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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53회 조우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08 | 회차평점 0 0

 

 

 

 

 

 

레기온의 눈에 비친 작은 인간.

 

 

괴물은 손 안에 들어온 저 약한 인간을 어찌 요리해야 할지 생각하였다.

 

 

어머니들은 어째서 별 볼 일도 없어보이는 저 부류를 주목하라고 당부하셨을까.

 

 

 

 

 

-특별한 구분선이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늘,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군.

 

 

 

 

 

인간들이 소위 ‘면역자’라고 부르는 저 부류.

 

 

아무래도 그 부류의 특별함을 유사-심연들은 읽어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사-심연보다 하위격의 존재인 헬게이트들은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로서는 그저 면밀하게 관찰하여 해석해내는 방법 외에는 면역자를 일반인 가운데서 식별할 방도가 없었다.

 

 

 

 

 

-잘 보니 확실히 우리의 ‘근본적 에너지’의 영향을 받지 않긴 하군.

 

 

 

 

 

일반인과 달리 다크포스가 체내에 흡수되지 않으며 심연독으로 변한 공기도 저 인간의 콧속으로 들어가면 즉각 원래의 형질로 복귀된다.

 

 

하지만 아주 눈에 띌 정도로 잘 구별되는 특징은 아니었다.

 

 

만일 저 인간이 끝까지 건물 틈에 숨었으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용케 내 부름에 응했군.

 

 

 

 

 

플레먼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선 괴물을 목도하였다.

 

 

거인 앞에 세워진 메뚜기가 된 기분이었다.

 

 

레기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수한 흑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몸체의 재질은 화염으로 타오르는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흡사 전신을 흑염(黑炎)의 갑옷으로 에워두르는 모양새였다.

 

 

 

 

 

‘무섭다.’

 

 

 

 

 

플레먼이 아무리 담력을 끌어내었다고 한들 그는 일반인이었다.

 

 

보통의 범부였으며 헌터들처럼 특수한 힘을 소유한 것도 아니었다.

 

 

깊은 마음속에는 강한 의지력을 소유했다지만, 그렇다고 생리적 공포 반응이 제거된 것도 아니었다.

 

 

즉, 지금 그는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거대한 공포심을 견디는 중이었다.

 

 

 

 

 

‘괴물이 왜 나를 부른거지?’

 

 

 

 

 

그 정체불명의 ‘어둠의 부름’은 이 헬게이트들이 현현되기 직전부터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음울한 음성이 플레먼의 뇌리로 직접 파고 들었었다.

 

 

처음에 플레먼은 자신이 귀신이라도 들린 것인가 불안해하며 번뇌하였다.

 

 

하지만 잘 분별해보니 악령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급이 낮은 차원에서 솟구치는 현상이었다.

 

 

 

 

 

호랑이와 같은 물리적인 위협 앞에 섰을 때의 공포감,

 

 

그리고 악령과 같은 초자연적 위협 앞에 놓였을 때 느껴지는 공포감,

 

 

그 두 종류의 전혀 다른 두려움을 반씩 절충하여 섞어놓은 듯한 위협감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더욱 고통스러웠다.

 

 

 

 

 

이 감옥에 갇힌 시점부터 플레먼은 거듭 그 알 수 없는 음원에 시달렸다.

 

 

이성을 되찾고 정신줄을 붙든 뒤로는 빈도가 줄어들긴 했으나 그 속을 찌르는 듯한 침습은 잊을만 하면 다시금 엄습해왔다.

 

 

 

 

 

플레먼은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저 트라우마의 상황에 놓인 나머지 자신의 뇌가 일시적 충격을 받은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정신과적인, 혹은 뇌 병리학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는 편이 안심되었다.

 

 

 

 

 

하지만 레기온이 몸체를 온전히 생성한 뒤 그의 불길한 감은 진실로 드러났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그 질기고 괴로운 침식은 뇌의 착각이나 환각이 아니었다.

 

 

실존하는 무언가와의 상호작용이었다.

 

 

 

 

 

플레먼은 그것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어떤 견인임을 직감하였다.

