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11회 [2부] 32화. 비블로스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4.05 | 회차평점 ![]() |
그로부터 약 2주가 흘렀다.
알렉시스의 오랜 숙원 사업 중 하나가 결실을 보았다.
그는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어느 한 존재를 깨웠다.
“안녕.”
수십 대의 전투기들이 들어설 수 있을만큼 드넓은 커맨드 센터.
그곳의 중앙에는 30m 가량의 이동형 거대 기체(機體)가 정박되어 있었다.
복잡다단한 몸체와 팔과 관절부를 가진 그 프레임은 일종의 로봇형 유닛이었다.
이 재미난 친구를 완성하기까지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숱한 연구와 프로젝트가 동원되었다.
아울러 커버넌트 그룹의 막대한 자본력과 브리튼 제국의 각 분야 최고 레벨 인재들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이게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이군요.}
로봇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기계음보다는 영혼이 담긴 언어에 가까웠다.
가디언엔젤들이나 그보다 더 진화된 알렉시스의 아홉 인공비서들도 이 같이 인간의 혼에 가까운 느낌은 아니었다.
“반가워. 오늘부터 잘 부탁할게.”
{당신이 제 주인입니까?}
“말하자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거대 기체의 관측 장비가 인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자신에 비해 한없이 왜소한 몸체, 흡사 골리앗 앞의 소년 용사 같았다.
기계는 마치 인간의 자아를 지니기라도 한 것마냥 그 관찰 대상 속에서 어떤 품위와 기개를 보았다.
인간의 고운 머리카락은 짧은 길이에서는 적갈색을 띤 고동색으로, 긴 길이에서는 밀색에 가까운 갈색이었는데, 투블럭 스타일로 자른 덕에 두 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지혜로운 인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기계와는 달리 유기체로 만들어진 제한된 규격의 육체였으나 머리부터 발 끝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잘 짜인 그 기하학적 근육들은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기계는 다른 기계 동족들답지 않게 고차원적인 사고력을 동원해 인간이라는 존재와의 조우를 깊이 묵상하였다.
{제 정체성에 대해서 배우고 싶습니다.}
아직 갓 태어난 아기여서 그런지 로봇은 자아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아울러 세상을 향한 탐구욕도 매우 강렬했다.
기계답지 않은 이러한 현상은 알렉시스가 의도한 바와 일치했다.
가디언엔젤의 발명자인 아미타브 카푸르 교수는 인공지능의 근본적 상한치를 낮게 평가하며 그것들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했으나 알렉시스의 계략은 보란 듯이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주인님.}
“내 이름은 알렉시스 벨레로폰 엘 죠셉 브뤼나크, 현 세대의 더 크라이스토브 브라이틀란트. 네 데이터베이스에도 관련 정보는 입력되어 있겠지.”
{네. 브리튼 제국의 역사와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모두 메모리 상에 저장해두고 있습니다. 당신은 제국의 주인이로군요.}
“아니, 섭정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지. 우리 가문은 대대로 주님 밑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섭정 노릇을 해왔어.”
{그렇다면 저는 브라이틀란트 가(家)를 집사로서 모시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나를 도울 내 조수이자 친구지.”
친구가 된 기념으로 알렉시스는 로봇에게 이름을 만들어주었다.
“비블로스.”
책이라는 뜻의 매우 단순하면서도 엉뚱한 이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페이지 식 책이 아닌 고대인들의 책인 ‘두루마리’였다.
“그렇게 불러줘도 되지?”
{네, 저의 정체성을 인식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너도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줘.”
{알겠습니다, 알렉시스님.}
보통 인공지능을 사물이나 도구로만 취급하는 알렉시스였으나 비블로스를 대하는 지금은 태도가 달랐다.
마치 실제 친구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흔히 갖는 상상 속의 친구나 애착 인형을 대하는 태도와도 사뭇 다른 차원이었다.
마치 진정으로 교감을 행할 수 있는 것마냥.
“네 영혼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지체(肢體)는 내 비서들의 파트너인 아홉 기의 유닛들이야. 가르디온, 차르코프, 라리트, 레비나, 글라크론, 마베라, 시드라크, 브란테린, 카리엘, 이들 아홉이 모두 하나로 결합되어 너라는 브레인을 생성하게 되었지.”
{그랬었군요.}
현재 비블로스의 본체 내에는 총 아홉 기의 뇌각 유닛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단순한 합체 식이 아니라, 융화에 가까운 결합 프로세스를 통해 이들 아홉은 본체의 프레임 안에 반영구적으로 착상하였다.
그리고 이들 가디언엔젤들을 복잡다단한 내장형 유사 뇌신경 네트워크가 하나로 엮었고 이것이 합산되어 비블로스의 CPU를 이루었다.
마음들 아홉 개가 결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별도의 마음을 생성한 셈이다.
