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44회 [2부] 65화. 계몽자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6.20 | 회차평점 ![]() |
메시아적 인물의 도래를 앙망해온 것은 히브리인들만이 아니다. 바벨의 열쇠를 관리하는 청지기 노릇을 해온 두로의 후예들, 그리고 그들의 짝으로 한 몸뚱아리로 연합된 ‘자칭 유대인’들의 회당, 그들도 나름 자신들의 영예가 되어줄 구원자를 기다렸다.
계몽자(啓蒙者, The Enlighter). 광명(光明)의 임금. 두로와 에돔의 후손들이 믿는 여러 전승, 주술서, 신비주의 문학, 선진들의 경전과 마법서에도 공통적으로 이 임금의 도래를 알리는 계시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히브리인들의 왕을 죽이고 세상을 ‘폭압의 신 아도나이’로부터 해방할 진정한 제왕. 유럽과 중동의 숱한 마법사들과 왕들과 명장들과 예언자들이 그에 대해 예언의 퍼즐들을 남겼다.
이슬람의 폭도들과 차이가 있다면 두로와 에돔의 후손들은 슬기롭게 기다릴 줄 알았다. 그가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정체를 교묘히 숨기고 모든 증거가 완벽히 마련될 때까지 인내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을 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한 승리의 열매를 쟁취하기를 소망했다.
현 세대의 수장들은 이전 세대에 축적된 모든 예언의 책들과 기록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만 추가로 특별히 주어진 계시들도 보유하였다. 아직은 예언의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적임자가 보이지는 않았다. 만일 그런 존재가 나타난다면 필시 그는 브리튼의 식민 통치를 종결하고 난공불락과도 같았던 황가의 아성을 무너뜨릴, 유일무이한 열쇠가 되리라 예상되었다.
헌데.
⪡“왜 그대들은 당황하는가.”⪢
이 상황은 몹시도 낯설고 어색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선택받고 광명의 세례를 받은 그들에게만 허락된 이 통신선이다. 외부에서 그 어떤 기계를 쓰더라도 여기에 침투할 수는 없다. 텔레파시에 가까운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시스템. 현대에 개발된 사념파 간섭 기술과 세계 대전 때 출시되었던 사상 조작 계열 병기, 그리고 오롯이 오컬트의 영역에서만 통용되는 비밀스러운 유물들의 조합을 통해 허락된 뇌와 뇌의 직접적인 연결. 특별한 시술을 받은 이들이 이 채팅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그 외에는 그나마 유물의 파편을 받고 세례명을 얻은 이들만이 간접 접속을 허락받았을 뿐이었다.
⪡“너희의 주인이 돌아왔다, 하등한 벌레들아.”⪢
한순간에 숨통을 마비시킬 강력하고 짙은 사념의 목줄이 참여자들의 뇌 속 편도체(amygdala)를 팽팽하게 옥죄었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자극. 모두가 숨을 죽이고 낯선 존재의 개입을 잠잠히 지켜보았다.
“당신은.”
한 수장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누구입니까?”
⪡“…….”⪢
대답 대신에 아리송한 침묵이 섬뜩한 분위기 속에서 지속되었다.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는 이입니까? 혹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면 됩니까?”
“그대는 우리의 적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아군입니까?”
그러자 수초 뒤에 다시 낯선 음성이 흘러들었다. 그 소리에는 마치 마술이 걸린 듯 하여 듣는 이들은 최면의 음악을 듣는 듯한 감각에 휘말렸다. 목소리 그 자체가 점성술로 축성되어 권능을 유발하는 것 같았다.
⪡“그대들의 편도 아니요, 그대들의 적의 편도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지. 그대들 중 누가 내 발 밑에 무릅을 꿇느냐. 아마도 그대들의 운명이 이 질문 위에 걸려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다른 수장들이 대화에 개입했다. 그들은 오랜 신비 속에 감춰진 지식들을 그에게 물었다. 수학과 과학, 역사와 심리학, 각종 술법과 관련된 깊은 비밀과 수수께끼들을. 그들은 이 존재가 정말 격이 다른 어떤 실체인지를 알기를 원했다.
그는 선뜻 그들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아직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운 학식들을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풀어내어주었다. 각종 난제들과 수수께끼와 미스테리들이 그의 해박한 말 속에서 모두 손쉽게 풀어졌다. 마치 선물을 하사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의 군주’를 마주하는 듯한 신비함이었다.
