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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71회 오의(奧義)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02 | 회차평점 0 0

 

 

 

라이텔바흐가 이곳에 오르기까지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첫째, 그는 지난번 두 번의 탑 공략 때 옛 스페인이 있던 이베리아반도에 출현한 서쪽의 바벨탑을 정복했다. 둘째, 이어서 그는 잠깐의 휴식만 취한 뒤 곧바로 헌터 협회 소유 전투기를 타고 이동하여 아프리카 남부의 남쪽 바벨탑을 공략했다. 그에게 합류한 탑 공략 대원들이 그와 동행하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서쪽 탑 공략에 시간이 소모되었고 이어서 또 한 달이 남쪽에서 소모되었다.

 

 

두 개의 탑의 최정상부 곧 심장부에 이르렀을 때 싸움의 진실을 모두 목격한 존재는 라이텔바흐 본인뿐이었다. 나머지 헌터들은 최정상부 직전에 이르기까지 길을 열어주는 일을 하였다. 탑의 주인을 상대로 하는 싸움은 너무 위험했기에 훈련 차원으로 동참할 성격이 아니었다. 홀로 탑의 주인과 맞닥트린 라이텔바흐는 끝내 치열한 싸움 후 두 주인을 정복하였다.

 

 

그때 그는 모종의 장치를 주인들의 시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쯤 다져진 고기처럼 된 반송장의 몸체 속에 심어두었다. 나머지 탑의 군단과 하부층들과 주인의 힘 대부분은 파괴되었기에 탑이 다시 침식의 기능을 되찾을 도리는 없었다. 주인 자체가 생명을 잃지는 않았기에 탑들은 뼈대만은 유지하였으나 이마저도 부활을 차단하기 위한 라이텔바흐의 계략이었다. 정확히 한 번에 세 탑을 동시에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의 연맹을 통한 탑의 재건을 막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후 동쪽 탑에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헌터들이 98층에 도달했을 때 아리아드네의 실이 소진되었다. 이때부터 라이텔바흐는 휴식을 멈추고 초읽기에 돌입하였다. 헌터들의 생명 반응에 이상이 생길 것으로 느껴지면 즉각 개입하도록 준비하였다. 아울러 그는 1층의 입구에 서서 층들에 발생하는 변화를 예의주시하였다.

 

 

과연 헌터들이 99층에 발을 디딘 것으로 예측되는 시점이 이르자 1층에서도 어떤 기묘한 변화가 개시되었다. 1층의 주인 라파임(Raphaim). 그 존재가 부활하였는데 보통의 리젠 속도보다 훨씬 빠르고 신속하게 생성되었다. 그러더니 일순간 라파임은 공중으로 채가듯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시 땅이 에너지를 집중시켜 라파임의 몸을 만들어내었다. 이후 다시 채감이 일어났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었는데 그 빈도가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었다. 나중에는 적어도 초당 수억 기 이상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듯했다.

 

 

‘이놈들 봐라.’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탑의 관리자, 주인의 섭정이 봉인에서 해방된 탓이다. 이미 두 번에 걸쳐 그런 유형의 괴이체들을 탑 안에서 죽여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완벽하게 죽지는 않고 유령처럼 탑을 스르르 빠져나갔기에 몹시 찝찝함이 남은 바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낸다.’

 

 

라이텔바흐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1층의 주인을 죽여야만 2층의 문이 열린다. 이는 라이텔바흐 본인조차도 우회할 수 없는 탑의 법칙이다. 아리아드네의 실이 있었더라면 달랐겠으나 그 실은 이미 소모되었다. 그런데 1층의 주인이 죽이기도 전에 빠르게 유사-휴거를 당하고 있으니 무슨 수로 문을 열까?

 

 

진중한 고민과 사색이 이어졌으나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이텔바흐는 아주 간결하게, 그다운 방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주 과격하지만, 무식하고 확실한 해법.

 

 

“층을 송두리째 태워버리지 뭐.”

 

 

그 생각으로 그는 1층 전체를 백파 방출로 증발시켜 버렸다. 탑과 헬게이트라는 공간 안에서만큼은 무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권능이었다. 대지와 대기 전체가 핵폭탄에 휘말린 듯 녹아내려 승화되었고 당연히 그 여파로 라파임도 부활하자마자 일거에 죽임을 당했다.

 

 

이후에도 라이텔바흐는 1초도 휴식하지 않고 곧바로 진격하고 또 진격했다. 그는 각 층의 주인과 군단을 일일이 잡아내려는 불필요한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층 전체를 자신의 겁화로 소멸시킬 뿐이었다. 자연히 군단과 주인도 같이 휘말려서 즈려밟혔다.

