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44회 에일린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23 | 회차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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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름.
다른 이름으로 에일린 프랜시스.
초기 멤버인 1세대 출신 헌터 유진성과 로라 프랜시스 사이의 외동딸.
정부 아래에서 일하던 시절의 진성은 당시 협력업체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로라와 비밀리에 연애를 하였다.
둘은 이후 별도의 결혼식 없이 백년가약을 맺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겼고 로라는 아이를 정부로부터 지키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당시에 막 세력을 구축하던 신흥 헌터 무리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 그 쯤에, 진성 역시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정부와 결별하였고 본격적으로 후방으로 물러나 비밀리에 헌터들의 세력을 도왔다.
다행히도 개조인간이자 헌터인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딸 에일린은 평범한 신체 조건을 지닌 보통의 사람이었다.
특수 이능이나 안티-게이팅 파워, 나노봇이나 이터널 셀 등이 유전될까봐, 혹은 그것들이 기형 등의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염려했던 것은 모두 기우로 밝혀졌다.
에일린은 똑똑하고 아름다웠으며 질병 없이 건강했고 심성도 건전했다.
헌터의 능력을 물려받지는 않았으나 부모의 강화된 지성과 육체 능력이 약간 영향을 미친 것인지 또래보다는 여러 방면에서 재능이 우수했다.
흥미롭게도 이후로도 헌터들 사이에서 연애나 결혼가 몇 케이스 이뤄지긴 했으나 두 사람처럼 아이를 갖는 데 성공한 경우는 더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헌터들은 대체로 짝을 찾는다면 일반인 중에서 찾았다.
헌터와 일반인 사이에서는 그래도 아이가 생길 확률이 어느 정도는 있었으니까.
여하튼 요약하자면, 시더우드의 주인인 진성과 로라에게 있어 에일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중한 보배였다.
헌터들의 세계를 위해 남들보다 배는 더 헌신하는 부부였지만 딸의 귀중함은 그 대의(大意)의 가치 이상이었다.
워낙에 진성이 팔불출처럼 자랑하다보니 라이텔바흐도 종종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듣곤 했다.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당회장님과 로라 선생님의 딸……, 두 분께서 자랑스러워할 만한 인물이었군.’
부유하고 명예로운 집안에서 태어난 고명딸답게 예의범절이 몸에 녹아 있었다.
천애고아에 평생을 불우한 조건 속에서 생체 병기로서 길러진 자신과는 다르게.
‘나랑은 나이 차이가 열다섯 살 정도 되려나?’
다만, 외관상 나이로는 두 사람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다른 헌터들보다 몇천 배는 고성능인 나노봇를 체내에서 생성 가능한 라이텔바흐는 노화 속도가 보통 인간 대비 1.9배 정도는 느렸다.
그 덕분에 그의 현재 신체 나이는 스무살 정도였다.
그때 에일린이 과일을 깎아 올려놓은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인 줄을 알아차린 라이텔바흐는 움찔하였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현재 부끄러운 차림임을 기억해냈다.
걸친 것이라고는 오로지 신체 하나뿐인 자연인의 상태.
아무리 수십 년을 이꼴로 살아왔던 그라지만 수치심을 못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엘릭서뿐이었고 가릴 만한 것이라고는 실 한조각도 없었다.
사실 아직 오염 정화가 다 이뤄지지 않았기에 엘릭서 외의 물질과는 접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캡슐 벽은 반듯한 투명 물질로 바깥에서도 선명히 안을 볼 수 있었다.
공간도 좁은지라 마음대로 몸을 구부리거나 틀어 숨기는 것도 어려웠다.
긴장감에 몸이 굳어서인지 손을 쓰는 것도 순간 잊어버렸다.
“초면에 큰 실례를 범했군요, 에일린씨.”
수치감에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사내놈이 숙녀 앞에서 숭한 몰골을 보여드려 미안합니다.”
“아니예요. 아버님께 상황은 이미 다 전해들었는걸요. 아직 회복 중이신데 길드장님은 저는 괘념치 마시고 누워서 편히 쉬고 계세요.”
“하지만…….”
“그리고 저는 미추(美醜)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눈먼 사람이 아니예요. 완전한 미학의 예술체와 흉하고 보기 거북한 것을 구분하는 일이라면 보통 사람 수준만큼은 가능하답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과장되지 않은, 교양으로 포장된 순수한 칭찬.
라이텔바흐는 난처함에 한숨을 푹 내쉬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반면, 에일린은 태연한 기색이었다.
