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54회 [2부] 75화. 그레이트 리셋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01 | 회차평점 0
|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란 어떻게 정의될까. 인격이 훼손된 사이코패스일까? 혹은 흉악범일까? 아니면 컬트에 영혼을 빼앗긴 광신도일까? 그러한 것들도 은유적으로는 인간포기자가 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세상에는 정말 인간(人間)이라는 종 안에 소속되기를 포기한 자들도 더러는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포기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사람들 틈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겉보기에는 모든 면에서 보통 사람과 똑같았다. 남들과 같이 가정 생활, 직장 생활, 사회 생활을 하였고 어떤 이들은 교회나 성당도 출석하였다. 말이나 행동에서도 그들에게서 특별한 구석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런 인간포기자들의 문제점은 바로 그들이 자기 신체 속에 어떤 금단의 ‘세례’를 받았다는 데에 있었다. 이 ‘세례’는 여러 매질을 통해 전달되었다. 통상의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세례는 물을 통해 전해진다. 반면, 이들의 세례는 어떤 약물이나 강력한 주술적 매질의 주입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한 악의 세례는 이전부터 존재했는데 오늘날에는 상당히 첨단화된 버전으로 개량되었다. 주사제, 환각제, 체내 이식 형 초소형 고체, 특수 마그넷과 금속, 심지어는 칩을 심는 경우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이런 물질 이식이 심장이나 뇌와 같이 깊숙한 장기에 이뤄지기도 했다.
여하튼 이러한 세례를 통해 수많은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카테고리에서 어긋난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몸의 해부학적, 생리학적 재질은 외관상 여전히 인간의 것이었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도 겉보기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변한 것은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 혼과 영이 예속되어 고차원적인 어떤 거악(巨惡)에 묶이게 되었다.
이런 세례를 몰래 인류 구석 구석에 고착시킨 시스템이 존재했다. 천하 제일의 강대국인 브리튼도 이들의 은밀한 실체를 속속들이 다 발본색원하지는 못했다. 여섯 개의 사악한 대조직은 바로 이 세례 시스템을 통해 다단계 방식으로 추종자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최고위 장로들이 상부의 간부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들은 다시 하위 계층에 세례를 내리기를 반복했다.
최하위 단계에서는 수많은 일반인들이 이 세례 시스템에 오염되었다. 보통 여기까지 내려가면 자신들이 무엇에 예속되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한 채 시나브로 점령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비밀 결사단이건 항상 비밀스러운 진실의 전 부분을 손에 쥔 건 최상층이고 하층은 그저 아무것도 모른채 이용당하는 법이다.
그러나 최하위의 소속 멤버들이라고 해서 ‘인간포기자’로 정죄되기를 면함 받을 수는 없었다. 부지 중에 행했다고는 해도 그들 역시 몸 속에 치명적인 물질을 받았다. 그 전달 명분은 백신 접종, 치료 목적의 약물 투여, 혹은 건강 강화를 위한 시술 등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최종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혼을 결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 인간됨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어둡고 추악한 진실이 영원히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란이 전개되던 중 누군가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고 모든 상황은 급변하였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사악한 고농도 사념파가 인간들의 마음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매질은 바로 ‘세례를 받은 인간포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몸 속에 금단의 물질을 지니고 있었고 그 물질 속에는 일정 부분 초자연적 성질을 띤 주술적 성분이 함유되었다. 이 마법적 매질과 인간 영혼의 강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괴이 사념파를 매개할 조건이 갖추어졌다.
