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72회 담무스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04 | 회차평점 ![]() |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여전히 다시 돌아서라. 그리하면 그들이 행하는 더 큰 가증한 일들을 네가 보리라] 하시더라. 그때에 그분께서 나를 데리고 북쪽을 향한 주의 집 문의 입구에 이르셨는데, 보라, 거기에 여자들이 앉아서 담무스를 위하여 슬피 울고 있더라.
(에스겔서 8장 13-14절)
*
거대한 폭발이 바벨탑을 집어삼킨 후 마침내 폭풍우는 지나가고 남은 잔해가 드러났다. 1층부터 98층까지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분해되었고 99층의 대부분도 없어졌고 그것이 점유하던 공간은 다시 지구 대기권으로 환원되었다. 무수한 층 주인들의 군대는 시신조차 없이 증발하였고 극소수의 유닛만 반파된 채 겨우 살아남았다.
-굉장하시네요.-
전열을 가다듬으며 휴식 중인 라이텔바흐 앞에 세미라미스가 나타났다. 그녀도 폭발에 휘말려 약간의 피해를 당한 듯했으나 재생이 가능한 수준이었는지 사지 멀쩡한 모습을 유지했다. 라이텔바흐는 그녀와 일대일로 직면하였다.
-과연 당신의 오의……, 만일 이곳이 아니라 100층에 올라가 충분히 안티-게이팅 파워를 증폭 받은 상태에서 충분한 예열과 함께 제대로 썼더라면, 그리고 분산형이 아니라 집중형으로 농축시켰다면, 100층의 주인 스무 명 이상을 상대로도 즉사시킬 수 있었겠죠.-
그녀의 평가는 과장이 아니었다. 마카베우스 해머는 본래 광역 공격기가 아니다. 대인전에서 사용되는 기술이며 제대로 힘을 집중시키면 그 어떤 어비씨언이나 헬게이트도 결코 막아낼 수 없다. 실제로 라이텔바흐는 과거 그 ‘최대의 숙적’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을 때도 바로 이 기술의 전구체에 해당하는 원시 형태의 프로토타입 기술을 시도하였고 이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더욱이 원래는 예열 과정에서 대단한 준비와 예비 작업이 필요하므로 지금처럼 담무스와 다른 층 주인들을 상대로 싸우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쓰면 제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악조건에서 라이텔바흐는 소중한 한 번의 기회를 소모하였다. 집중 형태가 아닌 광역 기의 형태로 힘을 최대한 흩뿌렸기에 위력의 농도가 낮아졌고 그 탓에 세미라미스는 죽지 않고 견뎌내었다. 나머지 군대의 대부분은 소멸하였고 층들도 파괴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만.
-덕분에 제 계획이 어그러졌네요. 원래라면 이 군대로 100층의 주인을 능히 열 번도 넘게 공략할 것을 상정했건만, 당신이 여기서 오의를 소모해 준 덕분에 무산되고 말았어요.-
이 말을 들으니 라이텔바흐로서는 한편으로 안심되기도 했다. 확실히 조금 전에 쓰러트린 군대의 전력이 100층의 주인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것만은 아니었다.
-대신에 이번 싸움에서는 다시 오의를 쓰지 못하겠죠.-
세미라미스가 간파한 대로 마카베우스 해머는 오로지 한 번의 전투에서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다시 쓰기 위해서는 탑 전투를 마치고 집에 귀환해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한다. 즉 라이텔바흐는 100층의 주인과 탑을 단번에 파괴할 비장의 카드를 여기서 써버린 셈이다. 일종의 등가교환이었다.
‘저 관리자, 탑의 여왕.’
라이텔바흐는 찬찬히 세미라미스를 감찰안과 분석안으로 원격 해부하였다. 그녀 역시 담무스와 마찬가지로 헬게이트들이 복합되어 만들어진 융합체가 그 본질이었다. 이두메아, 바블로니아, 타이레, 그리고 레기온과 같은 부류인 게로지. 허나 완성도나 질량에 있어서 그들 모두를 몇 단계 이상 뛰어넘었다.
‘일단 방금 그 괴물 꼬마와는 달리 S급 이상의 헬게이트들은 저 속에 포함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개수였다. 바블로니아와 그 자매들만 해도 10만 개가량의 헬게이트가 융합된 존재였다. 세미라미스의 경우 구성 원소들의 질적 수준은 그것들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개수가 아득한 수준이었다. 최소 천만 개. 하급부터 중급을 넘어 상급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헬게이트 천만 개가 하나로 융합된 괴이한 축퇴로였다.
‘적은 개수에 높은 질, 많은 개수에 낮은 질, 어느 쪽 복합체가 더 위험하려나.’
라이텔바흐는 차분히 계산하였다.
