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57회 [1부] 57화. 라지쿠마르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11.04 | 회차평점 ![]() |
유학 시절의 라지쿠마르에게 10년 이상을 같이 동행한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나 알바트로스.
신대륙 태생으로 축복받은 명석한 두뇌의 병약한 몸의 한계를 함께 지닌 소녀였다.
그녀는 라지쿠마르보다 조금 못한 수준의 재능을 지녔으나 열정은 그 못지 않았다.
둘은 여러 방면에서 관심사가 겹쳤으며 탐구 분야도 상당 부분 중첩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같은 길을 걸어갈 기회가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올림피아드 메달들을 같이 석권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원들에서 조기에 학위들을 얻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연구 프로젝트들에 여러 번 같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에 두 사람은 자연히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다.
유학생 라지쿠마르에게는 여러 인연으로 맺어진 친구와 동료들이 있었고 그 모두가 세기에 남을 유능한 인재 혹은 유력자가 될 씨앗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과의 친분은 대개 필요에 따라, 능력을 보고 맺어진 것이기에 한계가 분명했다.
레이나와는 달랐다.
그녀는 능력적인 측면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신뢰의 마음을 두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레이나와 라지쿠마르는 지식인으로서의 성향과 재주는 비슷했으나 그 못지 않게 차이점도 많았다.
둘 사이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문화적 배경도 인종도 언어도 아니었다.
그런 요소들도 두 인생의 궤적이 다른 모양을 띠게 한 데 기여했겠지만, 그보다는 가치관과 신앙관의 차이가 더 결정적이었다.
라지쿠마르가 유아기를 보냈던 시절의 인도는 두 색깔의 문화가 물감처럼 혼재된 세상이었다.
하나는 범신론적 세계관으로 요가, 명상, 영계 체험, 유체 이탈 등의 모든 종류의 신비 체험을 긍정하며 윤회론과 여러 신의 영향력을 두루두루 영접하는 문화였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대단히 포용적이고 관용적이었으며 풍부하고 다양했다.
적어도 라지쿠마르는 그런 긍정적 평가를 어느 정도 체험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소유한 전통과 정신적 유산이 그런대로 괜찮은 면을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 주축이 된 문화는 브리튼의 직할령이 됨으로써 수입된 것으로 유일신을 믿는 신앙 위에 세워진 세계관과 성경의 가르침을 뿌리로 둔 가치관이었다.
처음에는 이 서구식 문화가 전통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하지만 차차 인도 주민들이 브리튼의 시민으로서 융화되는 과정을 겪었고 그 영향으로 새로운 문화는 또 하나의 유산으로 뿌리내렸다.
라지쿠마르는 이 문화의 유용성과 건전함 또한 인정하였다.
인도가 근대화되고 현대화를 이룩하고 브리튼령 가운데 가장 부유한 권역 중 하나로 성장한 데는 분명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이 존재했다.
이런 사실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라지쿠마르는 옛 것과 새 것 모두를 적당히 포용하자는 주의였다.
그는 주일 학교도 다녔으며 유학 시절에는 나름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채플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도의 전통적 영적 유산에도 자주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과학도였지만 몇몇 무신론적 과학자들처럼 진화론이나 유물론적 세계관에 경도되지는 않았다.
학자로서 늘 불가지론적 입장을 견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진화론도, 창조론도, 범신론적 가설도 두루두루 관심을 갖고 포용하였다.
유사한 부류의 재능과 성향을 지닌 레이나였으나 그녀의 태도는 달랐다.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누구에게도 화내거나 짜증내거나 고집을 앞세우는 일을 일절 보인 적 없던 그녀.
그럼에도 옳고 그름, 진리와 거짓에 대한 선은 분명했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레이나의 태도는 배타적이고 비관용적으로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라지쿠마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연한 성격이었고 배타성과는 가장 거리가 먼 성격의 인물이었다.
친구로서 레이나는 라지쿠마르에게 종종 조언해주었다.
세상에는 회색 지대가 없노라고.
중립적인 요소는 없으며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 회계보고를 해야 할 책임이 있노라고.
그런 말들은 대체로 듣기 거북하고 불편하고 거슬리는 잔소리였다.
지극히 온화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그런 버거운 말들을 전달하는 그녀는 참 신기한 존재였다.
라지쿠마르였기에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주었지 아마 다른 친분이 덜한 이들이었으면 그녀를 배격하고 비난했으리라.
사실 그도 그녀의 조언들을 들을 때마다 잠시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낄뿐이었다.