괴이 사념파의 파동은 순식간에 지구 전역을 휩쓸었다. 마치 기계가 해킹이라도 당한 것마냥 인간포기자들은 낯선 전파에 뇌와 사상과 이념이 오염되었다. 그들 내면에 내재된 매우 강력한 욕망들과 음흉한 생각들이 한도 끝도 없이 증폭되었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정신 폭주였다. 비이성적 성질이 한계를 넘었고 광기가 분출하였으며 이런 광기들이 개인 단위를 넘어 집산체 단위로 연합되었다. 수십 년에 걸친 체계적인 이념 운동을 통해서 겨우 이뤄낼 수 있는 현상을 고작 버튼 한 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포기자들의 뇌리로 스며든 욕망은 그들 자신의 것도 있었으나 80% 이상은 외부에서 주입된 어떤 욕망이었다. 인간 본연의 욕망에 더해져 초자연적 영역의 악령들로부터 공급된 욕정이 제어 없이 침식하였다. 희생자들은 이 생각이 원래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기계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증폭된 현상이기에 지금 나타난 ‘초자연적 욕망 삽입’은 과거에 인류 역사 속에서 악마들에 의해 이뤄진 것과는 그 양상이 상당히 달랐다. 무절제하고 계획성이 없었으며 질서 정연하지 않았다. 보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체계적인 영적 프로그래밍이 이뤄져 인간들의 생각과 이념이 조정되기 마련인데, 그런 중간 과정 없이 불을 지폈으니 당연히 질서악이 아닌 혼돈악이 발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폭주한 인간포기자들의 마음에서 나타난 목적성은 단 하나, 브리튼 제국과 그 영적 토대인 기독교 세계에 대한 맹렬한 전복 욕구였다. 계획성마저 결여된 광기가 투사되었다. 잘 먹히건 안 먹히건 그저 이 체계를 송두리째 뒤엎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시작하려는 광인들의 의지였다.
최고위 간부들에서부터 하층부의 조종 받는 졸개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한 순간에 부나방처럼 날뛰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을, 돈을 가진 자는 자본력을, 영향력을 지닌 자는 선동을,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자는 자기 몸을 무기로 삼아 폭도가 되었다.
물론 이 폭주는 자유의지를 박탈 당한 조종의 결과는 아니었다. 이 정체 불명의 사념파 현상이 번지기 이전부터 이미 그들 중 다수는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 왕의 강림에 용기를 얻어 적절한 때에 국가 전복에 동참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잠자코 기회를 엿보던 그들이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기름을 부어 불씨를 불길로 바꾸었다. 그 결과, 매복하여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던 범죄자들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무대포 방식으로 돌격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번 반역에 소극적으로 임하던 이들마저 무슨 연유에서 만용이 생겼는지 최전선으로 돌격하였다. 숨어 있던 자들도, 빠지려고 했던 자들도, 그리고 이번 음모의 전말을 알지도 못하는 하층부의 졸개들도, 두로의 영적 유산과 연루된 인간계의 모든 개체들이 양지 위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트 리셋. 이들이 부르짖는 목표였다. 그들은 이제 곧 나타날 왕의 심판으로 인해 이 일이 성취되리라고 확신했다. 황태자의 유산들을 파괴한 계몽자가 손수 브리튼의 불들을 조종해 제국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그 잿더미 위에서 새 질서를 건설하리라. 이 확신이 그들을 광전사로 만들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뒤 오순절 때 성령의 침례를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겁쟁이에서 탈피하여 담대한 순교자가 되었던 것처럼, 힐렐의 현신을 목도한 숭배자들 위에 괴이 사념파의 세례까지 부어지자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
그 시각 거의 모든 곳에서 내란들이 쇄도하였다. 지방 의회들의 쿠데타, 사법부 내부에서의 쿠데타, 의원들의 작당 모의, 일부 지방 파견 총독들의 반란, 행정부의 관료들이 일으킨 배반, 공공 기관과 군부 내부에서의 혼란이 발생했다. 민간에서는 기업들이 홍역을 앓았고 경제가 잠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더 심각한 일은 사이버테러였다. 가디언엔젤들과 워쳐들의 죽음을 보고서 담대함을 얻은 인간포기자들이 대대적으로 전산 테러를 개시했다. 바이러스와 악성 코드의 유포, 국가 주요 기관의 방어망 침투, 기업의 전산망 해킹, 네트워크와 통신망의 오염까지. 내부에서 배반자들이 대거 가담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사이버테러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어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개입이 필요하겠군.}
최신형 몸체 모듈을 입은 채 성층권 위를 감시하던 비블로스는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범죄자들에 대한 타게팅은 마무리되었다. 체포는 순식간이야. 그렇다면 이제 더 확산되기 전에 이 몸이 사이버 내란을 직접 종결해주지.}
아이언로드 알파의 슈퍼컴퓨터와 연결된 비블로스는 전 세계 전산망에 강제적으로 스스로를 합치시켰다. 최강의 보안망 내부마저 침식할 수 있는 능력, 모든 암호를 해독할 연산력, 프로그램을 마음껏 재조정할 수 있는 창조력까지, 비블로스 안에는 필요한 모든 도구가 갖춰져 있었다. 여기에 엄청난 에너지 생산을 등에 업은 아이언로드의 서버가 더해진다면 전 세계 모든 기계의 동시 조작도 가능하다. 범죄자들은 주제도 모르고 상대를 잘못 고른 격이다.