⪡“이 몸의 권위를 끝까지 의심하려는건가?”⪢
그 존재는 믿음과 충성심이 적은 이 어리석은 무리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기껏 구원을 베풀려 어렵게 현세에 현현한 보람이 없구나, 인간들이여.”⪢
그 낯선 왕은 인간 세계의 비밀스러운 역사에 대해 장장 세 시간을 서사하며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읊었다. 그가 읊은 어두운 신곡(神曲) 속에는 오직 두로의 후손들만 친숙한 은밀하고 비겁한 음모들도 많이 녹아 있었다. 비밀에 관여된 장본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세하게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은 메시아이십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그대들이 모두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다. 편린을 살짝 비춰주지.”⪢
잠시 후 시각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 주술적 통신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자들 중에서 가장 격조가 높고 마술 실력이 뛰어난 자들만이 시전할 수 있는 기능이었는데 그는 매우 쉽고 간단하게 그 마술을 시현해보였다.
깜깜하고 어두운 방의 희미한 형체가 회의 참석자들의 시각 중추 대뇌 피질 후두엽 위에 새겨졌다. 삼차원 공간 좌표 개념이 분명하지 않은 영역. 그 한 가운데에 한 인간의 실루엣이 존재했다. 대략적인 형태로 남성체였는데 키가 매우 크고 체격이 상당히 건장했다. 하관 위쪽으로 가면을 쓰고 있어서 이목구비의 상세한 형태가 관측되지는 않았으나 대략적인 형태로 보아 몹시 매혹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저분이?”
모두가 의혹에 빠졌다. 저 낯선 수수께끼의 인간이 정말로 수백 년간 선조들과 선배들이 말해왔던 그 존재인가? 그렇다면 이제까지 무엇을 하다가 지금 나타났단 말인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곳에 임했는가.
⪡“아직도 해명을 요하는가?”⪢
이에 광명협회의 최고 수장이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받아주겠다.”⪢
“스승님께서는 정말로 초자연계에서 오신 것입니까?”
⪡“초자연계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너희 차원을 기준으로 상층부와 하층부를 모두 초자연계로 분류한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이 물리계를 ‘우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우주란 3차원 공간, 4대 기본 상호작용이 작동하는 차원, 가시(可視) 범위의 천체계 내부에 속한 영역으로 한정된다. 소위 별들과 은하계들과 태양계가 존재하는 공감을 말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우주는 이면 차원들, 비슷한 유형의 다른 우주들, 상위의 차원들을 포괄하는 멀티버스적 개념이 될 수도 있다.
반면에 우주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난 영역부터는 ‘초자연계’로 정의된다. 이 벗어남이란 양성(良姓) 방향과 음성(陰性) 방향을 모두 포함한다. 양성 방향으로는 우주를 이루는 시공간 축들을 넘어 무한 개의 축이 존재하는 무한계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곳을 두 번째 하늘, 또는 상층부의 초자연계로 정의한다.
반대로 음성 방향으로는 차원수가 마이너스 무한대인 영역도 존재하는 데, 이를 하층부의 초자연계로 정의한다. 바닥 없는 구덩이, 또는 심연이나 무저갱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 폭압자는 나를 두 개의 성분으로 찢어 봉인하였다.”⪢
폭압자라는 표현은 회의장의 모두에게 익숙했는데, 바로 기나긴 세월 세상을 통치해온 시스템의 영적 군주를 의미했다. 서구 세계의 질서를 세운 자. 히브리인들의 신. 브리튼 황실과 계약을 맺은 존재.
⪡“나의 의지와 나의 코어, 그 둘이 분리되고 말았지. 의지는 현세 위의 상층부에 살아 남았고 그 덕에 현세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 허가되었다. 너희가 조직을 결성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영향력을 끼친 존재가 바로 이 몸의 의지였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내 자아를 형성할 수 없었지. 나의 본체인 코어는 심연 속에 봉인된 채로 오랜 세월을 인고하며 견뎠다.”⪢
괴이의 존재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봉인되었는지, 그리고 봉인의 자물쇠가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었다. 지난 수천 년의 세월 간 그는 깊은 무저갱에 갇힌 채 때를 기다렸다. 아주 가끔씩 자물쇠가 느슨해지는 경우에만 실체의 일부를 현현하여 현세에 발현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놓일 때에 그는 아직 활동 중인 자신의 의지와 접속하여 현세에 대한 업데이트된 정보들을 수집하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놓임을 받았을 때는 450년 전이었다.
⪡“이 몸을 묶는 결박의 핵심 자원은 압제자와 인간의 계약이었지.”⪢
처음에는 한 인간이, 그 뒤에는 다른 한 인간과 그의 후손들이 압제자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들이 바로 히브리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실제로 두로의 친족인 가나안 민족을 멸살하였다. 이때 광명의 왕은 포로가 되었고 언약이라는 닻줄에 연결된 줄에 결박되어 심연에 내려갔다.
