘하늘의 배’는 가운데땅이라고도 불리는 구대륙의 중앙 권역을 유려히 가르며 사막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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