 

 

그렇게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그는 신속하게 탑을 올랐다. 애초에 탑 공략에는 다른 대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헌터 수장들에게는 굳이 이런 사실까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만일 알았더라면 라이텔바흐 자신더러 혼자 독박을 쓰라고 했을 테니까. 그는 자신이 최근 어떤 유익한 일들로 인해 힘이 대폭 성장했음을 상급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숨기는 중이었다.

 

 

그가 이런 힘을 갖고도 굳이 탑 공략대더러 수고를 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을 한 차원 더 강력하게 진보시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각인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헌터 수장들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

 

 

 

 

 

-굉장하군요.-

 

 

세미라미스는 음란한 여인이 극치를 느끼며 신음하듯 격정적으로 감탄했다. 그녀는 이 위험천만한 사내의 등장에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에 수반되는 마조히스트적인 즐거움도 같이 만끽하는 듯했다. 여러모로 지옥에서 생성된 부산물다운 행태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나의 낭군님.-

 

 

라이텔바흐는 그녀의 더러운 발설들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감찰안을 통해 그녀와 그녀의 군단을 분석할 뿐이었다.

 

 

‘강력한 존재다.’

 

 

어쩌면 SSS랭크 던전을 무너뜨릴 때 만났던 이두메아, 바블로니아, 타이레를 아득히 넘어서는 객체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그녀의 이능은 언뜻 느껴지는 수준만 해도 그때의 세 여왕을 초월하였다. 만일 숨긴 패까지 다 꺼낸다면 어느 수준일지 예측하기 어렵겠다.

 

 

‘이전 탑의 관리자들보다 더 진보한 존재인가?’

 

 

라이텔바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1~98층의 주인들로 구성된 대군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경계하는 대상은 오로지 세미라미스였다. 그 특수 능력이야말로 가장 골칫거리가 될 테니까. 내버려둔다면 100층의 주인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전투력보다도 오히려 저런 능력들이 더 위험하지.’

 

 

세미라미스는 그 순간 속으로 고뇌하였다. 자신을 흥분케 하는 매력적인 폭력성을 지닌 저 심연파괴자의 등장에 기쁜 면도 있었으나 동시에 라이텔바흐가 모든 층을 부순 바람에 곤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층들의 대지들이야말로 세미라미스가 자신의 음란한 창조성을 발현하는 매개체요 자궁들이었으니까.

 

 

-어서 빨리 각 층의 땅들을 복구해야겠네요.-

 

 

하지만 그녀만의 권능으로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저의 나머지 두 자매의 권능을 계승하도록 하죠.-

 

 

남쪽 탑과 서쪽 탑이 정복당할 때 라이텔바흐에 의해 육신을 잃은 두 명의 관리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버리고 재빨리 유령체의 형태로 달아났다. 그리고 탑의 관리자들은 네 개의 탑 사이에서 자유로이 유령체를 전송할 수 있는 특수성을 지녔다. 이런 이점에 기인하여 세미라미스는 죽은 두 자매의 넋을 자신에게로 거둬들여 진혼제를 벌이고자 하였다.

 

 

-부탁이야, 나에게 너희의 힘을 더해줘, 자매들아.-

 

 

이에 유령처럼 생긴 두 개의 괴이체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세미라미스의 몸체에 그대로 겹쳐 하나로 빙의되었다.

 

 

-세미, 우리의 힘을 네게 모두 전승할게.-

 

 

-우리의 권능을 모아서 이 탑을 다시 부활시켜.-

 

 

이에 아스다롯과 아세라가 세미라미스와 하나로 뒤엉켜 역겨운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자신만만해진 세미라미스는 즉시 1층부터 99층까지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이텔바흐가 이 자리에 있기에 그를 제지할 필요도 있었다. 그녀는 힘을 적절히 나누어 일부는 라이텔바흐를 견제하는데, 그리고 나머지는 탑을 복구하는 데에 쓰기로 했다.

 

 

-자, 낭군님, 당신을 시험하도록 할게요. 부디 저를 더 자극해 주시길.-

 

 

세미라미스는 음란한 입술을 가진 요부였으나 그녀의 두뇌는 사령관의 그것 이상으로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녀는 모든 군대가 라이텔바흐와 먼 거리를 유지하도록 퇴각시켰다. 도주가 아닌 안전을 위한 작전이었다. 이곳 99층은 지구의 열권 전체를 아공간 압축을 통해 함축시킨 영역이었기에 밖에서 볼 때는 좁은 구역이나 내부에서는 가히 지구 대기권 전체의 부피에 필적하는 공간이었다. 이 안에 무수한 세미라미스의 창조물들이 즐비하였다. 비록 기습으로 인해 적잖은 군대를 잃긴 했으나 라이텔바흐도 회심의 공격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기에 같은 공격을 여러 번 반복하기는 어려웠다.