마치 의사가 신체를 드러낸 환자를 대할 때처럼 전문가스러운 태도였다.
부모님이 의사라서 그녀도 그런 천성을 물려받은 것일까?
‘평소 같았으면 꿈쩍도 않았을 텐데.’
타인 앞에서 수치스런 몰골을 당하는 일은 이골 나도록 많이 겪어왔다.
그래서 면역이 생긴 줄로 알았건만, 아니었던 건가.
“편하게 계셔주세요.”
그녀는 캡슐 외곽부에 설치된 음식물 전송 장치를 통해 음식을 집어넣었다.
곧 라이텔바흐의 손에 닿는 위치로 잘 깎은 과일 조각들이 들어왔다.
다소 허기진 상태였던 그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쥐어 제 입에 넣었다.
누운 상태에서 먹기 불편했는지 그는 캡슐 바닥의 기울기를 조금 높였다.
이에 에일린과 그의 눈높이가 조금 더 맞춰졌다.
“감사합니다.”
그는 그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난처함이 다 가시지 않은, 어색한 감정이 담긴 음성이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제 몸에 직접 접촉하지는 않도록 주의해주시죠. 아직은 오염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비쓰론이야 제 의지로 방출을 막을 수 있지만, 직접 접촉을 통해서 공명되는 흑색파동은 다릅니다.”
“네, 주의할게요.”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헌터인 아버지를 통해 이론을 배워서인지 라이텔바흐의 말을 모두 어렵잖게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저와 접촉한 물질은 흑파의 영향으로 변질됩니다. 에일린 씨의 어머님이자 제 스승이었던 그분이 만든 엘릭서 외에는 그 효과를 완충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야기도 어머니께 들었어요.”
현재 그가 몸을 누이고 있는 캡슐의 안쪽 면은 특수 엘릭서를 반고체로 굳혀 만든 젤이 도매되어 있었다.
즉 그의 몸에 직접 닿는 물질이라고는 공기를 제외하고는 엘릭서뿐이다.
엄밀히는 그 공기마저도 샤워기를 통해 떨어지는 엘릭서로 적셔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옷에마저도 접촉하지 못하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음식처럼 제 몸의 일부로 흡수될 물질은 예외지만요.”
라이텔바흐는 민망함과 어색한 기분을 피할 겸 음식을 계속 입에 넣었다.
며칠 간 기계로 영양소만 겨우 공급 받은 처지였기에 진짜 음식을 소화하는 느낌은 참으로 간만이었다.
달콤한 양분이 혀와 목구멍에 닿자 둔해졌던 뇌의 활기가 되살아났다.
그가 허기진 상태임을 알아차린 에일린은 섭취하기 적합한 크기로 과자와 치즈와 채소를 썰어 전달해주었다.
라이텔바흐는 우리 안의 길들여진 호랑이처럼 온순히 주는대로 받아 먹었다.
‘아버지 말대로 사람이 곁에서 간병하는 편이 더 효과가 좋은 듯하네.’
축 가라앉아 있던 환자의 화색이 빠르게 좋아지는 것이 눈에 선했다.
회복력이 워낙 탁월한 사내라서 그런 것일까?
특유의 생존력이 사회적 교류를 통해서 더욱 활성화되는 것일까?
하긴 그도 몸과 마음과 정서가 긴밀히 연결된 사람이니 당연히 그러겠지.
‘부디 부상도, 마음의 상처도 잘 털어내시고 일어서시길.’
부모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자진해서 간호에 나선 보람이 있었다.
*
사흘 간 에일린은 매일 찾아와 라이텔바흐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친절한 데다 학식이 풍부한 그녀와의 대화는 그런대로 즐거웠다.
말도 잘 통했고 대화 주제도 편안한 방향으로 흘렀다.
헐벗겨진 채로 놓인 것이 부끄럽긴 했으나 눈치 좋은 에일린이 그런 라이텔바흐의 처지를 면밀히 배려해주었고 덕분에 난처했던 분위기는 꽤 누그러들었다.
“저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 같군요.”
라이텔바흐는 에일린이 자신의 행적과 활동들을 잘 알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야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게다가 아버님께서 길드장님의 무용담과 활약상을 많이 들려주시기도 했고요.”
“그저 천성이 투쟁하기 좋아하는 비천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과도한 겸양은 자기파괴적이랍니다.”
“저 자신에 대한 정직한 평가입니다. 저는 일평생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 쟁취하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인류를 지키는 영웅으로서의 긍지도 도덕적 우월감을 얻기 위한 과정일뿐. 제 삶에서 이기심, 성취욕, 야심을 빼면 남는 것은 없습니다.”