진지하게 수용하지는 않은 채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레이나는 그런 무시에도 지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진지하게 전달했다.
그는 친구에게 여러 차례 전도를 하였는데 일반적인 교회에서 흔히 쓰는 가벼운 멘트, 이를테면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안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평안을 주시길 원합니다’ 같은 말들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그녀의 말들은 두려움을 주었다.
그녀는 ‘대가를 치를 각오’에 대해 늘 이야기했다.
또한 그저 기독교적 가치관에 젖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운명에 대해 준비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란 단순한 지식 습득도, 신앙 체계의 조성도 아닌, 영원히 살고 죽는 문제가 걸린 심각한 이슈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런 기준대로라면 라지쿠마르가 종종 관심을 내보인 인도의 전통적 유산들이란 배격되어야만 하는 우상 숭배의 산물들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알았기에 라지쿠마르는 더욱더 그녀의 조언을 불편스레 여겼다.
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배타적인가.
상대방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유산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 더 낫지 않은가.
라지쿠마르의 기준대로라면 온고지신의 지혜를 갖춘 자신 같은 부류의 사람이 지혜롭고 레이나는 그에 반대되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품이 너무도 훌륭함을 알았기에 이러한 판단은 금세 자가당착적 모순에 빠졌다.
확실히 고약한 요소가 많이 포함된 자신의 성품과 달리 레이나는 이타적이었으며 타인에게 사랑이 넘쳤다.
만일 선악을 구분한다면 그녀가 더 절대적인 선에 가까운 인격체이리라.
그런 이유 때문인지 라지쿠마르는 선악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취하기를 더욱 꺼렸다.
어린 시절의 그는 이렇게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에 붙들려 있었다.
*
지금도 그러하지만, 20~30년 전의 그 시절에도 ‘그 남자’는 찬란히 빛나는 별이었다.
우상을 마땅히 배격해야 하는 책무를 지닌 브리튼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우상화되기 쉬운 존재가 바로 그였다.
제국의 십대 아이들 사이에서 황태손인 그는 인기, 기대, 동경, 사랑, 질투와 시기, 우러러 보는 시선을 홀로 독식하였다.
소녀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사랑에 빠졌고 소년들은 한없이 동경하였다.
그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하였다.
이런 점에서 라지쿠마르는 특혜를 누리는 축에 들었다.
그것은 그의 특출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자격이었다.
그는 이른 나이에 제 분야에서 최고의 가능성을 드러낸 한 거장으로서 당당히 황태손과 교류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친분을 쌓을 기회까지 얻었다.
정작 라지쿠마르 자신은 그자에게서 넘지 못할 큰 벽을 발견하고 질투심에 눌렸지만, 사람들은 라지쿠마르를 부러워했다.
레이나는 제 또래의 모든 여자아이들이 그러하듯 황태손을 동경하는 팬이었다.
그녀는 라지쿠마르만큼 절정에 달한 거물은 아니었기에 그 훌륭한 위인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대할 은총을 얻지는 못했다.
그랬기에 늘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신문과 뉴스를 통해서, 인터넷과 영상을 통해서, 연설문과 소식통을 통해서.
라지쿠마르는 친구가 그 남자의 팬인 사실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은 별난 취미가 아닌,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니까.
종종 가까이서 보아온 알렉시스는 라지쿠마르가 생각하기에도 모두의 동경심을 독차지할 만한 걸출함을 넘치도록 보유하였다.
잘나고 능력 좋고 모든 면에서 원탑을 놓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인품도 반듯하고 부드러우며 사교성도 훌륭하다.
무엇보다 지나칠 정도로 빼어난 미남이지.
그러니 유명 가수나 탑배우 이상으로 대중의 팬심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얼마간 살펴보니 레이나가 그자의 팬이 된 이유는 전혀 다른 포인트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레이나는 원래도 연예인이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과학계의 위대한 거장들에 대해서도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객관적인 평가만을 보일뿐, 특정 개인을 향해 감정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특히나 단순히 잘생겼다는, 혹은 성격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연모할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가 알렉시스 벨레로폰 엘 죠셉 브류나크를, 차기 황제이자 언약 후계자로서 크라이스토브 브라이틀란트의 칭호를 소유한 그를 친애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위와 명예의 탁월함에 있지도 않았다.
설령 그가 평범한 시민이었어도 동일한 잣대로 동경했을 것이 분명했다.
돌이켜보건대 그녀는 황태손의 강직함과 뚜렷함에 반했던 것 같다.
