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회 [1부] 16화. 마인드 퓨리파이어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7.10 | 회차평점 0 |
나를 매우 가까이서 친밀히 알던 이들 중 몇은 역설적으로 나를 염려하였다.
혹 내가 원한이라는 위험한 힘에 이끌려 움직이는 것은 아닌지를.
혹은 내가 그 깊숙하게 은밀한 동기를 교묘하게 대의로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
내 개인적인 진노가 지극히 올바르고 공정해야 할 통치자로서의 가치관과 궤적에 비틀림의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를 걱정했다.
그러한 우려도 아주 무리한 가정은 아니었다.
나 역시 로봇도 성인군자도 아닌, 흔들리기 쉬운 감정이라는 요소를 소유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합리성을 위반하기까지 감정에 자신을 맡긴 건 아니었다.
도리어 명분과 당위성은 나의 편에 속해있었다.
확실히 친우들과 가족들의 염려처럼 나는 몇몇 대상을 진심으로 미워했다.
나는 내 어머니를 희생으로 몰아간 막후의 암흑 세력을 극도로 증오했다.
또 그들과 밀월하고 야합하였던 위선과 부패의 온상, 바티칸도 경멸했다.
그러나 그 혐오는 나의 개인적인 것이기에 앞서 공공의 의지에 속한 것이었다.
비록 족쇄이긴 하지만 내 조국을 세워 세계 정상에 좌정하게 해주었던 그 고귀한 약속.
그 언약을 세우신 당사자인 하나님과 나의 조상인 현왕(賢王) 크리스토프 1세의 고귀한 의지를 고의적으로 적대하여 영원한 모반의 조약을 맺은 오컬트 세력.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율리시아 1세 여왕이 그녀의 동료인 개혁자들과 함께 치열하게 맞서 싸웠던 대적, 곧 타락하고 교황청.
리포머들의 원수이자 그들의 요람이 된 브리튼을 이단자 국가로 낙인 찍고 수백년 이상 배격하여 급기야 유럽에서 축출하기까지 했던 부패의 무리.
그런 존재들과 연합하기를 허락한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도 뉘우치기를 거부한 채 은밀히 악과 부패의 연대를 이어나가는 그들을 위해 선물할 수 있는 건 엄중한 철퇴 말고는 없었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커뮤니스트들의 굳건한 진(陣)과 권세를 미워했다.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그릇된 가치관은 둘째치고 그들은 나의 숙부님, 아버지의 동생을 살해하였던 무리였으니까.
지금은 내 동생으로 입양된 사랑하는 내 사촌도 동부의 공산 연방과 그것을 지배한 이념을 심판하기를 소망하였고 그 뜻을 위해 나와 한 마음이 되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심판의 철퇴를 내리기를 바랐으나 스스로는 힘이 없었기에 형님인 나를 의지하였다.
나는 기꺼이 그 소원을 받아들였고 실천하였다.
애초에 그들을 향한 징벌은 나의 의지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부득이하게 변명을 하자면, 유물론의 권세를 향한 나의 증오심 또한 엄연히 사적인 것이기에 앞서 대의를 위한 감정이었다.
나로서는 타협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언약의 후계자로서 그 지독한 바이러스를 삭제해야 했다.
죽여도 죽여도 또다시 부활하는 그 끈질긴 종양을 파멸시킬 의무가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는 유물론과 그 자녀인 사회주의의 달콤한 유혹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영구적인 치료를 가져다주어야만 했다.
나는 대전쟁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그들에게 합당한 응분의 벌을 부분적으로는 선사하였으나 아직도 모든 의무의 분량을 채우지는 못했다.
그저 연방이라는 하드웨어만을 파괴했을 뿐.
소프트웨어이자 본체인 정신적 영향력은 소멸에 이르게 하지 못했다,
이것은 내게 지금까지도 마음의 짐으로 남겨진 막대한 숙제였다.
버겁고 부담스러울지라도 나는 그 의무를 내려놓을 의향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게는 또 하나의 미움의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거짓의 창조자 무함마드가 인류에 남긴 유산을 향한 증오심이었다.
단언컨대 나의 진단에 의하면 메카는 바티칸과 더불어 가장 오랜 시간 인류에게 영적 질병과 해악을 끼친 악성 종양의 진원지였다.
내 선조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신뢰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나는 그 유지를 충실하게 존중하였고 받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세대에서는 인류의 암을 완치하기를 소망했다.
특별히 나에게는 그 망령을 땅 위에서 필시 끊어야 할 이유가 또 있었다.
이는 내가 그들로부터 받은 치욕적인 수모로 인함이었다.
대전쟁 당시 비겁하게 세계 양대산맥의 충돌을 틈타 브리튼의 시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했던 그들의 광기와 악신들림은 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나는 내 눈앞에서 시민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날의 죄책감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떨치지 못했다.
