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55회 [1부] 55화. 맏형의 책무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0.28 | 회차평점 0 |
*
오늘은 황태자가 근 두달 만에 누리는 값진 은총의 날이었다.
그는 스물한 살, 한창 전쟁 중에 군인 겸직 통치자로 데뷔하여 정치계에 뛰어들었고 이후에는 동시에 커버넌트 코퍼레이션 창업에 학문 활동과 연구 프로젝트까지 겸하였다.
그것은 백 명의 영재가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직무였다.
때문에 알렉시스는 청년기 내내 지금에 이르기까지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살인적 스케쥴을 감당해야만 했다.
휴일이란 명실상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식일이라 해도 노동 농도만 낮았지 온갖 사색, 탐구, 연구, 계획 등을 숨 쉬듯 담당해야 했다.
그나마 ‘쉬는 순간’은 잠자는 때와 일요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예배 때는 시민들을 향한 연설과 교육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휴가란 거의 다 반납한 지 오래였다.
지금처럼 진정으로 휴식하는 날은 수 개월에 한 번꼴로 찾아왔고 그나마도 휴가라기보다는 하루 휴일에 불과했다.
중대한 결착에 앞서 그는 제한된 기회를 동생과 함께 소비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른이 된 지금, 어릴 때처럼 동생들에게 애정을 베풀 나날이 상당량 줄어든 것이 현실이었다.
알렉시스는 이 점에 대해 알게 모르게 아쉬움과 미안함을 많이 느끼는 중이었다.
물론 동생들도 어느 덧 훌륭하게 자라나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한 뿌듯함과 보람을 주었다.
더욱이 기특하게도 아우들은 큰형에게 도움이 되겠다며 나름의 최선을 다해 자기 영역을 훌륭히 정복해나가는 중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될 테지만, 어쨌건 황가의 구성원들이 혈통이나 가문의 후광 없이 스스로 탁월함을 증명한다는 사실은 가족됨을 떠나서 한 명의 국민으로서도 충분히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얼굴을 자주 맞댈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그나마 세르빈이나 유타는 커버넌트 그룹 경영 일로, 테디는 국정 경영 문제로, 엘리어트는 의회와의 교섭 문제로 종종 얼굴 볼 일이 있었다.
반면, 그 유명한 용병왕인 랜슨 제블런 브라이틀란트는 잦고 험난한 출정 때문인지 황태자와 마주할 기회가 드물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어린 편인 동생이어서인지 랜슨은 알렉시스에게 있어 더욱 아픈 손가락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형이랑 같이 이야기도 많이 나누자.”
“좋지. 형도 좀 푹 쉬면서 재충전 좀 해야지. 그간 너무 지쳤잖아.”
유례없는 철인이라고 해서 안식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구대륙의 60%를 경영하는 업무도 만만치 않은데 거기다 테라 코프급 유일 극초거대기업을 경영하여 번창시켜야 하고, 최근에는 이슬람을 소멸시킨다며 거창한 프로젝트들을 수없이 추진하였다.
마인드 퓨리파이어와 가디언엔젤의 완성도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팀 아르다 급의 학자들도 지쳐 쓰러질 살인적 분량의 연구를 여러 개씩 소화했으니 뇌가 곤죽이 되어도 이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나야 머리가 나쁘니까 몸만 열심히 굴리면 되지만, 형은 다르잖아.”
“너도 영리해, 랜슨. 너만한 전술가는 군 내에도 드문 걸.”
“큭, 형한테서 인정받으니 기분은 좋긴 하지만, 나도 내 주제는 알아.”
현 황제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다.
그 중 모든 종류의 재능에 있어서 압도적인 최고는 단연 맏이인 알렉시스였지만, 다른 자식들도 황제의 유전자를 직접 물려받았거나 황제의 눈에 들어 양자로 간택받을만큼 재주꾼이어서 그런지 하나같이 뛰어났다.
전반적인 재능과 성품과 자질이 탁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황제보다는 조금 못해도 위인급의 잠재력을 타고났다.
또한 각자 특정 분야 혹은 두어 가지 이상 분야에 있어서 특출함이 돋보였는데 해당 분야에 있어서만은 황제 이상이었고 심지어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에 맞먹거나 버금가는 수준은 되었다.
덤으로 이들 열한 황자와 한 명의 황녀는 하나 같이 탑배우들을 빛 바래게 할만큼 미남 미녀이기도 했다.