정확히는 올바르고 흔들림 없는 그 고귀한 영혼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표현해야 옳으리라.
알렉시스는 그녀처럼 옳고 그름이 분명한 사람이었고 부드러우나 타협은 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호구처럼 양보하고 손해도 보았지만, 본질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명예와 위치는 물론 안전까지 기꺼이 내거는 사람이었다.
“너도 참 특이한 취향이다.”
라지쿠마르는 한결 같이 순전한 팬심을 유지하는 레이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보통 알렉 그 친구의 그런 면모는 안티를 생산해낼 건덕지가 있는, 그의 유일한 약점으로 여겨지는 데 말이지.”
만약 알렉시스가 보통의 위인들처럼 적당히 굽히고 수용할 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적당히 조상들의 정신적 유산도 지키고 그와 동시에 손해 보지 않을 선을 잘 지킬 줄 알았다면?
굳이 반대자들의 항변을 무릅쓰지 않고 이쪽과 저쪽 모두를 달랠 줄 알았다면?
모르긴 해도 지금보다도 훨씬 더 인기가 많았으리라.
아마 강직함으로 인한 손해를 완전히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장점과 매력이 많기에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겠지.
알렉시스는 확실히 적을 많이 둘 수밖에 없는 성격이었다.
그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였다.
또 종교적 견해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유하고 예의가 바랐으나 자신이 거짓 혹은 악이라고 판단한 요소들에 대해서는 정의의 직면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논리와 화술이 세계 제일의 수준이다보니 토론에서도 항상 모든 논객들과 전문가들을 가볍게 압도하였다.
그를 대적하는 가치관을 소유한 자들은 내면에서 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워낙 대중의 사랑과 인기를 독식하는 탓에 드러내놓고 대적하지 못할 뿐이었다.
아울러 알렉시스는 타 종교인들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존중은 최대한으로 정성스레 표현했으나 그 종교 자체에 대한 존중이나 인정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공적인 자리에서 승려들을 항상 ‘스님’이라는 칭호 대신 ‘아무개 씨’와 같이 이름으로 불렀고 이슬람의 이맘들이나 사제들이나 가톨릭 신부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로 대했다.
조금이라도 영적 의미가 담긴 행위들, 이를테면 이교도적 제의에 뿌리를 둔 관습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참여하지 않았다.
정치인이라면 적당히 그들을 달래기 위해 모양새만이라도 흉내내줄 수 있을텐데도 말이다.
더 나아가 과학자들과 학술적인 토론을 할 때는 항상 진화론과 그와 연루된 이론 전반을 부인하는 논지를 펼쳤다.
여기에 대항해 당대 최고의 석학들 중 무신론을 믿는 자들이 덤벼들었으나 황태손의 지략, 지식, 견문, 논리력에 옴싹달싹하지 못하고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멋있단 말이지.”
레이나는 그런 면모들에 더욱 매료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소개라도 해줄까?”
라지쿠마르는 친구가 안쓰러웠는지 몇 번 이렇게 반 농담으로 제안하였다.
하지만 레이나는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때 라지쿠마르는 친구의 그 팬심이 말 그대로 팬심에 불과하며 개인적인 친분을 향한 열정과는 다른 종류임을 깨달았다.
롤모델 같은 것일테지.
왜 그때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었을까?
라지쿠마르는 돌이켜보건대 그때의 자신이 레이나에게 평범한 친애 이상의 감정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회고하였다.
솔직하지 못한 데다가 감정과 관계라는 것에 서툴렀기에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으리라.
아마 그녀가 한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 남자를 향해 팬심을 쏟아붓는 모습을 보며 아주 미약하게나마 의식하는 마음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필 그 상대가 자신에게 영원히 넘지 못할 무한의 장벽을 알게 해준 남자라면 더욱더 그러했겠지.
그래도 당시의 둔감했던 라지쿠마르는 그저 레이나가 조금이라도 더 웃기를 바랐고 그녀에게 그 훌륭한 롤모델을 만날 기회를 준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레이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적인 불치병을 앓던 환우였고 당시로서는 기대 여명이 길지 않던 아이였다.
*
세월이 흘러 청년기에 접어든 라지쿠마르는 그 탁월한 성과와 능력을 인정 받아 특수 프로젝트 연구원으로서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자연히 레이나와 교류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대학원생 시절 혹은 조교수 시절에는 종종 공동으로 일들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으나 전쟁 때는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레이나와 라지쿠마르의 실력 차는 이미 제법 벌어진 상태였고 그녀는 비밀 프로젝트에 동참할 정도의 인재 축에는 못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종종 편지나 연락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챙겼다.