 

 

-주의한다면 소모는 최소화할 수 있죠.-

 

 

이후 거대한 쌍곡면 형태로 라이텔바흐를 중심에 가둬둔 대군의 진은 자신들의 능력을 모두 모아 거대한 에너지 포를 예열하였다. 특별히 1층부터 98층의 주인들은 같은 객체가 모이면 공명을 통해 더욱 힘을 증폭시키는 특성이 있었다. 고로 현재 손에 손을 잡고 하나로 연합된 이들은 원래 단독으로 층을 지킬 때보다 몇 배, 아니 몇천 배로 상향된 상태였다.

 

 

이런 괴물들이 혼신을 다하여 흑파, 어비쓰론, 다크포스를 압축하여 임계점 너머의 압축 탄을 생성하였다. 그들은 세미라미스의 신호가 떨어지자 일제히 검은 빔을 방출하였다.

 

 

오발탄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거리 걱정도 없었다. 이는 세미라미스의 고유 권능이자 이곳 99층에서만 쓸 수 있는 능력인 ‘공간 렌즈’ 때문이었다. 그 어떤 공격도 축지법을 거치듯 단숨에 라이텔바흐 부근으로 빠르게 진격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포격하건 마치 돋보기가 햇빛을 모으듯 정확하게 라이텔바흐를 향해서만 압축할 수 있다. 이런 공격이 무수히 많이 쏘아졌으며 그 모든 것이 공명하며 증폭되었다. 라이텔바흐는 세미라미스가 창조해 낸 지름 5km 규모의 공간 렌즈의 정중앙에 놓인 채 사방에서 모이는 돋보기의 빛에 질식되는 개미마냥 홍수에 엄몰 되었다.

 

 

“라이텔바흐 협회장!”

 

 

헌터들은 당황하였다. 일단 같은 좌표에 그들도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라이텔바흐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는 해도 저런 엄청난 공격에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을 수는 없다.

 

 

“허둥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라이텔바흐는 엄중한 목소리로 헌터들의 기강을 붙들었다.

 

 

“내가 맡긴 무기를 내놔라.”

 

 

“알겠다.”

 

 

헌터들은 자기들 슈트의 중앙부, 정확히는 자기 심장이 있는 가슴 쪽 맨살에 맞닿아 있던 한 물건들을 꺼냈다. 그것들은 조각이었는데 바로 이것을 통해 라이텔바흐는 멀리 있던 동료들의 생명 반응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각들은 자기장에 의해 하나로 결합하였다. 그 뼈대를 소유하던 한 협회장이 조각들을 뼈대 위로 회수하였고 이내 무기는 조립된 형태를 되찾았다.

 

 

헌터들이 라이텔바흐가 자신을 구해주러 올 것을 확신했던 것도 바로 이 무기라는 보험 덕분이었다. 라이텔바흐의 무기 중 가장 진귀한 것이니 설령 동료들은 소모할 수 있다 쳐도 저 무기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한 조각의 소실만으로도 무기의 기능을 낼 수 없으니, 그는 단 한 명의 소실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라이텔바흐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보증을 해주었다.

 

 

“내게로 오라.”

 

 

명령어에 반응한 인공지능형 에고 소드가 라이텔바흐의 안티-게이팅 에너지에 반응하여 그에게로 이동하였다. 그는 민첩하게 검의 손잡이를 낚아챘다. 이윽고 검은 원래의 본모습을 드러내며 변형되었다. 칠흑처럼 검은색의 대검.

 

 

“구르상(Gurthang).”

 

 

라이텔바흐는 자신이 창조한 헌터웨폰 구르상 내부로 한량없이 백파 분리 에너지를 응집시켰다. 총 일곱 종류의 광원이 각기 다른 색채의 백파를 머금은 채 찬란하게 밀도와 광도를 높여나갔다. 마치 무지개의 영광을 보는 것 같았다. 라이텔바흐는 안티-게이팅 에너지로 거대한 불의 회오리바람을 생성하여 검으로부터 방출하였다. 그리고 각 광원체는 용솟음치는 불기둥 속에서 입자 가속기의 영향을 받은 소립자마냥 총알처럼 쏘아졌다.

 

 

“메노라.”