 

 

 

 

 

이상하게도 어니스트나 쥬오디아나 신티는 그런 이상 현상을 경험하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혹시 이상한 소리나 느낌이 들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헌터들도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고 다른 일반인들에게는 아예 물어볼 형편이 되지 않았다.

 

 

정신적 교감 이전에 다들 의식이 옅어져 혼수 상태가 된 처지였으니까.

 

 

 

 

 

‘나를 일부러 이곳으로 불러낸 건가? 어떤 목적을 갖고서?’

 

 

 

 

 

이 자리로 오기까지 플레먼은 도박 정신과 함께 용기를 내어야 했다.

 

 

그는 동료들이 한 눈을 판 사이에 넷이서 같이 피신하고 있던 엄호물 너머로 벗어나 개인 행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니스트 일행이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재빨리 먼 거리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적당히 이동한 뒤 그는 탁 트인 공터에 섰다.

 

 

그리고 뇌리로 계속 목소리를 발원하는 그 무언가를 향해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난 이곳에 있다.’

 

 

 

 

 

그가 대답하기 전까지는 전혀 존재를 눈치 못 챘던 그 존재가 아주 작은 마음의 음성으로 응답하자마자 곧장 플레먼을 감지하였다.

 

 

과연 예상했던 바가 옳았다.

 

 

허상이나 환각이 아닌, 실존하는 존재의 부름이었다.

 

 

 

 

 

무모하게 자신의 몸을 내던지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한 가지 직감이 들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 존재와 대면해봐야겠다.

 

 

그렇다면 혹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떤 진실과 직면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잘 걸려들었군. 하지만 너 하나뿐인가? 자유도는 분명 4, 즉 같은 부류의 인간이 적어도 셋은 더 있어야 하는데?

 

 

 

 

 

레기온의 흉측한 입이 쫙 찢어지더니 섬뜩한 음성을 뱉어내었다.

 

 

겁에 질린 플레먼은 마음을 꼭 붙잡고는 속으로도, 입으로도 대답을 멈추었다.

 

 

 

 

 

-이곳이 아닌 곳에 있는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어머니들의 계산이 어긋났을 리는 없다. 그분들이 분명 나를 프로그래밍하였을 때 자유도 전체에 대한 평가를 위해 신중히 범위를 지정하셨을 터.

 

 

 

 

 

플레먼은 그 무서운 괴물이 지껄이는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얼 말하는 것이지?

 

 

암호인가? 은어인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또다른 종류의 불길함과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넷이라고 친다면, 어째서 너 혼자만 반응한 것인가?

 

 

 

 

 

레기온은 한 걸음 더 다가와 플레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두 존재의 눈높이가 맞춰지며 정면으로 눈과 눈이 마주쳤다.

 

 

흰자위 없이 보랏빛 화염으로만 구성된 레기온의 백 쌍의 눈 하나하나에 플레먼의 작은 모습이 반사되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해부대 위에 올려져 벌거벗겨진채로 낱낱이 분해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아주 착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 설마 그런 건가?

 

 

 

 

 

뭔가 기묘한 초자연적인 통찰력으로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일까?

 

 

눈앞의 인간의 본질을 일정 부분 투시한 레기온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오리지널 ‘자유도’는 너 혼자뿐이었군.

 

 

 

 

 

“자유도?”

 

 

 

 

 

괴이한 기분에 플레먼은 저도 모르게 반문하였다.

 

 

 

 

 

“그게 뭐죠?”

 

 

 

 

 

-넌 그 존재들, 그러니까 너희 종족이 ‘헌터’라고 부르는 자들과 접촉했던 적이 없던가?

 

 

 

 

 

날카로운 질문에 플레먼은 번뜩 긴장하여 곧장 함구하였다.

 

 

하지만 그의 동요를 읽어낸 레기온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걸었다.

 

 

 

 

 

-그래, 만나지 않았을 리가 없지. 헌터들은 너희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너희를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애썼겠지.

 

 

 

 

 

“너희라고?”