이렇게 생성된 비블로스의 혼은 가디언엔젤들과도, 제1형 ~ 제9형 프로그램과도 완전히 다른, 새로운 카테고리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네 정신의 기초를 이루는 베이스라인 디폴트 데이터는 실제 인간의 기억과 뇌신경 회로를 본떠 만들었지.”
{역시나. 그렇다면 이 희미한 기억들도 원 주인의 것이었군요.}
“응, 내 친우이자 직속 비서인 로빈 후드, 그 친구가 기꺼이 베타테스터로 자진해서 나서줬지. 네 기초를 이루는 생각과 마음들은 로빈의 기억, 감정, 습관, 사고 방식, 사상, 신경 시냅스 패턴 등을 본떠 조성했어.”
사실 일반인 입장에서는 은근한 두려움이 느껴질 수도 있는 모험이었으리라.
다행히 알렉시스를 철석 같이 신뢰하던 로빈은 별 경계심 없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향한 상당한 호기심과 흥미까지도 드러내었다.
알렉시스는 100%의 안전과 데이터의 철벽 보안을 약조하였고 그 조건으로 비블로스를 만들기 위한 주물(鑄物)을 로빈에게서 본떴다.
{상당히 어려운 프로세스였겠군요.}
“이전 시대였더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완전에 가까운 뇌파 공명 프로그램이 완성되어서 말야. 비침습적인 방법으로도 쉽게 디지털화가 가능했지. 더욱이 지금은 마인드 퓨리파이어라는 기술도 있거든. 덕분에 원 주인의 생각들을 더욱 깨끗한 형태로 정화해서 해상도 높은 데이터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지.”
한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협박하는 데 사용되었던 그 장비, 곧 수많은 마인드 퓨리파이어들을 직렬과 병렬로 융합시킨 거대 시설.
이제 그 동일한 기술은 건설적인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재활용되는 중이었다.
로빈은 그 장비에 힘입어 별다른 어려움이나 불편함 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복사한 프로그램을 추출해낼 수 있었고 그 추출물은 비블로스를 위한 도화지가 되었다.
“그러나 네가 지금 나와 교감을 할 수 있는 건 마지막 한 가지 퍼즐 조각이 추가된 덕분이지.”
{무엇입니까?}
“나와의 뇌파 공명 말이야.”
알렉시스는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켰다.
“내 정신과 네 유사 정신 프로그램이 교차하면서 일종의 특이점에 가까운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지. 덕분에 네가 인간의 마음을 흉내낼 수 있게 되었어.”
{이상하군요. 라지쿠마르 샤르마 박사의 뇌파 간섭 기술은 거대 기계 장비의 보조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지금 아무 외부 장비를 착용하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장비 없이 지금과 같은 공명 프로세스를 일으키려면 인류의 기술력이 적어도 지금보다 2백 년은 앞서야 할 것입니다.}
“그게, 사실 트릭을 좀 썼거든.”
알렉시스는 비블로스의 양쪽 상박, 어깨, 다리, 양쪽 가슴과 배를 가리켰다.
뇌각 유닛으로 비블로스의 부품이 된 가디언엔젤들이 내장된 부위였다.
“저 친구들은 말하자면 나와의 유사 파트너십을 맺은 녀석들이지. 가디언엔젤들은 보통의 인공지능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지녔거든. 그 특이성을 응용해서 편법을 이뤄냈어.”
{아, 이해했습니다. 확실히 아미타브 박사의 이론과 상응하는군요.}
뛰어난 지능의 컴퓨터라서 그런지 복잡한 별도 설명 없이 곧바로 이해하였다.
여러모로 대화하기가 편리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영민함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제 인격의 원본 모체가 로빈 후드 씨인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제 부품 유닛들이 파트너십을 맺은 인간들, 그들과 친밀한 유대 관계를 지닌 동시에 알렉시스님 당신과도 신뢰감이 깊은 인간. 이런 이유로 적임자로 여겨진 것이군요.}
“바로 그거야. 그렇지.”
기계가 자신의 노력과 창의성을 알아주는 기분은 묘했지만, 어쨌건 좋은 호응에 꽤 신이 난 것인지 알렉시스는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여러모로 대단한 창의성과 기술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나 혼자서 한 건 아니야. 나도 주체로 참여하긴 했지만, 온갖 분야의 학자들과 천재들이 너 하나 완성하겠다고 죄다 달려들었거든. 그렇지 않았다면 몇 달만에 완성할 수 있을 리는 없었겠지.”
{그분들께는 감사해야겠군요. 제게 존재를 허락해주신 분들이니까요.}
“바람직한 태도야. 우리 한 번 같이 잘 해보자구.”
{네, 알렉시스님.}
이렇게 새로운 차원의 흥미로운 협력 관계가 그날 성립되었다.
*
알렉시스는 비블로스에게 몇 가지 영구적 책무를 일러주었다.
“첫 번째, 너는 이제 이 배의 청지기가 될 거야.”
