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32회 [2부] 53화. 문명 건설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5.28 | 회차평점 ![]() |
평온의 때인 올해 6월, 왕이 예비한 ‘문명의 대격변’은 이미 가동되었다.
그것은 폭죽처럼 요란스럽게 빛을 발하지는 않았으나 효모가 빵을 부풀게 하듯 은밀하면서도 정밀하게 인간 문명 전역에 침투하였다.
알렉시스가 펼치는 계획들이란 보통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되곤 했다.
이터널 클렌징 같은 극단적인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예외적인 반례이지, 보통 그의 방식은 이렇듯 순조롭고 부드러운 순풍과도 같았다.
문명 혁신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쓰긴 했으나 사실 ‘뒤집는다’는 의미의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독창적인 개념의 신도시 개발에 가깝다고 해야 하려나.
지극히 건설적인 개념이다.
원래라면 상식적인 선의 사고력 내에서는 현실화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다만, 이미 5차까지 완결된 산업 혁명의 누적된 업적들과 알렉시스 휘하의 최고 카드들인 전설의 일곱 과학기술 팀이 더해지자 불가능이 현실로 바뀌었다.
“놀라운 일이로군.
그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를 그새 현실의 궤적 속으로 끌어당길 줄이야.”
노년의 나이에도 몸이 꼿꼿하고 곧바른 체형을 지닌 양첸 옹, 그는 새로이 창조되어 잎사귀가 여물기 시작한 문명의 터전들이 자아내는 풍경을 구경하며 경탄을 아낌없이 드러내었다.
“그대의 감상은 어떻습니까.”
“저야 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어서 놀랍지는 않군요.”
50대에서 60대 사이의 외양인 다른 한 사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양첸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마술사요 질서 건설의 예술가인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이스마일.
두 사람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마스터의 칭호 이외에도 그들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조국을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훌륭하게 일구었던 업적이 있었다.
아울러 둘 모두 황태자의 선생이었다.
양첸은 유년기의 알렉시스를, 무스타파는 십대 초반의 아이 시절의 알렉시스를 가르친 적 있었다.
“왕께서 이런 류의 창조적 업적에 워낙 능숙하신 분이라 말이죠.
그는 원래부터 무언가를 뽑아내고 부수고 진멸하는 일보다는 세우고 짓고 고치고 완성하는 일에 소질이 풍부했습니다.”
정치적 기술과 요령들을 가르쳤던 양첸과 달리 무스타파는 문명에 대한 기초 개념들을 전수해준, 왕자의 또다른 중요한 스승이었다.
물론 주로 가르쳐 준 것은 잔머리 쓰는 전술들이긴 했고 정말로 중요한 요소들은 대부분 왕자 스스로가 독학하긴 했었다만, 그래도 도움이 안 되지는 않았으리라.
양첸과 달리 무스타파는 십대 초반의 알렉시스와 인연이 있었기에 십대 후반의 그의 행적도 종종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왕께서는 동료들에게서 창조성을 이끌어내는 재주가 탁월했죠.”
“허, 동료들이라면?”
“말하자면 지금 날고 기는 세계 각지의 재주꾼들 말입니다.
중앙부터 지역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는 과학자들, 수학자들, 공학자들, 그리고 의사들과 건축가들과 예술가들과 창작가들과 언론인들과 교육자들까지, 그중 최고 레벨의 인재들은 최소 한 번 이상 그분과 교류했었던 이들이죠.”
“흠, 생각해보니 의회들의 의원들과 각지의 총독들부터 행정부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정계에 몸 담은 젊은 친구들 중에도 그의 사람들이 꽤 많군요.”
양첸은 머릿속으로 현재 잘 나가는 주요 관료들과 의원들의 명부를 되짚어보았다.
가장 성과가 뛰어나고 명성이 탁월하며 국민들에게 인정을 많이 받는 이들을 순서대로 꼽아보니 하나같이 알렉시스와 인연이 있는 이들뿐이었다.
“아무래도 보석을 미리 알아보고 짚어내는 재능이 비상한 모양이죠.”
“그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왕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재능을 개화시키는 각성제로서의 재주를 지녔습니다.”
무스타파는 어린 시절 알렉시스의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내었다.
어떤 학위나 학교든 단기간에 숙달하고 졸업했던 그는 온갖 종류의 천재 클럽을 전전하며 도장깨기를 실현해왔다.
과학자들의 무리에도, 철학자들의 무리에도, 심지어 예술가들의 무리에도 불쑥 불쑥 침투하여 그들의 친구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그 집단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영향을 받는 반경에 이르기까지 일대 혁신이 일었다.
