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88회 [2부] 9화. 테서렉틴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1.31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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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제국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평가가 엄격하다.
스테이트 이상 단위에 통치권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면허를 얻어야 한다.
오로지 AOPA에서만 그 권리를 평가해주며 면허를 허락해준다.
그리고 그 공정한 평가 과정에서 숱한 수련과 훈련과 실전 입증이 요구된다.
이 규율에는 황족이라 할지라도 예외 사항이 없다.
심지어 언약의 자동적인 승계자인 황태자조차도 이 법률을 따라야 한다.
테서렉틴도 직계 황족이긴 했으나 여느 최고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실력으로써 AOPA 학위를 취득했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거기에 더해 그는 여러 상위 클래스 지혜자들에게 직접 사사를 받았다.
열둘에게만 허락되는 마스터의 칭호를 가진 인물에게도.
그렇게 훈련받으며 스승들에게 인정을 받은 그이기에 그의 실력은 황족 여부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본인이 연마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올해까지는 테서렉틴도 수련자로서 계속 나라 다스리는 법을 보고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직접 자신에게 허락된 권역에 던져져 실전을 감당할 때였다.
도제식의 가르침으로는 다 전달되기 어려운 지혜를 직접 몸소 행동하고 체험하면서 터득할 차례였다.
젊은 청년은 이 기회를 감사하게 여김과 동시에 두려워하였다.
자신이 정말로 잘 해낼 수 있을까?
형님처럼 세계 그 자체를 움직이는 일까지 해낼 수는 없어도 최소한 맡은 권역에 대해서만큼은 슬기롭게 성정(聖政)을 펼쳐야 할 텐데.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못 버텨내면 나는 범부에 불과하다는 뜻이겠지.’
형 같은 위인을 도우려면 작은 시련과 시험 정도는 거뜬히 이겨내야 한다.
테서렉틴은 긍지 높은 브리튼의 황족답게 결연히 마음을 굳게 다스렸다.
마침 12월 달에 그는 모든 인계 작업을 마쳤다.
내년부터는 그도 그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정무에 뛰어들 예정이었다.
더는 양첸 옹 같은 선견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홀로서기를 해내야 한다.
게다가 셋째 형 펠렌드로크 같은 행정 재상직도 아닌, 일종의 총독으로서 해당 지역의 문제들을 책임져야 하니 심적 부담도 막대했다.
더욱이 그 지역이 워낙 볼모지로 악명이 높았기에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친께서는 어찌하여 자신에게 초반부터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신단 말인가.
아무리 아들들을 강하게 키우는 황가라도 그렇지.
막상 자신의 일로 닥치니 그 무게가 실로 버거웠다.
“하지만 네 형은 스무살에 군인으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총독 일을 거뜬히 해냈단다. 그것도 전란이 한창인 곳, 커뮤니스트 연방과 인접한 지역에서 말이다.”
아버지께서 증언하시는 말을 듣고 보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 테서렉틴의 상급자가 될 최고 레벨 통치자는 제라드 전 장군이었다.
황실에서도 명망이 높은 훌륭한 지도자이자 일곱 전쟁 영웅 중 하나로 브리튼에서는 세 살배기도 알아보는 대단한 명장 겸 명군이었다.
한 때는 알렉시스 황태자의 군 내 상관이기도 했던 자로 이제는 군인이 아닌 정치가로서 테서렉틴의 상관이 되었다.
군기가 바짝 든 테서렉틴은 그와 화상 회의를 하며 모든 분부를 마음에 새겨넣었다.
“인계를 잘 받은 모양이군. 사전 조사와 준비도 훌륭히 해두었고. 그래, 마음의 준비는 좀 되었나, 테서렉틴 군?”
“아직은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연단하는 편이 좋을걸세.”
제라드는 그간 일본 지역에 머무르고 있다가 올해부터 중국 본토로 정식 파견될 예정이었다.
동부 컨티넌트 전반에 대해 관리할 지도자 겸 알렉시스 황태자의 부관으로서.
테서렉틴에게 할당된 지역도 극동아시아에 속한 곳이니 제라드의 관할권 아래에 속했다.
“훌륭하신 아버지께 누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혈기를 앞세우거나 긴장하진 말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그저 작은 책무에서부터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게나. 의외로 그 기본적인 것에 불성실한 이들도 많다네. AOPA 수석 졸업생이라니 기대해보겠네.”
“공부와 실전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기는 하네만, AOPA 시스템의 평가가 크게 어긋났던 적도 없어서 말이지.”
제라드는 그 외에도 중요한 몇 가지 당부를 테서렉틴에게 분부했다.