 

 

 

 

 

-헌터들은 아마 너희를 ‘면역자’라고 불렀을거다. 헌터들이 우리의 힘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라면, 면역자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에너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 더 정확히는 우리가 ‘접촉할 권한을 얻지 못한 인간’들이지.

 

 

 

 

 

플레먼은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생소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개념이었다.

 

 

비록 ‘면역자’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몰랐으나 플레먼은 자신이 왜 심연의 존재들로부터 ‘분리된 특성’을 지녔는지, 대강 그 맥락이 감이 잡혔다.

 

 

 

 

 

‘설마 어니스트와 쥬오디아와 신티도?’

 

 

 

 

 

만약에 그가 예상하고 있는 바가 맞다면?

 

 

그렇다면 저 괴물이 말한 ‘면역자’라는 카테고리 안에 자신뿐 아니라 저 세 친구도 들어가게 되리라.

 

 

 

 

 

처음부터 플레먼은 직감적으로 괴물이 찾는 나머지 세 존재라는 것이 혹시 자신의 세 친구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됨으로써 그 불길한 예상이 좀 더 확실시되었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돼.’

 

 

 

 

 

그는 사자 굴 속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돌아간다는 격언을 기억하며 필사적으로 생의 의지를 발휘하였다.

 

 

괴물은 자신의 기이한 특성에 뭔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어쩌면 당장 죽일 생각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죽여서는 곤란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봐서 생존의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친구들이 저것에게 들통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뭐, 상관 없어. 슬슬 알아보지 뭐.

 

 

 

 

 

레기온은 이죽거리며 비웃었다.

 

 

그 지옥의 미소가 어찌나 섬뜩한지 플레먼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슬픈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끄어어억!”

 

 

 

 

 

아비규환 위에 금상첨화를 더하는 산고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근원지는 결박된 베르나르도 중사과 콘스탄틴 중사였다.

 

 

애초에 C급 헌터인 둘로서는 S급에 준하는 레기온을 상대로 저항할 방도가 없었다.

 

 

이제 둘은 꼼짝없이 고문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두 사람을 묶은 수백 가닥의 검은색 촉수가 날카로운 가시의 형태로 변하여 살갗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끝에서부터 천천히, 겉에서부터 서서히 침식하였다.

 

 

생명은 보존해둔 채 고통만을 극도로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중사님!”

 

 

 

 

 

당황한 플레먼이 외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날카로운 검은 가시들이 길게 뻗어나가더니 하늘 위에 거대한 거미줄 같은 덩굴숲을 드리웠다.

 

 

그 길게 늘어진 물질들로부터 무수한 가지가 뻗어나갔다.

 

 

괴물에게서 발원한 그 미지의 물질은 잔 가시를 발사하였다.

 

 

아울러 가지들 자체도 신속히 진격하여 도시 사방을 관통하였다.

 

 

 

 

 

푸욱.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도시 곳곳에서 죽음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고문이 아닌, 정말로 학살이었다.

 

 

 

 

 

아울러 베르나르도와 콘스탄틴을 향한 고문도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손톱 끝에서부터 천천히 깎아주마. 몸 전체를 세포 단위로 얇게 썰어주지. 최대한 음미할 수 있도록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들어가주마.

 

 

 

 

 

고통에 질겁한 헌터들의 절규가 가까이서 울렸다.

 

 

그와 동시에 먼 곳 사방에서는 핏빛의 음성이 발원하였다.

 

 

악몽의 오케스트라를 감상하는 듯했다.

 

 

 

 

 

-자, 나머지 세 명의 ‘자유도’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불어라. 그러면 너희 넷은 일단 살려두지. 당분간은 관찰하면서 연구하고 싶으니까. 불지 않으면 사람들도 죽고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네 친구들도 자칫 죽을 수 있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딜레만의 상황이었다.

 

 

트라우마에 타격을 받은 것인지 뇌가 순간적으로 하얗게 마비되었다.

 

 

플레먼은 마치 자신의 입 근육이 경직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뭐,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고문하면서 기다리도록 하지.