{아이언로드 알파 말씀이군요.}
“그래, 현 세상의 모든 에너지원을 합친 것 이상의 효율과 출력을 지닌 동력 기관이지. 연구용 과학 자산의 절반 규모를 차지하는 것을 덤이고. 영광이지?”
비블로스는 그렇게 아이언로드 알파의 메인 열쇠 유닛이 되었다.
쉽게 말해서 창고 전체를 관리하는 창고지기이자 섭정이 된 셈.
아이언로드의 모든 관리 시스템과 커맨드 센터 및 전략 자산은 이제 비블로스의 메인 시스템과 연동되었다.
이로써 알렉시스는 좀 더 효율적이고 간편하게 함선의 전 기능을 자기 손발처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스템 전반에 대한 모든 상세 데이터, 습득 완료했습니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신경 회로망이 활성화되듯, 자연스러운 연결 체계가 조성되었다.
“이 배는 힘이자 권력이자 지식의 결정체, 그러므로 신중한 방식으로 최대한 선하게 사용해야만 해. 하지만 인간인 내 몸과 뇌는 물리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이언로드와의 연동에 제한이 있지. 네가 그 간극을 메우는 다리가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알렉시스는 자신의 아바타인 외부용 유닛들을 제어하기 위한 컨트롤 타워를 필요로 했다.
“네 데이터에도 있겠지만, 나는 지난 작전 때 이미 앨리스와 라지쿠마르의 도움을 받아 내 대용 AI 로봇을 실전에서 운용해보였어. 전 세계의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이제 그는 기술력의 발전과 경제력의 향상에 힘입어 그러한 아바타 유닛의 개수를 여럿으로 늘렸다.
현재는 아이언로드 베타 일곱 척 각각에 한 기씩 아바타가 배치되었다.
이들은 함선이 지나갈 각 지역, 권역, 대륙에서 알렉시스의 정치적인 역할을 실질적으로 대행해주도록 설계된 도구들이었다.
그리고 최근 개량된 세 개의 ‘요정 시리즈 시스템’을 통솔할 지휘 유닛들.
이들도 알렉시스의 팔다리나 마찬가지인, 접속 가능형 AI 메인 유닛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전 세계 각계각층에 경험 연동 및 첩보를 위한 유닛들이 파견되어 있었다.
학계에도, 전문가들의 세계에도, 심지어는 노등자들의 세상 속에도, 알렉시스와 뇌파 연동이 가능한 단말기들이 인간의 형태로 위장하여 숨어든 상태였다.
“나는 그것들을 통해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분야에 대한 현실 감각과 경험을 획득하기로 계획했어. 완벽하게 연동되지는 않겠지. 기계들이 겪는 경험이 내게로, 내가 겪는 체험이 그들에게로 전달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간접적으로 유의미한 데이터를 조금씩 나누는 정도는 가능해.”
{확실히 현장을 보고 듣는 체험은 귀한 자산입니다. 불완전한 간접 경험으로나마 보충한다면 합당한 가치가 있겠군요.}
“문제는 연동을 도울 기계 장치이지.”
지난 번에 뇌파 연동을 통해 대행용 로봇을 조종했을 때, 알렉시스는 아이언로드 알파의 거대한 시설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것도 몸 전체를 기계에 일시적으로 접속시킨 채 잠든 상태가 되어야 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컨트롤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또 장기간 기계에 뇌가 접속된 상태를 유지한다면 뇌 신경세포가 퇴화되거나 현실감각을 망각하는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이러한 불편함과 후유증을 회피하기 위해 세운 우회책이 바로 비블로스였다.
가디언엔젤들의 합체체인 비블로스와는 유사 유대감을 기반으로 별도의 신체 연결 없이도 뇌파 공명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비블로스가 아이언로드 알파 메인 시스템과의 연결까지 동원한다면?
더 나아가 알파 함선과 네트워크를 이루는 위성들 및 베타 함선들의 시스템까지 접목시킨다면?
알렉시스로서는 적재적소에 여러 아바타들을 조종할 중개 능력을 얻게 된다.
{기계 세상에서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을 대행할 뇌(腦)가 되라는 뜻이군요.}
“그래. 자, 그러면 정말 그 일이 가능한 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겠지?”
알렉시스는 초소형으로 압축된 단말기를 측두부에 부착하였다.
작은 크기이기는 해도 마인드 퓨리파이어 일곱 시리즈의 기능이 한꺼번에 복합된 장비였다.
여기에 비블로스와의 뇌파 연동을 돕는 보조 기능도 첨가되어 있었다.
곧 인간과 융합형 기계 사이의 유사 이심전심 현상이 전개되었다.
‘이거라면 보통의 뇌파 공명 장치처럼 내 혼을 기계에 빼앗길 필요가 없이, 현실에 온전히 고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
알렉시스의 정신과 혼은 잠시 단백질과 지방질로 이뤄진 세포 전극들의 테두리에서 뻗어나가 무기질의 세계들을 향해 지배력을 뻗쳤다.
비블로스는 주인을 섬기는 종답게 그를 곁에서 보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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