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59회 출항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25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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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는 제안이 두렵고 망설여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늘 씩씩해 보이는 여걸의 모본, 쥬오디아 엘리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플레먼 아저씨와 라이텔바흐라는 이름의 그 큰 체격의 헌터는 상황이 급박하게 바뀌었음을 경고했다.
자신과 아저씨, 친구인 신티, 아저씨의 친구인 정원사 청년까지 포함해서 넷 모두가 심상치 않은 일에 휘말릴 것은 자명했다.
실제로 그것은 그날 체험했던 헬게이트 사태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우리가 ‘그들’이기에 일어난 일이겠지.”
쥬오디아에게도 이 사실은 전혀 낯설거나 신기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와 친구들의 특이성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특이성 때문에 언젠가는 세상으로부터 큰 손실과 손해를 입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들춰짐의 때가 돌연 예고 없이 찾아왔다.
이제 곧 당국도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가만히 이곳에 머물러만 있으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그 감옥에서 살아돌아온 자신들은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헬게이트 사태에 휘말린 민간인은 기본적으로 일정 기간 이상은 크고 작은 중독 증상을 앓는 것이 보통이다.
건강상의 큰 문제가 없을지라도 그 여파는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들에게는 그런 후유증이 전혀 남지 않았다.
호주 지역 정부는 이것을 의심스럽게 여기고 끝까지 수색하고 심문할 것이다.
더욱이 쥬오디아와 친구들의 가정사는 이미 당국의 데이터베이스 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 마당에 그들에게 의심스러운 특질이 발견되면 더욱 위험해진다.
“아저씨 말이 맞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위험에 노출되느니 차라리 불확실한 기회라도 도전해보는 편이 백 번 나으리라.
라이텔바흐라는 이름의 그 헌터의 말대로 따르는 편이 낫다.
그 날 헤어지기 전 그 사람은 사부로 삼아달라는 부탁에 이렇게 제안했었다.
“이곳을 떠나 우리와 계약을 맺는다면 너희의 부탁을 들어주마.”
그 말을 듣고 쥬오디아와 신티는 혼쾌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막상 깊이 고민해보니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들었다.
아무리 즉흥적이고 도전에 있어 과감한 쥬오디아였지만 현실적인 변수와 고민거리를 아예 제쳐놓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집을 떠나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떠나면 비밀 공동체에서 양육 중인 아이들과 이웃들은 어떻게 되지?
우리 넷이 떠나면 남은 자들은 미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이들뿐인데.
이대로 이웃들을 뒤에 남겨둬도 될까?
그리고 새로 정착할 곳에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곳에서 맞닥트릴 불확실성은 또 어떻고?
오늘날 같은 세상에서 안전 보장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
헬게이트 문제는?
앞으로 지난 번처럼 예상치 못한 위협과 마주할 일이 많아질까?
정부 당국의 감시의 눈은 또 어떡하지?
과연 호주를 떠나 새 신분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해결책일까?
그나마 그녀에게는 부양할 가족은 없었기에 그런 면에서는 짐이 가벼웠다.
할아버지 부부는 오래 전에 정부 당국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셨다.
친척들은 무서움과 공포 때문인지 모두 연을 끊었고 뿔뿔히 흩어지거나 이주해 지금은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아마 지난 몇십 년간 끊임없이 내전과 혼란과 테러 사건들이 임했고 판데믹 사태나 기아 사태도 창궐했으니 다른 지역에 거하는 친척들도 생사를 알 수 없다.
어쩌면 헬게이트 때문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부모님도 그녀가 청소년이었던 시절에 돌아가셨다.
공식적으로는 사고사였지만 그녀는 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쥬오디아는 그것이 실상 위장된 타살이라고 확신했다.
그자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앗아갈 때는 노골적으로 탈취해갔다면, 권세가 약해진 이후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부모님을 앗아갔으리라.
그녀 주변의 ‘동포들’의 경우도 거의 비슷했다.
공통적으로 그들이 잃은 가족들은 ‘어떤 같은 이유’로 인해 표적이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실종 또는 사고로 포장되었지만 당해 본 유가족들은 쉬쉬하면서도 실상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쥬오디아는 거실에 놓인 사진을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자신이 함께 앉아 있는 낡은 가족 사진이었다.
사진을 찍은 날로부터 벌써 십 년이 넘게 지났다.
그분들은 하늘나라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실까?
“엄마, 아빠. 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홀로 있는 자리에 서자 늘 담대함으로 자신을 무장했던 그녀는 가슴 깊이 감춰둔 유약함을 꺼내어 내려놓았다.