 

 

 

 

 

무력감이 몸을 지배했다.

 

 

 

 

 

-묻고 싶은 게 있나? 서비스로 몇 가지만 말해주지.

 

 

 

 

 

저항하지 못할 압박감 속에서 플레먼은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시간이라도 끌자.

 

 

뭐라도 지푸라기라도 잡자.

 

 

 

 

 

“내가가 면역자라면 어째서 이곳에 끌려온 것이죠? 당신 언급에 의하면 면역자에게는 헬게이트의 영향이 닿지 않을 텐데요?”

 

 

 

 

 

-바로 그렇기에 네가 특별한 거다. 네 말대로 우리는 면역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해.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정거리 이내로는 들어가지 못하지. 하지만 딱 하나, 네게만은 예외 조항을 얻어내었다. 누가 누구에게서 얻어낸 것인지는 알지 못해. 그저 네게서는 치외법권의 안전망이 거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뿐.

 

 

 

 

 

이상하게도 이번에도 플레먼은 맥락도 없이 낯선 괴물의 말을 아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직감적으로 어떤 감을 느꼈다고 해야 옳으리라.

 

 

 

 

 

-너는 면역자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들이 접촉하고 공격할 수 있는 표적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너는 너와의 유대감을 통해 다른 면역자에게도 그 ‘예외적 표적으로서의 특성’을 전염시킬 수 있는 듯하군.

 

 

 

 

 

오한이 느껴지며 소스라치는 감각이 들었다.

 

 

 

 

 

‘뭐라고?’

 

 

 

 

 

하지만 더 깊이 고민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금 헌터들을 향한 잔혹한 고문이 그 강도를 더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상황은 그에게 불안감을 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도련님!”

 

 

 

 

 

“아저씨!”

 

 

 

 

 

자신을 부르는 외침의 목소리에 플레먼의 눈은 동요함으로 흔들렸다.

 

 

 

 

 

아아, 안돼!

 

 

이곳으로 다가오면 안 된다.

 

 

 

 

 

허나 그에게도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왔다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리라.

 

 

그 음성의 방향과 위치를 감지한 괴물은 쾌감 넘치는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영리한 헬게이트 융합체는 플레먼의 동요함을 통해 먹잇감의 존재를 확인했다.

 

 

 

 

 

-요리를 시작하지.

 

 

 

 

 

레기온의 몸에서 뻗친 검은 칼날 수천 자루가 무한정의 형태 변화와 길이 연장을 자랑하며 칼춤을 추었다.

 

 

순식간에 건물 수십 채가 예리한 검날에 썰려 작은 큐브 조각들이 되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파열음이나 폭발조차도 발생하지 않는, 그야말로 일방적인 분해였다.

 

 

압도적인 그 전력 앞에 헌터들도, 플레먼도 저항의 의지를 상실했다.

 

 

건물 여럿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 순간에 세 사람의 모습이 훤히 노출되었다.

 

 

 

 

 

“안돼!”

 

 

 

 

 

양쪽 모두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플레먼은 검은 물질의 끈에 칭칭 감겨 포박되었다.

 

 

동시에 어니스트 일행을 향해서는 칼날들이 발사되었다.

 

 

 

 

 

-원본인 너는 남겨두고 나머지 셋은, 음, 적당히 팔다리를 잘라두면 되겠군.

 

 

 

 

 

입이 막혀 읍읍 소리를 내며 저항하는 플레먼.

 

 

처절히 울부짖는 그의 눈에서 혈액이 섞인 눈물이 흘렀다.

 

 

눈이 돌아간 어니스트는 발광하는 사람처럼 도련님을 부르며 달려들었다.

 

 

이성을 유지하던 쥬오디아와 신티가 그를 붙잡았다.

 

 

두 여장부는 어니스트라도 살리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를 힘으로 끌어내어 적의 공격 궤적을 피하려 한들 음속보다 빠른 레기온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쓸모없는 헌터들은, 그냥 죽어라.

 

 

 

 

 

사형선고가 내려지자마자 헌터들의 머리를 향해 검은 가시가 뻗어나갔다.