이러한 잘난 형제들 사이에서 비교 당한 탓인지, 랜슨은 자신이 머리가 나쁜 편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두뇌 쓰는 일에 있어서는 덜 발달한 건 사실이었다.
근육 바보라는 별명이 있을만큼 몸 쓰는 재능이 워낙에 뛰어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랜슨의 두뇌는 상당히 우수했다.
용병왕으로서, 군인으로서 군사들을 부리는 재능과 전술 감각이 남달랐으며 실전 전투 지능도 높았고 임기응변과 전략적 속임수에도 능했다.
“그런 것 치곤 이번에 매우 훌륭하게 전략을 펼쳤던 걸? 무모하긴 했지만.”
알렉시스의 놀림 섞인 칭찬에 랜슨은 얼굴이 빨개졌다.
“뛰어나긴 무슨. 형한테 비하면 발가락 때만큼도 못하지. 게다가 그날의 작전은 내 주도 하에서 기획된 게 아니었어. 난 그저 행동 대장에 불과했지.”
푸념 섞인 자조에 알렉시스는 잠잠히 동생의 말을 긍정했다.
“알아. 넌 후반부에만 적들을 유인해서 교란했을 뿐, 그들을 양지로 끌어낸 건 펠렌드로크의 음모였겠지. 그 아이가 아니면 그런 치밀한 모략을 꾸밀 친구가 없으니까.”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힘든 모략가.
알렉시스는 둘째 동생의 그 치밀함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형인 자신에게마저도 마음의 전부를 다 내보이지 않던 그 아이.
이번에도 끝내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심지어 자신의 본체가 신대륙에 없다는 사실도 알아차렸으며 모종의 해킹을 통해 제국 내부의 기밀을 몰래 미끼 삼아 적들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제국 행정부의 중요 요직을 맡은 펠렌드로크였기에 그런 기회가 있었겠지.
‘동생이라 얌전히 넘어가고는 싶지만, 한 번 경고하고 추궁할 필요는 있겠지.’
알렉시스는 이미 자신이 전장을 지휘하던 중 신대륙에서 동생들이 벌였던 일을 얼추 조사하여 파악하고 있었다.
통신 체계로부터 단절된 채 음지에 숨어있던 블랙리스트 상 범죄자들의 위치를 파악하여 그들에게 비밀 라인으로 몰래 접촉한 건 펠렌드로크였으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비상 통신망을 재구축할 장비들을 배포한 일은 필시 기업체의 힘이 필요한 작업이니 커버넌트 그룹의 이사진이자 자회사 대표인 세르빈이 도왔겠지.
유타에게 경쟁 의식이 강한 아이이니 아마 유타가 마인드 퓨리파이어 개발 프로젝트에 성과를 보인 것을 의식해 자신도 가디언엔젤 프로젝트의 노하우를 일부 재활용했으리라.
가디언엔젤의 성능에는 발끝만큼도 못 다가가긴 해도 통신 차단망을 우회할 정도의 도구는 만들 수 있었겠지.
‘에휴, 형들이 되어서는 동생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부추긴 격이구나. 이 내가 너무 관심이 부족했던 탓이다. 앞으로는 좀 신경써야 겠어.’
지극히 잘나고 똑똑한 엘리트이면서도 아이처럼 유치하고 질투 많은 면이 있는 세르빈이나 속을 파악하기 힘든 흑막인 펠렌드로크야 그렇다고 치자.
헌데 알렉시스 자신조차도 질투심을 느낄만큼 성정이 온유하고 선량한 그 아이, 심지어 신앙심에 있어서는 알렉시스보다 낫다고도 생각되는 그 아이는 왜 그랬을까?
“그 ‘예언의 서’란 것 말이야.”
“음, 으응? 그, 그게 왜?”
알렉시스의 추궁에 랜슨은 움찔하였다.
“제리가 창작해낸 것 맞지?”
대답이 없자 알렉시스는 긍정임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였다.
제리도 가끔 이런 모략에 휘말리는 때가 있구나.
아마 성격상 제리가 직접 동참하지는 않았을테고, 쌍둥이인 펠렌드로크가 몰래 유도하여 제리의 도움을 착취해냈겠지.
“제리는 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하나야. 특히 영적인 고찰력이 뛰어나지. 그 덕에 타종교의 경전마저도 능가하는 품질을 지닌 책도 매우 손쉽게 만들어내지.”