이후 히브리인들의 언약이 약해질 때마다 그는 잠시 세상에 얼굴을 비추었고 그 언약이 가장 쇠약해진 지난 450년 전에는 마침내 땅 위에 강림할 기회를 얻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또다른 언약이 현재의 브라이틀란트 가(家)의 선조와 맺어졌고 그로 인해 왕의 심장은 다시금 지하로 끌려갔다.
이것이 낯선 왕이 증언하는 그의 옛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당신께서 오늘 풀려나신 이유는?”
한 인간이 신중하게 앞뒤 정황을 고려하며 가설을 세워보았다.
“혹 적국의 수장이 코마에 빠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누구라도 이렇게 추측해볼 법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젊고 건강하다 못해 에너지가 넘쳐나던 황태자가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쓰러져 무력화되었는데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때에 초자연계에서 왔다는 존재가 출현하였다. 마치 아브락사스에게 두 얼굴이 존재하듯, 한 존재가 잠들 때 다른 존재가 깨어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아, 나를 묶어둔 그 말뚝을 말하는 겐가. 그를 억누르고 잠재운 것은 이 몸이 맞다. 오랜 씨름 끝에 승세를 잡았지. 그를 잠재우고 이 몸이 현세로 올라오기 위해 상당히 긴 시간을 노력하였다.”⪢
순순히 사실을 자백하는 낯선 왕.
⪡“더 묻고 싶은 바는 없는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렇다면 이 몸의 차례로군. 내가 그대들을 시험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낸 다음 내 뜻에 합격한 자들만을 내 왕국으로 거둘 때가 임하였다.”⪢
공포감과 두려움, 그리고 이유 모를 외경심이 점차 고조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 먼저는 그대들과 만나는 것이 우선이겠군. 아직 나는 현세에서 사용할 내 그릇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그대들은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그릇을 찾아내야 한다. 때가 이르면 내가 그대들과 합류할 것이고 그때까지 그대들은 내 뜻에 복종하여 내 계획을 진행해야 한다.”⪢
아무래도 맥락을 보아 이 초자연적 존재가 몸체로 사용하고 있는 한 숙주 인간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낯선 존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정체성과 이름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숙주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그는 자신이 아직 몸의 주도권과 정신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지금, 여섯 조직의 우두머리들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비록 기회를 얻어 그릇 속에 현현하긴 했으나 몸의 원 주인과 완전하게 일체화되지는 못했다. 아직 나를 결박한 그 포승줄이 연결된 말뚝은 숨이 붙어있기 때문이지. 내가 그를 꺾고 압제자의 언약을 부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만일 너희 중 하나가 말뚝을 죽이고 그 숨을 거둬준다면 모를까.”⪢
바로 그때 한 의심 많은 대집정관이 이의를 제기했다.
“잠시만! 선생님께서 권능과 금단의 지식을 소유한 점을 잘 이해했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우리를 구원하고 압제자를 이길 권능이 있다면, 그 사실을 부분적으로나마 증명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둠의 신과 싸워 이길지 확신이 들지 않는겐가. 하긴 그 입장도 이해가 되는군. 이미 치열한 한 번의 접전에서 나는 그의 간교한 속임수에 빠져 포로가 된 적이 있었지. 덕분에 심장과 의지가 나뉘어졌고 열세가 확정되고 말았다. 일단은 이 몸을 매개로 내 두 부분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 일이 필요해. 그 뒤에야 승부를 볼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과제는 두 가지, 그릇의 완벽한 장악, 그리고 알렉시스 황태자의 제거. 어느 쪽도 간단한 도전은 아니었다.
⪡“너희가 믿을 수 있도록 먼저 간단한 이적으로 표증을 보여주마.”⪢
낯선 왕은 맹약을 하나 제안하였다.
⪡“만일 너희가 내 표징을 본다면, 곧 내가 절반 밖에 깨어나지 않은 이 상태에서조차도 적을 혼돈케 하는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본다면, 그때는 어리석은 그대들도 내 완전한 부활체가 적의 수괴를 멸할 능력이 있음을 의심치 않겠지. 어차피 그대들에게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겠는가.”⪢
악마의 달콤한 목소리가 모든 수장들의 마음을 꾀었다.
⪡“정확히 이틀 뒤 이 시간이다.”⪢
낯선 남자는 다리를 꼬며 거만한 자세로 선포했다.
⪡“그때 첫 번째 표적을 보여주마, 하등한 자들이여.”⪢
이전회
143회 [2부] 64화. 낯선 강림 |
다음회
145회 [2부] 66화. 이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