 

 

 

 

 

‘어째서, 어째서……, 우리는 왜 이런 끔찍한 잔을 마셔야 한단 말인가.’

 

 

 

 

 

어디에서부터 어긋났던 것일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던 것인가?

 

 

주마등의 순간에 뇌리로 수많은 상념이 스쳤다.

 

 

 

 

 

‘나는, 아니 우리는 무엇에서 실수했던 것일까?’

 

 

 

 

 

근력을 잃은 플레먼의 눈꺼풀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차마 다음 장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소리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일순간 다크포스의 농도가 급속도로 감소한 여파였다.

 

 

 

 

 

헌터들도, 어니스트 일행도, 레기온도, 본능적으로 시선이 굉음의 근원지로 돌아갔다.

 

 

 

 

 

세 개의 도시를 에워두르던 거대한 장벽의 한 구석이 파열음과 함께 무너졌다.

 

 

그저 금이 간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완전히 박살 나 과자 부스러기처럼 깨어진 상태였다.

 

 

 

 

 

 

 

 

촤르르륵.

 

 

 

 

 

동시에 헌터들과 어니스트 일행은 자신의 몸이 멀쩡한 것을 발견하였다.

 

 

장벽이 부서진 충격파로 순간 잊고 있었다.

 

 

자신들이 직전에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검은 빛이 도는 은색의 검 한 자루가 바닥에 꽂혀있었다.

 

 

속도가 빨라서 감지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그 검이 곡선 궤적을 그리며 진격하여 헌터들과 어니스트 일행을 찌르려던 검은 물질을 부순 듯했다.

 

 

 

 

 

 

 

 

콰아아앙.

 

 

 

 

 

이윽고 아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는 발사체가 대치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위협을 느낀 레기온은 재빨리 몸을 회피하였으나 보이지 않는 속도의 어떤 공격이 그것의 머리를 스쳤다.

 

 

가까스로 빗겨간 덕에 생존하였으나 레기온의 촉수들 대부분이 부서졌다.

 

 

 

 

 

그리고 레기온의 몸체에서 떨어지면 제어 능력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인지 플레먼과 헌터들은 묶던 결박들도 힘없이 녹아내렸다.

 

 

 

 

 

 

 

 

“도련님!”

 

 

 

 

 

어니스트가 플레먼에게 다가가 그를 붙들었다.

 

 

그는 거칠게 호흡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몽보다도 더한 시간이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플레먼과 어니스트의 귓가를 때렸다.

 

 

쥬오디아와 신티는 전장에 개입한 낯선 사내의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았다.

 

 

 

 

 

“다행히도 큰 일은 벌어지지 않은 듯하군요.”

 

 

 

 

 

플레먼과 어니스트도 어안이 벙벙한 채 그 장신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레기온은 뭔가를 직감한 것인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신세를…….’

 

 

 

 

 

이런 변방에서 상급 헌터도 아니고 무려 넘버원을 두 번이나 마주하다니.

 

 

그것도 헬게이트의 위협을 마주한 상황에서.

 

 

이런 인연을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대령님? 당신이 왜 직접 여기까지?”

 

 

 

 

 

반가운 감정과는 달리 의문의 말이 플레먼의 입에서 나왔다.

 

 

 

 

 

“대화는 상황 정리를 하고 마저 하도록 하죠.”

 

 

 

 

 

전투 코트 차림의 라이텔바흐는 여유로이 손을 풀었다.

 

 

저번과 달리 마스크나 고글 같은 안면 보호 장치는 없었다.

 

 

땅에 박혔던 검이 마치 자기장에 이끌리는 철이라도 되는 듯 뽑혀 나왔다.

 

 

그것은 제 주인의 손아귀로 자동으로 복귀하였다.

 

 

 

 

 

“한 3분 정도만 주시죠.”

 

 

 

 

 

이내 검날이 은빛과 보랏빛 섬광을 은은히 뿜으며 뜨겁게 달궈졌다.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이 금방 끝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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