당시 레이나의 병세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으나 친구에게는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위기 가운데 있었고, 죽어가고 다치는 이들의 소식도 쇄도하는 마당에 그녀 혼자 불쌍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모두가 임박한 핵 사태를 두려워하며 공멸과 멸종을 무서워하는 시절에 그녀는 홀로 또 하나의 고민을 곱씹으며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자칫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그녀로서는 어쩌면 큰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당장 자신의 몸부터 내일의 빛을 볼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한편 그 시절, 라지쿠마르는 간접적이나마 전쟁의 사악한 악취를 맛 보며 고통 가운데 조금씩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는 철부지 아이의 때를 벗고 자라났다.
지식과 재주와 지능의 용량만 큰 떼쟁이가 아닌, 인생의 쓴 맛을 아는 하나의 어른으로 다듬어졌다.
이 과정에서 알렉시스를 향한 마음도 달라졌다.
엄밀히는 올바르게 자각했다고 해야 하리라.
지난 시절에는 그를 질투했었다.
인간의 재능을 천 개의 조각으로 분류한다고 했을 때 자신은 그 중 한 개의 조각만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천재라고 불리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그 한 조각에 대해서만 우월함을 지녔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그런 부류와는 달랐다.
천 개의 조각 전부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각각의 조각에 대해서도 가장 뛰어난 이보다 더 나았다.
라지쿠마르에게 주어진 한 조각에 대해서도 그를 능가했다.
그런 인간을 어찌 시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일반인 내지는 그저 그런 영재였다면 아예 포기하고 우러러보았겠지만 나름 정상급이라 불리던 그였기에 더욱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참전을 계기로 알렉시스라는 인간 속에 감춰진 고뇌와 슬픔을 알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과 성숙함,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훌륭함을 알게 되었다.
그를 향한 감정이 질투심인줄로 착각했건만, 결국은 그 감정의 정체를 직면하고야 말았다.
순수한 동경과 감탄.
처음부터 자신은 그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리가 보였다.
‘레이나, 네가 알렉을 왜 그렇게 바라보았는지, 이젠 조금 알 것 같네.’
라지쿠마르와 그의 동료들은 황태손이 내민 비장의 카드 곧 비밀 프로젝트를 받아들였고 사활을 걸고서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인류가 지금껏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도전들이 성사되었고 완전히 색다른 패러다임의 발명과 테크놀로지가 다수 도출되었다.
아울러 깨닫지 못했던 자연계의 여러 진리들도 발굴되었다.
그때의 드림 팀은 이날의 노력으로 얻어낸 여러 성과의 조각들을 각자 취하였고 훗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확장하여 인류를 위한 유익들을 창출해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헌신 덕에 커뮤니스트들의 ‘사상개변(思想改變)’ 프로젝트는 좌절되었다.
아울러 다른 지도자들과 장군들과 마스터들의 노력 덕에 핵 전쟁의 피해도 대거 축소되었으며 브리튼 내부의 문화적 붕괴 현상도 예방되었다.
많은 아픔이 따르긴 했으나 인류와 제국은 큰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레이나에게 주어진 결말은 그리 해피엔딩에 가까워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병세는 비가역적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라지쿠마르는 전쟁만 끝나면 그녀가 동경하던 멋진 그 친구를 직접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이를 지키지 못했다.
종전 선언이 이뤄지기 한 달 전, 그녀는 별세하였다.
친지들과 동기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죽는 그 순간, 잠 들 듯 평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녀와의 이별은 전역한 이후로 내내 라지쿠마르의 심장 속에 쉬이 지워지지 않는 슬픔과 아쉬움으로 남았다.
죽기 직전 마지막 편지에서 레이나는 친구에게 고백했다.
사실 자신이 연모를 품었던 상대는 너였노라고.
그녀는 그 감정을 끝까지 기다림의 감정 속에 묻어두었어야만 했으리라.
레이나와 라지쿠마르는 신앙관과 세계관에 있어서 깊은 간극이 있었으니까.
라지쿠마르의 가치관이 그녀와 같아지지 않는 한, 평생의 길을 동반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이 시한부임을 알았기에 철저히 마음을 숨겼으리라.
‘나는 끝끝내 네가 기대하던 사람은 되지 못하는 걸까?’
쓰라림을 뒤로 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마음을 달래기 위한 탐구와 배움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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