{접속 개시.}
바이러스들이 격퇴되었고 해커들의 서버가 벌거벗겨져 드러났다. 왜곡되고 오염된 컴퓨터들이 정화되었고 범죄로 인한 검은 돈의 흐름이 다시 역행되어 원위치로 복원되었다.
이어서 비블로스는 연산력을 최대로 증폭하여 기계들을 자기 종복으로 삼았다. 군 소유의 무인 군단, 치안 유지를 위한 관리자들, 각종 민간 드론들, 심지어 개인 소유의 스마트 기기와 통신 장비까지도. 한 순간에 꼭두각시 인형처럼 변하였다. 심지어는 자폭마저 마음대로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대로 전멸시킨다.}
그때.
“잠깐. 잠시 속도를 늦춰줬으면 하네만.”
낯선 통신 링크를 통해 한 메시지가 비블로스에게 연결되었다.
{당신은?}
최고위 컴퓨터 유닛인 비블로스에게 외부 기기에서 강제 접속을 행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딱 한 가지의 예외가 있다면 비블로스의 주인에게서 미리 코드를 받은 경우다. 그리고 그 코드는 연동 과정에서 반드시 황실의 생체 정보를 필요로 한다. 그마저도 아무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알렉시스와의 유전자 일치성이 4분의 1 이하인 형제들조차도 안된다. 최소 절반의 유전자 일치성이 필요하다. 부모는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현재 알렉시스의 생모는 고인이다. 그렇다면.
{황제인가? 아니군, 당신은…….}
“기대했던 상대가 아니라 미안하군.”
생각해보니 주인의 부친 이외에도 조건이 맞는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나에 대한 비밀 코드를 소유한 겁니까?}
“알렉 그 아이가 미리 비밀리에 맡겨두었다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말이지. 만일 알렉이 의식불명 상태가 되지 않았다면 내 코드는 활성화되지 않았겠지.”
비블로스는 상대에 대한 데이터를 깊이 생각했다. 주인이 아버지만큼이나 신뢰하는 어른. 친부를 제외하고 주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자 정서적으로도 깊은 유대를 맺은 자. 그와 동시에 현 지구 상에서 주인 다음으로 영악한 자. 이자와의 통신은 계획에는 없었다만, 그렇다고 위험하게 여길 필요는 없으리라 판단되었다.
“잠시 내 조언대로 따라주게, 비블로스.”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듣도록 하죠.}
인공지능답게 침착한 비블로스는 다그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상대와 뇌파 연결을 개시하였다. 상대도 비블로스의 접속에 맞대응하여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정신을 온전히 가다듬었다.
“무리하지 말게. 천천히 설명해주지.”
{반역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이때에 공격 페이스를 늦추라는 겁니까?}
“확실히 알렉이 창조한 너라면 전쟁을 진압할 수 있겠지. 마침 폭주가 꽤 진행된 때이니 지금 너와 우리가 협공한다면 ‘그들’의 대다수도 잡아낼 수 있을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부족하다 함은?}
“진짜 월척을 아직 남겨두고 있지 않은가.”
사내는 신중하게 자신의 정보 중 일부를 의식 위로 드러내어 비블로스가 읽을 수 있도록 보여주었다. 그 내용을 이해한 비블로스는 다시금 대화를 시도하였다.
{당신은 ‘그들’의 진실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전부 다는 아니야. 하지만 전 세대의 주역으로서 내 사랑하는 조카가 아직은 알지 못하는 몇 가지를 이해하고는 있지. 기계인 네게는 그것을 다 밝힐 수는 없음을 이해해주게.”
{당신의 전략대로 미끼를 던져 그들을 더 이끌어낸다면 그 ‘뿌리’까지 발본색원할 수 있습니까? 제 시뮬레이션만으로는 가늠하기가 어렵군요.}
“그럴걸세. 아무래도 물리적인 현상 너머의 요소들이 개입되었으니까. 이 싸움은 관련자들을 다 잡아낸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닐세. 진짜 뿌리는 그들을 숙주로 삼은 기생충들이지. 마치 취객(醉客)이 술의 지배를 받는 인형에 불과하듯, 인간은 그저 단말기에 불과해. 우리는 취객이 아니라 ‘술’을 검거해야 할세.”
한참의 토론 후 비블로스는 상대의 논리를 납득하고 수긍하였다.