-질문이 있어요.-
세미라미스가 말을 걸어오자, 라이텔바흐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괴물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잠시 변덕을 좀 부려도 손해볼 일은 없겠지.
-바알님과 몰렉님께 대체 무슨 짓을 하셨죠?-
“바알과 몰렉? 아, 서쪽과 남쪽 탑의 우두머리들 말인가?”
라이텔바흐는 무감각하게 귀를 후비적거렸다.
“죽였지. 정확히는 팔과 다리와 몸통과 머리를 모두 해체하여 심장 파츠와 두뇌 코어를 쪼개어 분리했다. 목숨만은 보존되도록 하되 해체된 부위들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결박하였다. 그리고 그 코어 안에 내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농축하여 대량으로 주입하였다.”
최근 라이텔바흐의 안티-게이팅 에너지 회복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누구 덕분에 잘 먹고 잘 쉬고 호강한 덕분이었는데 그 영향이 생각 이상으로 컸는지 그의 전력이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극 상향되었다.
바알과 몰렉을 처단했을 때도 그는 반송장 속에 대량의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주입하여 농축했다. 이미 쓰러진 적을 상대로 시신 처리 작업을 하는 것이기에 시간은 넉넉했다. 그는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충분히 주입한 뒤에 조금 휴식을 취하고 다시 회복되면 다시 주입하기를 오랫동안 거듭하였다. 결과적으로 처단된 두 탑 주인의 몸에는 라이텔바흐가 몇백 번의 치열한 전투에서 소모할 분량의 힘이 고농도로 압축되었고 그대로 굳어졌다.
이 힘은 라이텔바흐가 원하는 시점에 한꺼번에 균형을 깨트리고 폭발하도록 설정된 일종의 시한폭탄이었다. 그는 동쪽 탑을 직접 치기 시작한 시점에 이 폭탄을 발동하였고 그의 계획대로 바알과 몰렉은 자기 탑과 함께 장렬하게 파열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크윽.-
세미라미스는 더 이상 라이텔바흐와의 말장난은 통하지 않음을 인지했다. 가능하면 적절히 제압한 뒤 살려두어 낭군님으로 삼고 싶었지만, 더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자칫하면 세미라미스 자신도 저 흑재규어에게 처단당할 판이었다.
-당신은 왜 우리를 치는 것이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우리의 존재의의는 인간계를 징벌하는 도구, 단지 그뿐입니다. 당신이라면 인간을 징벌해야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더 뼈저리게 이해하시리라고 기대했어요.-
세미라미스는 동정심을 통해 상대를 꾀어보려고 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무참히 유린한 건 우리 헬게이트들도, 어비씨언들도 아닌, 인간들이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러니 우린 싸울 필요가 없어요. 제가 당신에게 보여드릴게요. 당신을 비참한 구덩이에서 괴롭히고 학대했던 인간계가 고통스럽게 그 삯을 받는 모습을요.-
“뭔가 착각하고 있군.”
라이텔바흐는 거친 장갑을 통해 구르상의 칼날을 날카롭게 다듬었다.
“잘못한 이들에 대한 합당한 징벌은 인간들의 절차를 통해 인간의 손으로 이뤄질 것이다. 너희 미물들이 여기에 참여할 몫은 없어.”
세미라미스는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담무스!-
이에 숨어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한 유닛이 다시 나타났다.
-헤헷, 방금 공격은 인상 깊었어, 라이텔바흐.-
99층의 주인, 담무스.
세미라미스와 탑 전체의 주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지막 걸작으로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오롯이 단 한 번만 만들어낼 수 있는 최강의 전투 유닛이다. 라이텔바흐는 과거의 그 숙적과 담무스를 비교해 보았다. 단순히 절대적인 능력치만 놓고 보면 그때 그 시절의 숙적보다는 지금의 담무스의 스펙이 더 우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망할 용은 악착같이 진화하는 특성을 보였지.’
그런 악독함에 비하면 담무스의 독기는 상대적으로 귀여운 수준이다.
“지금의 내게 너는 상대가 되지 않아.”
라이텔바흐는 링길과 구르상을 들고 진격하여 담무스를 뒤로 몰아붙였다. 담무스는 마카베우스 해머의 여파로 몸이 반파되었다가 다시 재생된 영향인지 이제 인간 꼬마의 모습이 아닌 흉측한 인간형 괴물의 모습이 된 상태였다. 언어로 형용하거나 묘사하기가 당최 어려운 매우 가증스러운 형태였다. 형태 변형과 더불어 전력도 상승한 것인지 담무스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라이텔바흐와 겨루었다.