 

 

라이텔바흐의 또다른 비밀 기술이 발동되었다. 일곱 기둥의 빛의 탄환은 얽히고 또 얽히면서 더욱 거대한 폭풍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공간 렌즈라는 경계면에 이르자 두 권세가 충돌하였다. 라이텔바흐의 불로 된 메노라에 담긴 일곱 섬광과 이에 대적하는 무수한 적군의 검은 빔들의 홍수.

 

 

 

 

 

콰아아아아아앙.

 

 

 

 

 

잔인한 메노라의 섬광들이 모든 검은 섬광들을 잘게 쪼개어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거인이 작은 물맷돌에 맞고 쓰러지듯, 세미라미스의 군대가 쏜 암흑포의 향연, 하늘을 덮던 그 무수한 파멸의 힘들은 바람 앞의 안개처럼 산개하였다. 헌터들을 향해서는 단 한 발의 파편도 닿지 않았다.

 

 

힘의 충돌 결과 공간 렌즈가 산산이 깨어졌다.

 

 

 

 

 

-라이텔바흐!-

 

 

구르상이 과열로 인해 잠시 비활성화된 틈에 한 존재가 초음속으로 진격하여 라이텔바흐에게로 다가왔다. 헌터들은 그 충격파를 감지하고는 재빨리 뒤로 후퇴하였다. 방심하던 라이텔바흐는 그 지나치게 강력한 유닛을 가까스로 칼로 쳐서 튕겨내었다.

 

 

-헤헤, 네가 바로 그 유명한 흑 재규어, 라이텔바흐 벤 키르헤른스트로구나.-

 

 

흰머리의 소년 모양 요괴가 나타났다.

 

 

-반가워, 널 만나고 싶었어.-

 

 

꼬마 아이는 손을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검은 물질로 변형하여 굵직한 전쟁용 가시들을 생성한 뒤 라이텔바흐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검과 가시들이 충돌하는 치열한 격전이 개시되었다.

 

 

‘저건 꽤 강하군.’

 

 

순간적으로 라이텔바흐는 SSS랭크 헬게이트를 죽일 때를 떠올렸다. 그만큼은 아니어도 거의 그에 준하는 수준의 악의가 압축된 존재였다. 지혜롭게 싸울 수 있도록 인간형으로 압축된 유닛이기에 전투력의 효율은 더 만만치 않겠지.

 

 

-크하하하, 어서 와, 라이텔바흐! 나랑 같이 재밌게 노올~자!-

 

 

인간 괴물과 진짜 괴물의 충돌. 그 충격파에 헌터들도, 세미라미스의 군대도,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꼬마 괴물은 인간이 감히 인지하지 못할 무시무시한 움직임으로 라이텔바흐를 사방에서 타격하였다.

 

 

-그래봤자 인간이지, 초인이 아니잖아? 안티-게이팅 파워가 없으면 그냥 좀 강한 인간에 불과해.-

 

 

라이텔바흐에게도 이 명제는 사실이었다. 분명 지금 담무스가 보여준 공격력과 민첩함은 초인이나 초능력자라도 감히 감당해 내지 못할, 적어도 이곳 99층 안에서라면 초월적 존재라도 이기지 못할 권능이었다.

 

 

하지만 라이텔바흐의 무기는 안티-게이팅 에너지만이 아니었다.

 

 

-으음?-

 

 

뒤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을 손쉽게 대응해 내는 인간의 치밀함에 담무스는 잠시 경탄하였다.

 

 

-아아, 그게 바로 그 원리로 돌아가는 힘이구나.-

 

 

 

 

 

사건의 지평선.

 

 

라이텔바흐를 에워두르는 얇은 막. 이 경계선이 그를 두르는 동안 바깥과 안의 시간과 법칙은 다르게 흐른다. 즉 담무스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고 강하게 타격해도 라이텔바흐에게는 반칙의 룰이 적용되기에 무의미하다. 그가 보기에는 바깥의 시간 자체가 느린 것처럼 보이며 바깥의 물체들은 모두 두부처럼 물렁물렁하게 느껴진다. 만일 헬게이트의 영향이 짙게 서린 존재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초월적으로 움직이는 물체라 해도 이런 사건의 지평선 덕에 태생적 차이는 상쇄된다.

 

 

-제법이잖아?-

 

 

“너도 그렇군. 사건의 지평선이 최대 밀도로 작동하는 동안 나와 합을 나눌 수 있는 어비씨언은 없는데 말이지.”

 

 

-헤헤, 그런가?-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돌연 입을 헤죽헤죽 벌렸다. 괴이한 형태로 거대하게 하마처럼 쫙 벌려진 그 입 안에 마치 상어의 이빨과도 같으며 악어의 이빨과도 같은 흉측한 것들이 드러났다.