알렉시스의 셋째 동생인 제로스 리바이 브라이틀란트.
갖가지 베스트셀러, 수필, 학술적 고찰을 담은 서적, 전설적 코믹스, 세계적 유행을 탄 극작품과 드라마와 영화를 무수히 탄생시킨 전설적인 작가.
젊은 나이에 그 엄청난 재능을 개화시킨 그는 현재 ‘제리’라는 필명 뒤에서 활동하며 세계 문화계의 인기와 영향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특히 기독교인인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는데 이는 제리가 영적으로 상당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최상급의 기독교 변증서인 ‘순결한 기독교’, 타킨 작가의 레젠다리움에 필적하는 알레고리적 작품인 ‘타르티아 연대기’, 세기말 장르 소설인 ‘지상에 남겨진 자들’, 휴먼드라마 역사 극작 ‘훌의 아들’ 등의 작품이 제리의 간판작이었다.
아울러 악마들의 준 전지적 관점에서 쓰여진 ‘스트루테이프의 편지’ 시리즈 10부작은 실로 역설적이고 두려운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지옥과 악마의 실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경에 빠지곤 했다.
형을 사랑하는 제리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알렉시스에게 간접적 편지를 쓰곤 했는데 내심 감상평을 표현하진 않아도 알렉시스는 꼬박꼬박 그 책들과 극작들을 찾아서 감상해왔다.
그런 이유로 제리의 작품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알렉시스였다.
이번에 무슬림들 사이에 유통되었다던 그 기괴한 ‘예언의 서’.
한 번 훑어보자마자 알아보았다.
그것은 제로스의 솜씨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다.
“제리야 당연히 악의가 없었을 테지만, 정작 무슬림들의 파멸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제리가 된 격이네.”
“뭐, 제리 형이야 당연히 우리 계획을 솔직히 말해줬다면 도와주지 않았겠지.”
“못됐어, 하여간.”
게다가 동참한 동생은 그들만이 다가 아니리라.
용병들이 사용한 우수한 무기들이 그 증거이리라.
제국군이 그런 좋은 무기를 용병들에게 수출했을 턱은 없으니 반드시 다른 스폰서와 기술 공급책이 있었으리라.
재정적 지원은 세르빈일테고, 기술력은 아마도.
“에드윈이지? 그 아이가 무기 개발에 도움을 줬겠지?”
“귀신 같이 알아차리네, 형은.”
“내가 상대하는 진짜 적들이 다름아닌 귀신들이라서.”
에드윈 아셸로스 브라이틀란트.
황제의 죽은 의붓 여동생이 남긴 마지막 혈육이자 황제에게 양자로 받아들여진 자.
형제들 사이에서도 잘생기기로는 공동 2위인 그는 영특한데다가 엔지니어로서의 재주가 뛰어났다.
입양아 출신이라서 그런지 삐딱선을 자주 타는 탓에 알렉시스의 마음속에 종종 안타까움을 남기는, 아픈 손가락 같은 동생이었다.
“에드윈에게 잘 좀 대해줘. 친아들들끼리 텃세부리지 말고. 다 같이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들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지.”
“쳇, 알았어.”
랜슨은 입양아 출신 형제들을 썩 반기거나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존경하는 아버지나 큰형의 관심이 분산되는 것이 질투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그래도 나름 자신은 막내인데.
형의 애정을 독차지하고픈 마음이 욕심임은 알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참 천방지축들이네 다들.’
동생들이 대단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앞날이 아주 조금은 우려되었다.
능력은 하나같이 대단한데 하나씩 어딘가 나사가 풀어져서인지 종종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인단 말이지.
문득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창 34:1~31)
그들은 자신의 누이가 당한 성폭행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 무려 한 일족 전체를 포경 수술을 받도록 속여 유도한 뒤 통증이 극심할 때를 틈 타 강간범들을 향해 대학살을 벌였다.
마피아들조차도 그들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 황제의 침례명이 ‘제이코프’임을 생각할 때 불편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냐, 그래도 내 동생들은 나사는 좀 풀렸어도 천성은 괜찮은 아이들인걸.’
인재를 파악하는 재주가 예언자급이라 불리는 냉철한 분석가라지만, 형제들에게만큼은 약간의 콩깍지의 영향을 받는 알렉시스였다.
이전회
54회 [1부] 54화. 맏형의 책무 (1) |
다음회
56회 [1부] 56화. 맏형의 책무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