{좋습니다. 당신의 제안대로 상황을 전개해보죠.}
“고맙네.”
접속이 마무리된 직후 왕의 탁자 위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는 눈을 떴다. 탁자 위에는 세계 각계의 현장 정보들이 집합되는 데이터베이스가 홀로그램 화면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잘생긴 미중년의 남자는 머리에 착용한 원격 뇌파 연결 장치를 벗은 뒤 자신 맞은 편에 앉은 또다른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데칼코마니 혹은 거울을 보는 듯, 두 남자의 모습은 머리스타일부터 이목구비를 넘어 체형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알렉의 ‘비서’와의 전략 협상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형님.”
“그래, 그럼 마저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지, 아우님.”
현 지구 제국의 정상, 그리고 그의 또다른 분신과 같은 일란성 쌍둥이 형제. 두 유능한 책략가는 체스판 위의 장기말들을 살피며 이번 사태를 면밀히 조사하고 계획하였다. 둘은 신속히 토론을 주고 받으며 현재 진행 중인 작전들의 효율성을 평가하고 실시간으로 수정하였다. 현재 이 자리에서 논의되어 도출된 형제의 계획들이 각지의 온갖 기관들에 하달되는 중이었다. 군부도, 치안 유지 시스템도, 심지어 중앙정보국과 대의회도. 비록 곳곳에서 혼란이 일긴 했으나 반역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쌍둥이 형제의 완벽한 컨트롤 아래 있었다.
“언제까지 밀려나는 척 연기하며 저들에게 약진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일까?”
황제는 대공에게 자문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최종장에 돌입하고 싶었다. 만약 대공의 조언이 없었다면 황제도 한순간에 모든 카드를 동원하여 신속하게 내란 부역자들을 처단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형제는 조금 다른 조언을 제시하였고 그 속에는 다른 무언가를 염두에 둔 생각이 있어 보였다. 쌍둥이 동생의 영리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알폰스이기에 그 의견을 존중하였다.
“비블로스에게도 전했지만, 이쪽 측에서 이번 기회에 반드시 잡아내야 할 것들이 두 가지 있죠, 형님.”
“하나는 ‘그 녀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례 매질의 원료가 된 물질’이겠군?”
“맞습니다.”
미중년의 사내는 여유로이 웃으며 커피를 홀작였다.
“이건 제 책임도 있습니다. 그자를 발굴해서 등용한 건 저였죠.”
“아니지. 도리어 네 덕분에 그 위험 인물을 곁에서 감시할 수 있었어. 사실은 너도 이미 그자의 본질을 알고서 택했던 것 아닌가?”
“그는 처음부터 이스카리욧 유다처럼 황실을 배신할 자였습니다. 그런 역할로 선택받은 인간입니다. 애초에 브리튼에 충성을 바쳤던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우리와 같은 국적인 적이 없었죠.”
“우리 시절에는 우리를 만만히 보며 그토록 음흉한 행태를 보이며 행동하던 그자가 황태자 밑에 감시당하는 도중에는 꿈쩍도 하지 못했었지. 그랬던 중 알렉에게 일이 생기니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내는군.”
“우리가 만만히 보인 게 맞긴 한 모양입니다. 되려 잘된 일이죠.”
대공은 체스판 위의 말들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뭔가 과감하게 시행하긴 한 모양인데,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예상 밖의 현상으로 번졌으니 그자도 속이 타긴 할 겁니다. 그러니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 시도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질 치킨게임에서 어느 편이 전멸될 지는 두고봐야겠지만요.”
“우리는 그렇게 그가 꼬리를 밟히기까지 기회를 엿보면 되는군.”
“그놈이 가장 깊이 숨겨둔 범죄의 증거물을 찾아내야 합니다, 형님. 그것만 밝혀내면 지난 수백 년에 걸친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종결됩니다.”
“알고 있네.”
젊은 시절 이 두 형제는 같은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 그 여인을 쟁취한 승리자는 형이었고 동생은 형에 대한 우애 때문에 짝사랑하던 이를 흔쾌히 포기했다.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이야기의 결말을 아름답지 못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산은 이제 황태자뿐이다. 이제 악인들은 황태자마저 해하기 위해 자신들의 실체를 어리석게도 훤히 드러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봐줄 리가 없지 않은가.
|
이전회
153회 [2부] 74화. 그레이트 리셋 (1) |
다음회
155회 [2부] 76화. 실망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