“그는 동갑내기 아이들과 선배들과 후배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타락시켰습니다.”
“타락?”
“흠,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아이들을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비가역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해야 할까요.”
“모범생들이 날라리가 되도록 바람이라도 불어넣었단 말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천재들로 하여금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게 하였죠.”
적어도 자신들의 달란트에 있어서는 최고라 자부하던 인간들, 그런 고집 센 아이들의 우물 속 세상의 경계가 처절하게 부서지는 일들이 숱하게 발생했다.
아이들은 곧 깨달았다.
세상에는 ‘천재’라는 카테고리로 규정하지 못하는 미스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갖 분야의 전설적인 실력가들이 온화하게 웃는 그의 앞에서 박살났죠.
그러니까 인격적인 손상 말고, 자긍심 면에서 말이죠.
도무지 그의 이해력과 상상력과 창조성을 흉내낼 수 없었답니다.”
“저런! 딱하기도 하구려.”
“불쌍하죠.
아마도 범인(凡人)들은 이해하지 못할 고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건설적인 결과를 낳았죠.”
알렉시스가 헤집어놓은 천재 클럽들과 학교들마다 일대 혁명의 바람이 불었는데 그것은 전대미문의 수준의 실력 향상과 창조성 혁신으로 빚어졌다.
오만했던 아이들의 우물이 깨어지고 개구리들은 넓은 세상 속으로 내던져졌고 그들은 열광적으로 자신의 혼을 깎아가며 새로운 격의 존재로 각성하였다.
아마 왕에게 제대로 깨진 뒤 와신상담을 했으리라.
“그리고 그 열정적인 자기 단련의 풍조는 주변으로 확산되었죠.
그 결과는 나비 효과가 되어 문명의 각성이 이뤄지기에 이르렀죠.
천재들은 물론이고 그 밑의 영재들이나 보통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실력 향상을 넘어 자신의 진정한 힘을 개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기 혁명’을 이뤄냈습니다.”
“흡사 ‘마인드 퓨리파이어’의 효과와도 비슷하군요.”
“아마 왕께서는 나스루딘 박사의 마인드 퓨리파이어를 지금의 방향으로 개량할 때 자신의 이런 경험들을 모티브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된통 당해본 아이들도 참 이상하군요.
청년 세대가 된 지금, 도리어 그들이 가장 열심히 황태자 밑에서 부역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양첸은 인간이란 참 못 말리는 존재라고 탄식하며 혀를 끌끌 찼다.
“가장 거대한 인생의 산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된 셈이죠.
어차피 그 어떤 분야에서도 왕의 재능을 능가하는 일은 불가능하니, 오히려 그가 필요로 하는 유용한 인재가 되어 그에게 인정받는 것, 그런 방식으로서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것은 아닐까 사료됩니다.”
“피곤한 삶들이군요, 허허, 우리처럼 평범하게 살다 은퇴하는 것이 좋건만.”
양첸은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여놓았다.
“하긴 요즘 밀레니엄-제타 세대는 좀 특이하죠.
아무래도 전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세대라서 그런지.”
두 노인이 거니는 이 지대는 원래 아늑한 촌락 지대였다.
인적이 매우 드문 시골로 자연계의 모습이 온존되어 있던, 야생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발길이 적게 닿았던 이곳이 최근 몇 달 사이에 사람 사는 향기가 나는 땅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대규모 문명의 영향력이나 소위 ‘규모의 경제’나 위대한 리바이어던의 능력에 힘입는 것이 아닌,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해보이는 작은 이들의 힘을 통해서.
“이제 정말로 그 프로젝트가 실현되는군요.”
“고도화된 AI의 능력을 이런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응용할 줄이야.”
“일반적인 문명화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태죠.”
“그러게 말입니다.”
알렉시스에게서 처음 이 계략을 들었을 때, 열두 마스터 모두가 까무러치게 놀란 이유는 기술력의 탁월함이나 혁신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경악한 요점은 바로 기술 활용의 방향성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모름지기 문명이란 고도화될수록 도시화되고 밀집되기 마련이다.
바로 그 배경에서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생성되며 강력한 규모의 경제와 권력이 만들어진다.
브리튼은 그렇게 일구어진 힘들을 계승받은 세계의 왕좌였다.
첨단 기술과 산업 혁명의 산물들과 극대화된 AI 능력 역시 그냥 내버려두면 고유의 관성력에 힘입어 문명의 밀집화를 더욱 가속화했으리라.