테서렉틴은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을 넘어 직접 상관과 토의하며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정립해나갔다.
슬기로운 청년의 혜안을 엿본 제라드는 걱정을 조금은 접어두어도 되겠다고 여기며 한 시름을 놓았다.
‘평생 노력해도 제 형님한테는 터무니없이 못 미치겠지만, 충분히 경험만 쌓으면 마스터들 레벨에는 도달할 수 있는 인재라더니, 양첸의 평가가 꽤 그럴 듯하군.’
다만 문제는 테서렉틴에게 맡겨진 미션의 난이도였다.
그 지역이 워낙에 골치아픈 부분을 많이 지닌 곳인 게 흠이었다.
많은 인구나 강한 국력으로 인해 지도자의 책무가 무거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테서렉틴의 파견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취약한 곳 중 하나였다.
너무도 약하고 밑바닥인 나머지 성과를 딱히 기대하기 힘든 곳이었다.
보통의 지도자가 보내졌더라면 차라리 이것이 부담의 감소로 여겨졌으리라.
아무도 그 볼모지에서 무언가가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도전자가 황족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래도 브리튼의 언약을 나눠받은 인재라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기대가 은연 중에 사람들 가운데 생길 테니까.
테서렉틴에게는 매우 험난한 시험이 될 수 있었다.
“한반도는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결코 가벼운 짐이 아니라네. 자네에게는 아직 한반도의 남부 3분의 1만큼만 할당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앞이 막막하게 느껴질 걸세.”
“이미 그 부분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테서렉틴은 세 달 전부터 그가 향하게 될 그 땅을 직접 조사해왔다.
그리고 그곳의 역사와 현재 또한 철두철미하게 공부해두었다.
과연 제라드의 말대로 한반도라는 극동 지역의 작은 땅은 넓이와는 달리 범부가 감히 짊어질 가벼운 짐이 결코 아니었다.
‘수천 년간 그곳은 세계의 권세들이 교차하는 교차로이자 다리였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강력한 세력 사이에 끼여 각축장이 되었던 그곳.
중동에는 이스라엘이 있었다면 동아시아에는 한반도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십 차례도 넘게 막강한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정작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침략해보지 못했던 민족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언뜻 보면 한없이 연약해보이나 그토록 짓밟히고 괴롭힘을 당하고도 꿋꿋이 생존해왔다는 점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잡초 이상으로 질긴 존재들이었다.
‘비참함도 이런 비참함이 있을 수 있을까?’
근대사 속에서 가장 최근까지 한반도에 남아있었던 독립국은 조선이라는 이름의 나라였다.
허나 조선은 시대를 분간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계몽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들의 뿌리를 이루던 사상은 유학(儒學)이었으나 그것은 실상 실리가 없는 무의미한 탁상공론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다.
나라는 그 결과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쇠락하였고 개개인의 존엄성은 존중되지 못한 채 소수의 수탈자들에 의해 짓밟혔다.
국민 절반 이상이 ‘노비’라는 이름의 노예 신세였던 비참한 나라.
하다못해 세계 1차 대전 때 브리튼에게 징계받고 소멸한 유럽의 열강들조차 타국의 식민지를 수탈하여 지배했을 뿐, 자국민을 노예로 삼지는 않았다.
조선은 그 놀랍도록 가관인 일을 자행하였던 나라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테서렉틴은 그 가련한 민족에게 학을 떼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기이하게도 이유를 모를 동정과 긍휼에 기울었다.
그들을 비천하게 여겨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에 가까운 이유에서 그들을 향한 진심어린 연민이 샘솟았다.
‘이들은 이토록 영적인 억눌림과 어둠 가운데 눌려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그 천성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한반도의 역사를 깊게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테서렉틴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유서 깊은 민족의 정서적 뿌리에는 ‘하늘을 경외하는 사상’과 ‘인간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항상 녹아 있었음을.
기묘한 일이었다.
이 둘이야말로 사실 성경의 하나님이 계시하신 인륜의 본질이 아니었던가.
물론 고조선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상 숭배에 오랜 세월 눌려왔었다.
마음 속 깊숙이는 신을 향한 어떤 갈망이 있었고 심령 속의 빈 자리를 채울 생명수를 갈구하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그 원래의 주인을 깨닫지는 못했다.
만일 일찍이 그들에게 선교사들이 나아갔다면 그들이야말로 열린 마음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상황이 많이 나아진 편이지.’
커뮤니스트 연방으로부터의 해방 이후로는 전 세계에 어느 정도 편만히 복음이 전해졌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파생된 부산물인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 또한 재조명하는 데 이르렀다.
한반도도 분명 그 흐름의 은택을 받긴 했다.