라이텔바흐의 뼈아픈 자조는 사실 올바른 자기객관화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는 복수하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지식들과 능력들을 키워왔고 이를 악물고 성장했다.
지금도 그는 힘과 지식과 권력과 소유를 얻고자 애쓰는 중이었다.
끊임없이 채우고도 항상 부족함과 갈증을 느껴왔다.
빼앗긴 지난 삶에 대한 보상심리일까?
살아남기 위해 힘을 얻으려는 본능적 자기 보호 심리일까?
혹은 자신과 일족과 동료들에 가해진 불의를 되갚고자 하는, 의로운 분노와 정의 실현을 향한 복수심일까?
자기 자신도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길드장님께서 바라보신 자신의 모습인가요?”
“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반드시 자기 자신이라는 법은 없죠. 때로는 다른 이들이 좀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평가해줄 수도 있답니다.”
“그게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버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길드장님에게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고 있어요. 정작 길드장님 자신은 그것을 간과하셨겠지만, 그분들은 길드장님에게서 보배로운 가치를 발견하셨을 거예요. 이제껏 인류가 보아온 무가치한 지도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무언가를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위로를 받은 라이텔바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이 옳게 보았건 그르게 보았건, 저는 제 뜻을 제 힘으로 실현할 것입니다.”
“응원할게요. 그날이 오거든 부디 모두를 위해 가치있는 분이 돼주시길 바래요.”
라이텔바흐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침묵하였다.
‘무엇이 될 지는 생각했으나 무엇을 위해 그것을 추구할지는 생각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헌터들을 영웅으로 추대하며 바라본다.
그들이 세상을 개혁할 혁명자들이 되어주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 끝에 이뤄질 세상이 과연 이전 세대의 실패들과 다를 것인가?
라이텔바흐 자신도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저 자신이 보아도 그는 그저 정의에 대한 갈구와 앙갚음에 대한 소망으로 움직이는 제어불능의 폭주 열차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 존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세상을 바꿀 각오가 되어 있었던가, 나는?
생각해보니 자신에게는 그런 소중한 대상이 없었다.
그런 얼어붙은 맘으로 세상 전체를 얻는다고 한들 그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누군가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온 세상을 이롭게 하겠는가.
“에일린 씨는.”
정면과 천장만을 바라보던 라이텔바흐가 그녀를 향해 직접 고개를 돌렸다.
사내답고 잘생긴 얼굴을 직접 마주한 그녀는 선명한 채도의 짙고 붉은 동공에서 뿜어져나오는 눈빛에 멈칫하였다.
“혹시 면역자입니까?”
라이텔바흐의 감찰안과 분석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오염이 다 해독되지 않은 지금의 그의 몸에서는 극미량의 다크포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그의 근처에 다가가면 분명 일정 부분 그 다크포스가 흡수될 것이다.
인체에 전혀 무해할 정도로 적은 양이긴 하겠지만.
라이텔바흐의 눈은 바로 그 무해한 양의 흡수마저도 잡아낼만큼 정밀했다.
그리고 사흘간 그는 에일린 속으로는 다크포스가 전혀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을 똑똑이 확인했다.
그녀는 당회장급 헌터들의 딸.
그리고 바로 이곳 시더우드에서 나고 자라고 지내온 자.
면역자에 대한 정보 같은 고급 정보도 이미 전해들었으리라.
굳이 번거롭게 개념 설명을 해줄 필요는 없으리라고 라이텔바흐는 생각했다.
에일린은 잠깐을 침묵하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유 당회장님과 로라 선생님도 알고 계십니까?”
“네.”
“그렇겠군요.”
라이텔바흐는 문득 궁금했다.
이제껏 면역자들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그런대로 많이 모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왜 면역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헌터들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인가?
허나 매번 면역자들 본인이 침묵으로 일관하니 알 도리가 없었다.
“번거로울 텐데 간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기뻐서 하는 일인걸요.”
“염치가 없지만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라이텔바흐는 느긋한 표정으로 나긋나긋한 미소를 입술 위에 걸었다.
에일린은 예고없이 찔러오는 미남자의 도발에 말문이 잠시 막혔다.
“제 친우가 되어주실 수 있습니까?”
부드러운 중저음의 은은한 울림.
차분했던 에일린의 맥이 평소보다 조금 빨라졌다.
긴장감 때문인지, 낯선 느낌 때문인지 얼굴에는 미약하게 홍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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