사람들은 점점 고도로 통제되는 기계화의 숲에 던져질 것이며 그들이 거니는 시공간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의 시스템에 놓였으리라.
AI가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고는 하나 실상 인간들이 AI들의 힘에 취하여 종속되고 예속되는, 보이지 않는 사슬의 세계.
아마 미래의 도시란 그런 모양으로 진화했을 것이 분명하다.
알렉시스는 바로 이것이 ‘바벨 시티’의 모습을 계승하는 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인류 최초의 도시 건설자가 바로 살인자 카인이며, 인류 최초의 세계적 도시가 바로 ‘혼돈(바벨)’이라는 이름을 담지한 암흑탑(Dark tower)임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브리튼의 차기 황제로서 세계 전체를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영구적으로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도시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합시다.”
그의 제안은 인위적인 ‘지역균등개발’ 같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사회주의적 접근법과도 완전히 달랐고, 반대로 인간 본연의 탐욕적 관성에 문명의 진화를 내어 맡기는 자유주의적 방임과도 달랐다.
알렉시스의 아이디어는 심히 충격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성과 이치에서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시대를 앞서나간 지혜를 매우 독창적인 방법으로 응용했을 뿐.
마스터들은 결국 그의 이 획기적인 책략에 반강제적으로 굴복하였다.
딱히 알렉시스가 강압적으로 동조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흠을 찾아보기 힘든 치밀한 전략성에 본의 아니게 마음과 생각이 굴복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협력하고 승인했건만, 아니나다를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노인은 수풀이 우거진 맑은 물의 폭포 계곡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을 불러들인 왕의 좌표가 뜻하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런 곳에는 어인 일이신지?”
양첸은 어처구니 없어 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폭포물을 맞으며 상체를 반듯이 편 한 청년은 홀로 묵상에 잠겨있던 중 상대의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정신 수양이라도 하고 있던 것일까.
“어서 오세요, 선생님들.”
알렉시스는 상의 탈의 상태로 훈련복 바지만 입은 채 쏟아지는 차가운 물을 태연히 맞고 있었다.
차갑지도 않은지 솜털 하나 떨리지 않은 멀쩡한 자태였다.
극도로 훈련된 특수 요원이나 챔피언들보다도 더 잘 발달한 고밀도의 근육들이 상당한 위압감을 자아내었다.
“젊은 게 참 편리하긴 하군요.”
“정신을 바짝 차리려면 자극이 필요해서요.”
알렉시스는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위치한 것은 그의 본체였다.
다른 대륙들에서는 그의 아바타들이 그와 정신이 연결된 채로 눈과 귀와 손이 되어 정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계곡 위의 상공에는 그것들과 알렉시스의 몸을 연결해줄 비블로스가 대기하는 중이었다.
인공위성에도 잡히지 않는 스텔스 모드의 상태로.
“여유롭군요.”
“그럴 리가요.
지금도 눈은 바쁘게 움직이는 중인걸요.”
알렉시스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호쾌하게 웃었다.
“눈이라니요?”
무스타파가 궁금해하며 호기심을 비쳤다.
“하하, 그런 게 있답니다, 선생님.”
알렉시스는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한쪽 눈을 장난스레 깜빡였다.
동일한 시각 이곳 아시아 대륙 전역에 흩어진 ‘작은 신도시’들을 감시하는 눈들이 있었다.
위성보다도 더 정밀화된 드론들이었다.
그것들은 워쳐들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비블로스와 연결되었고 그 정보들은 알렉시스의 뇌리로 스며드는 중이었다.
“제법 진척이 나쁘지 않네요.
아프리카 쪽은 어떠려나 궁금하군요.”
물어 적셔져 차가워진 몸을 보온할겸 망토형 코트를 걸친 알렉시스는 두 노인과 함께 높은 산 위에 서서 사방에 펼쳐진 풍경을 관망하였다.
동시에 드론들의 영상들도 머릿속에 들어왔다.
‘바벨의 메커니즘과 패러다임,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화 명령을 실현하는 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진정한 의미의 ‘지역균등 개발’, 강제적 배분이 아닌 인간의 자발적 움직임을 유발함으로써 이뤄내는 ‘문명의 산개(散開)’, 그야말로 ‘온 지면에 흩어지라’는 전능자의 명령을 성취하기에는 안성맞춤이리라.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의 호언장담에서 이유 모를 설득력과 권위가 강력하게 전달되었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문명이 건설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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