-담무스, 조력할게요.-
세미라미스는 이 싸움이 불리할 걸 알았는지 자신의 방식대로 동료에게 협업했다. 그녀는 살아남은 층 주인들 중 90층 이상의 상위 유닛들을 모아 융합 작업에 돌입하였다. 곧 두 기의 복합체 괴물이 생성되었다. 세미라미스와 그녀 속의 두 관리자의 힘을 이어받은 그 두 괴물은 몇백 배 이상으로 전투력이 향상된 채 라이텔바흐와의 싸움에 투입되었다.
-참견하지 마, 세미.-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라이텔바흐는 당신보다 강합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래서 더 싸워보고 싶은걸.-
광기에 사로잡힌 담무스는 자신의 모든 전략과 무기를 동원하여 격하게 합을 나누었다. 라이텔바흐는 무리하지 않고 힘을 조절하며 적절히 간을 보았다. 전력을 다하면 바로 쓰러트릴 자신이 있으나 이미 오의를 소모한 상태에서 플랜B에 해당하는 다른 기술들마저 소비하고 싶진 않았다. 더욱이 탑의 주인이 위에서 지켜보는 마당에 전력 노출은 최소화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100층의 주인을 잡을 에너지도 남겨두긴 해야 하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확실히 힘을 아껴가며 싸우기에는 위험하다.’
이 순간에도 두 최상위 유닛 사이에서는 수만 번의 합이 오갔다. 한 번 칼이 부딪칠 때마다 99층의 남은 부분들을 반으로 가를 거대한 격진이 임했다. 지형지물을 송두리째 재구성하는 어마어마한 신화 급의 싸움이었다. 마카베우스 해머의 여파에서 간신히 몸을 보신한 헌터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라이텔바흐 협회장의 전투력이 저 정도일 줄이야.”
“전혀 밀리지 않는군. 심지어 다른 두 적이 보조 공격을 가하는 와중에도.”
그때 살아남은 소수의 라파임들이 헌터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오의 공격의 여파로 많이 약화된 상태였기에 헌터들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라이텔바흐가 담무스와 전쟁하는 동안 헌터들은 다른 잔챙이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맡았다.
싸움이 몇 분 진행되었을 무렵, 라이텔바흐의 두 검이 세미라미스의 두 사역마를 반으로 갈랐다. 이때부터 싸움은 급격히 기울었다. 담무스는 라이텔바흐의 발차기와 철권에 맞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어서 라이텔바흐는 섬멸물질들을 대량으로 방출한 뒤 거대한 감옥을 만들고 그 모든 공격을 일제히 담무스에게 집중하였다. 수천 개의 꼬챙이에 꽂힌 짐승처럼 담무스는 고슴도치 신세가 되었다.
-크아악!-
때를 놓치지 않고 라이텔바흐는 후방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보조를 겨우 이어가던 세미라미스에게 링길을 던졌다. 그녀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벤 뒤 청색의 수정검은 다시 주인의 손에 복귀하였다.
-끄아아악!-
미리 라이텔바흐가 링길 속에 심은 초 고농도 백파의 영향으로 그녀의 몸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땅으로 던져진 세미라미스. 그녀는 마치 이세벨 여왕이 탑에서 떨어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처럼 몰락의 구렁텅이로 추락했다.
세미라미스와 담무스가 기운을 회복할 틈을 주지 않고 라이텔바흐는 마지막 일격을 개시하였다. 담무스를 박제하는 데 쓰였던 대량의 섬멸물질이 모두 회수되어 라이텔바흐의 헌터웨폰인 구르상을 에워둘렀다. 검은 거대한 창의 형태가 되었다. 라이텔바흐는 마치 비느하스가 시므리와 고스비를 함께 창으로 꿰뚫어 처단하였던 것처럼 (민수기 25:7-8) 창 하나로 한 번에 탑의 여왕과 99층의 주인을 찔러 하나로 연결된 꼬챙이를 만들었다.
-아아아아악!-
-끄에에엑!-
비참하게 야생 동물처럼 멱 따는 소리를 내며 단말마를 내지른 두 헬게이트 복합체들. 구르상은 이렇게 자신에게 찔린 희생양을 섬멸물질을 매개로 침식하여 송두리째 갈아 집어삼키는 흡수 특성을 지녔다. 회복할 기회도 없이 세미라미스와 담무스의 몸채는 블랙홀에 삼켜지는 별마냥 부스러져 찌그러졌고 곧 자신들을 구성하는 헬게이트들과 함께 라이텔바흐의 검에 짓이겨져 최후를 맞이했다.
파아아아앗.
마침내 모든 원소를 잃고 산산조각이 난 두 존재는 사방으로 대량의 검은 피를 흩뿌리며 원자 단위로 환원되었다. 그들에게서 튄 피가 라이텔바흐의 옷과 얼굴에 튀어 그를 더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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