어찌 그녀라고 험한 세상과 그것이 주는 아픔이 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로움이 깊이 사무쳤다.
“견뎌보려고 애써 무섭지 않은 척 했는데, 여전히 쉽지가 않네요.”
부모님과 사별한 뒤 그녀 곁에는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친구들, 신티와 아저씨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마 그들도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같은 외로움 가운데 있었겠지.
쓰라림과 외로움 속에서 견뎌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다행히 운동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대륙 단위의 지역 대표 선수가 되었고 그 덕에 스스로 생계를 지탱하는 문제는 그런대로 해결되었다.
들풀처럼 억세고 생활력 좋은 성격 덕에 험난한 세상에서 고개 펴고 견뎌내는 데도 금세 익숙해졌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쇠잔함과 지침까지도 면한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네도, 신티도, 많이 불안해하고 있겠지.’
이런 때일수록 자신이 튼튼하게 중심을 잡아야 의지할 구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각오로 쥬오디아는 일부러 자신을 우격다짐으로 일으켜세웠다.
모두의 결정이 한 마음으로 모이는 즉시 여행은 시작된다.
포로로 묶여있던 곳에서 벗어나면 아마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광야 같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아무리 은근한 차별과 핍박으로 점철된 자유 없는 세상이었다지만, 그래도 호주는 그간 위험의 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모르는 이들을 믿고 몸을 의탁해야 한다.
더는 갈팡질팡하지 말고 확실하게 방향성을 정하고 각오와 준비를 시작하자.
[두려워하지 말아라, 딸아.]
깊은 영혼 한 구석에서 아주 작은 메아리가 울리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마음의 소리인지, 그저 생각의 잔상인지는 몰라도 첩첩산중으로 쌓여있던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안절부절한 생각들이 아주 조금은 씻기는 듯했다.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가 제안하는 대로 따라가거라. 나도 그곳에 너희와 함께 따라가겠다.]
흔들렸던 쥬오디아의 생각이 어느 정도 편안하게 정리되었다.
사부가 되어줄 그 사람이 부디 자신들과 아저씨네 집에 친절을 베풀어줄 선량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
플레먼은 어니스트에게 자신의 결정을 공고히 알렸다.
“라이텔바흐 씨의 계약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분이 내게 출판 사업을 지원하는 후원자를 자처했는데,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고 봐.”
“오, 그러면 대령님 제안대로 이참에 아예 이민하는 것인가요?”
“사실상 그렇다고 봐야겠지.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 아마 새로운 신분을 생성하는 작업도 필요할거야. 그 일들은 헌터 협회 쪽에서 직원들을 보내서 해결해주기로 했다더라.”
정작 중요한 건 어니스트의 의견이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어니스트.”
“저야 당연히 도련님과 함께 동행해야죠. 제 가족이라고는 도련님 밖에 없는 걸요. 게다가 저 없으시면 생활하는 데 많이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가족이라는 표현에 플레먼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 단어다.
“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네 말대로 내가 조금 생활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당분간은 너 없이 좀 자립하는 편이 낫겠어. 아마도 이민 정착지에서 생활할 때 다른 룸메이트들도 만날 테니 그들이랑 지내는 편이 낫겠지.”
“도련님이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네 그 뛰어난 재능은 다른 사람에게 잠시 빌려주는 편이 낫겠어.”
“설마 대령님이 저를 고용하는 것 때문인가요? 그 일은 파트 타임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니, 이왕 할거면 확실하게 하는 편이 낫겠지.”
“설마.”
“참고로 이건 내 제안이야. 네가 라이텔바흐 씨의 전속 살림 보조자 일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니스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제가 필요없어지신 건가요?”
울망울망하는 그 표정에 플레먼은 난처해하며 손을 저었다.
“설마. 그게 아니라 라이텔바흐 씨를 네가 좀 잘 맡아줬으면 한다는 뜻이지. 어쨌건 두 번이나 구해주신 생명의 은인이니 뭐라도 갚는 모양새가 좋지 않겠어? 그리고 이왕이면.”
플레먼은 다음 말을 잇기 전에 조심스럽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 사람에 대해서 우리도 좀 자세히 알아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해서.”
“와우, 그러면 제가 도련님의 스파이가 되어서 그분을 조사하는 건가요?”
“스파이라니, 너무 과한 표현이다. 대단한 일을 할 필요는 없고 그저 친구가 되어주어서 서로를 더 알아간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헌터들도 우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데 우리도 헌터들에 대해 그렇게 접근해야 공정하겠지.”