 

 

-그런데 난 말이야, 어비씨언이 아니야, 라이텔바흐.-

 

 

“알고 있다.”

 

 

라이텔바흐의 감찰안에도 훤히 보였다. 담무스는 다른 층 주인들과 달리 어비씨언이 아니다. 헬게이트들의 융합체. 그것도 일곱 개의 SS랭크 헬게이트와 열 개의 S+랭크 헬게이트들이 최대 밀도로 결합되어 합성된 존재이다. 지난번에 SSS랭크 헬게이트 본체도 다른 SS랭크 헬게이트 여럿과 융합한 바가 있었기에 담무스의 존재감이 라이텔바흐에게는 낯익게 느껴졌던 것이다.

 

 

“너와 싸우느라 저 창부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는 없겠군.”

 

 

이 싸움의 와중에도 라이텔바흐는 담무스가 아니라 세미라미스를 주목하는 중이었다. 두 자매의 권능을 흡수한 덕에 세미라미스의 부활 에너지가 더욱 강력해졌고 그 영향으로 층 대부분이 다시 80% 이상 복구된 상태였다. 직전보다는 많이 느리지만 다시 층의 주인들이 생성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군대도 서서히 불어나는 중이었다.

 

 

‘애매한 공격으로는 저 여자와 저 꼬마에게 밀려날 뿐이다.’

 

 

시간은 확실히 라이텔바흐의 편이 아니다. 이에 그의 결심은 확고하게 한 방향으로 정해졌다. 다른 선택지는 없으리라.

 

 

그는 품에서 다른 한 장검을 꺼냈다. 이번에는 흑색의 구르상과는 달리 수정처럼 빛나는 푸르른 보석으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청색수정검, 링길(Ringil). 구르상이 마검이라면 링길은 가히 성검에 비견되는 헌터웨폰이었다.

 

 

 

 

 

“링길, 구르상, 공명 개시.”

 

 

라이텔바흐는 자신이 짜낼 수 있는 모든 백파와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두 검에 응축하였다. 이후 섬멸물질이 고농도로 농축되어 두 검을 코팅하였고 그 위를 라이텔바흐의 몸에서 뻗어나간 사건의 지평선이 덮었다.

 

 

 

 

 

“오의(奧義).”

 

 

 

 

 

순간적으로 99층의 공기 전체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세미라미스도, 한참 싸우던 담무스도, 그리고 모든 군단들과 주인들도, 심지어 헌터들마저 무언가를 직감했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이텔바흐의 최대, 최강, 최흉의 비술, 그의 모든 지식과 전투 능력이 하나로 응집된, 상식을 벗어난 무언가가 베일에서 벗어나 밝히 계시되는 순간이었다.

 

 

 

 

 

“마카베우스 헤머(Maccabaeus-Hammer).”

 

 

 

 

 

생명의 위기를 느낀 담무스는 재빨리 근접전을 그만두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한 명만을 목표물로 잡는 원래의 방식대로 발현된 것이 아닌, 일대 다수에 적합하도록 라이텔바흐가 변형한 아류(亞流)였다. 힘의 농도는 조금 양보하되, 대신 범위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은 공격이었다.

 

 

 

 

 

촤아아아아악.

 

 

 

 

 

무시무시한 파멸의 홍수, 섬광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염이나 번개도 아닌, 설명하기 힘든 기괴한 물리 현상이 빛 이상의 속도로 99층 전체를 엄몰 하였다. 세미라미스도, 담무스도, 1층부터 98층까지의 주인들도, 모조리 이 안에 휘말렸다.

 

 

 

 

 

오 멸망받을 바빌론의 딸아, 네가 우리에게 베푼 대로 네게 갚는 자가 행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들어다가 돌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하리로다.

(시편 137편 8-9절)

 
 
 
 

 

-전군의 99.9999999% 소멸 반응.-

 

 

-1층부터 98층까지, 전 층 소멸합니다.-

 

 

-99층 영역, 98% 이상 소멸.-

 

 

 

 

 

바깥에서 탑을 관측하던 헌터들과 시민들은 경악하였다. 동쪽의 바벨탑이 거대한 폭격에 휘말린 건물처럼 허공에서 폭발하였다. 모든 층이 그대로 터져나갔고 뼈대가 송두리째 갈아엎어지는 광경이 모두 앞에 생중계되었다. 탑은 맨 위의 꼭대기만을 남긴 채 척추째로 꺾인 희생물처럼 부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무너져 내리던 서쪽과 남쪽의 탑도 폭발하여 그대로 풍선이 터지듯 파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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