하지만 충분히 많이 받지는 못했다.
이는 근대사의 온갖 비극들이 한반도라는 땅을 낙심과 회생불가의 아픔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은총이 다다랐으면 좋았을 것을.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다.
‘만약에 크리스토프 대제와 같은 인물이 한반도에서 나왔더라면 그들은 이 끔찍한 일련의 비극들을 겪지 않았을까?’
테서렉틴은 감히 자신들이 그들보다 나았으리라고 자부할 수 없었다.
만일 브리튼의 원류 민족이 한반도와 같은 어두운 지정학적 상황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쯤 비극적인 나락에 주저앉은 자들은 테서렉틴의 조국이었으리라.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한반도에 주어졌더라면 그들이 지금쯤 브리튼 제국처럼 찬란한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역사에 가정법이란 무의미한 법이다.
근대사의 비극들은 다른 모든 땅들보다 한반도를 더 비참하게 가격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왕정은 극도로 타락하였고 민생은 나락을 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시기 일본은 강한 힘을 얻어 급부상하였고 세계의 패권국이 되었다.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수십 년을 수탈되었다.
만일 거기서 그쳤더라면 좋았으려니와, 역사의 수레바퀴는 냉혹했다.
일본이 세계 2차 대전에서 패배하여 브리튼령으로 정복된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는 브리튼이 아닌 커뮤니스트 연방에 송두리째 점령당했다.
이것은 두 번의 비극 위에 더해진 세 번째 비극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를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땅으로 만들었다.
그곳의 실상을 보았던 이들은 하나같이 인세지옥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곳에 적합한 표현이라고 증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네 번째 비극은 세계 3차 대전이었다.
브리튼 제국과 커뮤니스트 연방의 전면전 때 여러 땅들이 훼손되었지만, 한반도는 그중에서도 힘과 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폭풍의 중심이 되었다.
적어도 태평양쪽 전선에서는 한반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곳이 없었다.
커뮤니스트 연방은 브리튼 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심지어 한반도 북부에 수소폭탄 수십 발로 핵샤워를 시키기까지 했다.
전쟁은 브리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으나 한반도는 폐허로 남겨졌다.
북부의 소생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남부에서도 상당수의 주민들이 중국 지역이나 일본 지역으로 이민하였다.
테서렉틴이 파견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지역으로 남겨졌다.
‘어떻게 그런 곳에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
바로 그때 테디는 자신도 모르게 욥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난 위에 수난을 받고 나락 중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한 인물.
욥이라는 인생은 그보다도 더 기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던 삶이었다.
재물도, 가족도, 친구도, 건강도, 그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신마저도 자신을 버린 것처럼 느껴지던 암흑의 삶.
바로 그 재와 티끌 위에 주저앉았던 욥의 모습이 지금의 한반도가 아닐까?
“테디.”
문득 어린 시절 자신을 친절히 불러준 형님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나는 네가 다음 세대의 희망이 되어주었으면 해.”
형님은 자신을 두고 항상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그것은 비록 부담스러운 칭호였으나 알렉시스는 결코 누군가를 허투루 아첨하는 일이 없었다.
“지금의 세상을 이끄는 일이야 내 책무일 수 있겠지. 하지만 나도 영원히 살지는 못해. 브리튼도 그렇겠지. 신 앞에서 우리 모두는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니까.”
브리튼이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을 하던 형님의 표정은 대단히 슬퍼보였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진리를 애써 외면하는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늘 테서렉틴을 볼 때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허나 흙은 땅에 떨어져 새로운 식물을 싹 틔울 비료가 되지. 우리는 사라질지라도 다음 세대에는 소망이 끊겨서는 안 돼.”
야곱의 식구들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했던 당대의 주인공은 요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을 위한, 더 궁극적이고 완전한 미래의 소망을 낳을 열쇠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다였다.
도덕적으로나 지혜로나 완전무결했던 요셉이 아닌, 불완전한 유다.
“네가 브리튼 이후의 세상을 위한 희망의 열쇠가 되어주렴.”
그의 목소리를 기억해낸 테서렉틴은 단단히 마음을 굳혔다.
“해보자.”
욥과 같이 몰락한 비참한 모습의 한반도, 비극이 휘몰아친 폐허의 땅.
그러나 바로 그 험난한 고난으로 인해 그들은 다른 이들을 살려낼 열쇠가 될 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아픔을 깊이 알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힘이 될 수도 있다.
이성적이지 못한 희망사항에 불과할지는 모르나, 왜인지 모르게 무익하게나마 기대를 걸고픈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테서렉틴 자신의 마음인지 신이 주신 마음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믿고서 나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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