그 재난적이고 지독한 사악함은 나의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절망적인 상흔을 남겼으니.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나는 산 자들의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다.
그날의 나는 많은 것을 상실했고 얻기를 원치 않는 것들을 얻었다.
나는 과거의 망령들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세 차례의 대전쟁을 통해 패배한 것은 단지 그릇들이었고 내용물은 그때와 비교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도리어 제국 내부로 숨어들어 더욱 교묘하고 간악해졌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 신사다운 면면 뒷장에 숨겨진 이러한 맹렬한 날 것의 감정을 발견할지라도 그는 나를 향해 아량을 베풀어야 마땅하리라.
아니 그리할 의도가 없을 지라도 용서를 강권하고 싶다.
나는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변명하고자 하는 바이다.
내 감정과 동기는 이성의 올바른 지배를 받고 있으며 사적 복수심의 기름 부음을 받고는 있을지언정 그 중심축은 공공의 의분(義憤)임을 증언하는 바다.
후세는 필시 내가 쏟아낸 분노가 세상의 청결함을 위해 봉헌되었다고 평가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주께 맹세코 나는 사람들 그 자체를 증오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미워하는 대상은 사람들을 포박하는 무형의 힘 그 자체.
그 포박을 뿌리까지 태워 없애고 사로잡힌 포로들을 해방하는 것.
이 열망이 내 마음 속의 나침반을 지배하는 자기장이었다.
나의 힘이 어디에까지 닿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내게 허락된 만큼은 내 일을 마치고 이 시대를 떠나리라.
나는 권좌의 무게를 연습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항상 이 다짐을 마음에 새겼다.
그렇다.
어린 시절의 내게는 지극히 순수한 소망들이 가득했다.
어머니의 열정과 아버지의 온건함이 화합 반응을 일으켜 낳은 열망들.
그러나 풍파를 맞으며 성장한 나는 세상의 어두움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고 그것을 정직하게 직면하였다.
나는 그것을 극복하기를 택했다.
이렇듯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심장에는 순수했던 소망 외에도 또 한 축의 강렬한 열의가 일종의 집념처럼 묻어 각인처럼 선명히 얼룩졌다.
*
변화의 물결은 마치 바람길이 눈에 보이지 않듯 은밀하게 흘러들었다.
허나 그 거대한 여파와 영향력은 지표면 전체를 아우르고도 남았다.
사람들은 시나브로 가랑비에 옷 젖듯 변화에 융화되어 적응하였다.
혁신의 키워드는 배움과 탐구를 향한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가치를 향한 회귀.
더 정확히는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침식하였던 매스미디어 시대의 요구에 대한 반기였다.
인위적으로 이식된, 그러나 확실하고도 반영구적인 격변이었다.
그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를 비가역적으로 나눌 랜드마크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일반적으로 한 시대의 축을 뒤트는 사상적 변곡점이 발생할 때는 최소 10년 이상의 긴 시간을 걸쳐서 변화의 풍파가 발생하는 법이다.
다양한 학자들간의 의견 교류가 필요하며 출판을 통한 사상 확산이 필요하고 사회 각 계층 내의 갈등을 통하여 재조정과 뿌리내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임한 이 변혁은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요구치 않았다.
이미 지구촌이 교통과 통신의 압도적 발달을 힘입어 하나가 된 지금, 특별히 하나의 통치 체계가 하나의 행정 시스템 아래에서 모두를 제어하게 된 현재, 변화의 신속한 전이를 막을 길은 전무했다.
출발은 ‘마인드 퓨리파이어’라고 불리는 제품의 출시로부터였다.
겉보기에는 왜소한 전자기기처럼 보이는 그 물건.
그러나 그 실체는 최첨단 의학 기술이 집적된 장비이자 5차 산업 혁명의 정수가 응축된 차세대 양자컴퓨터 연산 장비였다.
그것은 신체 부착형 장비로 뇌파의 신호를 고도의 정밀성을 기반으로 감지하고 부착자의 신체와 신호를 주고 받는 교류 기기였다.
나아가 뇌의 신경전달물질 분비 패턴 및 영향을 주는 유사 치료 기기로 뇌의 뉴런 세포의 분지 패턴 및 세포막의 전위차에도 부분적인 간섭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상자의 생체에 대한 완벽한 제어나 조작이 가능한 수준의, 공상 과학에서나 존재 가능한 기기는 아니었으며 상호 통신을 통해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는 기기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기능은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몇 가지 한정적인 목적에 대해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특화 기능은 단 하나.
여러 종류의 중독성을 유발하는, ‘뇌의 본능적인 편리성 추구’를 거슬러 뇌가 자기 스스로를 단련시켜 탄력성과 안정성과 복잡성을 재구축하도록 돕는 것.