“저야 좋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잘 맞추었다.
“미안하다, 어니스트.”
플레먼은 나직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니스트는 도련님의 작은 체구가 왠지 더 위축된 것 같아보여 마음이 쓰였다.
“나 때문에 괜히 너까지 매번 어려운 일에 휘말리는 것 같아서.”
솔직한 고백이었다.
지난 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어니스트는 자신과 같이 있다 봉변을 겪었다.
그것이 단순히 우연이었으면 죄책감이 덜했겠지.
그러나 레기온의 말에 의하면 어니스트 또한 ‘특이성’을 획득한 면역자다.
그 특이성을 지닌 자의 숫자, 곧 ‘자유도’가 4라고 했으니 자신 곁에 있는 셋을 포함해 네 명만이 특이성을 지니고 있으리라.
‘아마도 그 특이성이란 것은 내게서 시작된 것이겠지.’
원리는 몰라도 전염이 가능한 속성이리라.
플레먼은 레기온과 라이텔바흐의 증언들을 조합해본 뒤 자신의 지난 경험에 비춰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필시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어떤 특질이 자신과 영적인 친밀한 접촉을 나눈 면역자 셋에게 전염된 것이다.
결국 자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을 끼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예전에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어니스트가 두 손을 도련님의 양 어깨 위에 얹었다.
“제가 예전에 약속했잖아요. 항상 섬기며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어니스트. 넌 내게 빚진 게 없어.”
“아뇨, 이미 저도 다 알아요.”
과거의 어리석은 실수.
어니스트는 아직도 그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우매했고 욕심에 넘어졌으며 주인 아저씨 집안에 해를 입혔다.
그런 멍청했던 소년을 품어주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플레먼이었다.
그가 허물을 덮고 용서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어니스트는 죄책에 짓눌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저랑 같이 가요. 무슨 일이든 맡겨주시는대로 잘 해낼게요. 설령 그게 라이텔바흐 헌터를 감시하거나 염탐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도련님이 시키시면 멋지게 잘 해내볼게요.”
그러자 용기가 조금 북돋아진 것인지 플레먼의 수심도 한켠 걷혔다.
“고마워.”
쑥스러웠는지 조금 얼굴이 붉어진 플레먼.
‘늘 그랬듯, 떠나서도 한 번 잘 해보자.’
어느 덧 모험이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쥬오디아도, 신티도, 라이텔바흐를 따라나서기로 마음을 굳힌 채 결정을 알렸다.
유일하게 마음에 쓰이는 부분이라면 비밀 공동체의 남은 식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떠나기 전 마지막 안배를 걸어두었다.
비밀의 유산들을 그들 품에 하나씩 안겨두었다.
부디 양육자인 네 사람이 떠난 뒤로도 보이지 않는 힘이 이끌려 그들이 바른 길로 인도받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 보장하긴 어려웠으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공동체의 식구들은 네 사람에게 조심히 잘 다녀올 것을 부탁하며 인사했다.
그들은 언젠가 재회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저희가 없는 동안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언제까지고 묶여 있어서는 안 되었다.
네 사람은 이후 가용 재산 처분 및 기본적인 준비를 마친 뒤 짐을 꾸렸다.
그리고 약속한 당일, 밤 중에 몰래 헌터 협회 측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미리 네 사람에게 필요한 행정 절차 및 비밀 작업들을 몰래 완수해둔 상태였다.
덕분에 복잡한 일들로 골머리를 썩일 필요 없이 몸만 따라나서면 되게 되었다.
“당국 측에 꼬리를 밟혀 일이 꼬이기 전에 빠르게 움직이도록 합시다.”
파견된 요원들은 네 사람을 데리고 비밀 경로로 차를 타고 이동한 뒤 어떤 항구에 도달했다.
호주 내에 세워진 비정부 조직이 운영하는 항로로 주로 헌터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이 이용하는 통로였다.
“준비는 나름 많이 해오셨지만, 사실 생활 상의 염려나 신분 상의 문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네 분 각자 정식으로 고용되거나 지원을 받으실 테니 물질적으로는 충분한 공급이 가능할 겁니다.”
안내자들의 말을 들으니 우려의 마음이 한풀 꺾였다.
배에 올라탄 그들은 멀어져가는 대륙의 모습을 쓸쓸히 구경하였다.
‘다시 돌아올 때는 부디 더 평화로운 모습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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