다시 말해서 뇌의 인스턴트화를 치료하는 장치였다.
그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뇌의 특정 영역에 간섭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인위적으로 특정 목적성을 갖고 변화의 방향을 확정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이미 임상 시험에서 완벽하게 입증된 성공 사례입니다. 모든 연령대, 인종, 성별에 대해 동등한 성과를 확인하였죠. 당장 도입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개발자는 안전 보증과 함께 후원자에게 모든 데이터를 기꺼이 넘겨주었다.
“수익에 대한 계약은 당신의 뜻에 기꺼이 맞춰드리죠.”
후원자는 너그러이 인심을 드러냈으나.
“됐습니다. 어차피 유익을 얻을 목적으로 꿈꾼 계획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엄연히 당신의 기술력이 핵심이지 않습니까?”
“이미 전하의 회사에서도 비슷한 것을 기획하시지 않았습니까? 시간 절약의 문제이지 결국은 그쪽에서도 몇 년 안에 동일한 기술력을 얻어냈을 것입니다. 저는 약간의 세부 조정만 도와드렸을뿐입니다.”
나스루딘은 황태자 측에도 이미 자신이 완성한 기술과 유사한 류의 프로젝트들이 대략 80% 이상의 완성도로 여럿 존재함을 예견하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아이디어를 넘겨받자마자 곧장 대량 생산 및 상품 출시로 연결할 수는 없었으리라.
애당초 자신이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하는 데 가장 막대한 도움을 주었던 라지쿠마르의 연구도 상당부분 대전쟁 당시의 황태자의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아 확장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열매의 수확도 마땅히 합당한 인물의 손으로 들어가야 옳겠지.
“아쉽군요. 당신이 저의 스카웃을 수용한다면 기꺼이 다량의 지분과 함께 최고의 우대를 허락할 의향이 있는데 말이죠.”
“사양하겠습니다. 과학자와 기업가의 직분을 동시에 맡는 건 당신처럼 비정상적인 규격의 인재에게나 가능한 일이죠. 게다가 물질적인 성공은 궁핍하지 않을 정도로 거둔 상태라서요. 저로서는 그저 제가 꿈꾼 일들이 이뤄지는 것을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누리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나스루딘은 그 성정이 대단히 신중한 인물로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절대성’을 부여하여 함부로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게 인간의 무지를 잘 알던 그였으나 마인드 퓨리파이어와 그에 딸린 부속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만은 확답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단 자신이 이룬 성취라는 사실에서 느끼는 자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없이 보아온 사례들과 그 열매로부터 얻은 확신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세상은 자신이 변하는 줄도 모르는 틈에 격변할 것입니다.”
마인드 퓨리파이어는 지나치게 튀지 않는 수준의 명분과 함께 출범했다.
세상을 바꾸느니 뭐니 하는 과대광고식 호언장담은 일절 없었다.
그저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사소한 정신적 갈등과 고통을 완화하고 판단의 오류를 바로잡아주는 용도의 도구로 홍보되었다.
이미 유비쿼터스화와 스마트화가 진행된 세상에서 충분히 나타날 개연성이 있는 기기, 어찌 보면 유사품이나 동급의 도구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도구로 소개되었다.
그 기반 테크놀로지의 실질 수준이 지극히 높다는 진실은, 개발과 보편화에 관여한 이들 외에는 알지 못했다.
대신에 너무 주목을 끌지 못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성과를 거두는 데 장애가 될 수 있기에 마케팅은 대대적인 규모로 지혜롭게, 그리고 적당히 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납득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졌다.
알렉시스의 산하 기업은 신대륙에서부터 시작해 파격적인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하였고 며칠 안에 그 범위를 확대하여 구대륙 전역에까지 시장을 넓혔다.
생산 비용과 운송 비용을 감당하고도 남을 막대한 경제력을 소유한, 세계 유일의 극초거대기업이었기에 이러한 총알 같은 계획 진전이 가능했다.
그리고 제품 출시되고 판매된 지역들마다 즉각 다음 날부터 사소해보이지만 뚜렷한 흐름이 일기 시작했다.
변화의 진원지는 사람들의 습관이었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습관들.
아토믹 스케일 해빗(Atomic-scale habit)들에 나타난 현상.
운동하지 않던 사람들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건강 관리를 미루던 이들이 식단과 생활 습관에 변혁을 이룩하고자 노력했다.
책을 읽기 싫어하던 현대인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독서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공부에 염증 반응을 느끼던 학생들이 습성에 거역하여 책을 펼쳤다.
탐구하기를 귀찮아하던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서 진지하게 정보를 탐색했다.
한 종류의 정보나 이념만을 편식하던 이들이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은밀하고 느리게 나타났기에 당장 엄청나게 뚜렷한 혁명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확실하게,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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