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76회 어니스트의 룸메이트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14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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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일정을 마치고 자택에 돌아온 라이텔바흐는 신경질적으로 제복을 잡아 뜯듯 풀어 헤쳤다. 코트를 팽개치듯 던진 그는 잠시 정신을 환기하고자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수 주에 걸친 공략, 거의 사흘씩이나 지루하게 이뤄진 정결례, 뒤처리와 헌터들 내부에서의 정치 문제, 세계 정부 당국과의 영양가 없는 실랑이와 신경전까지. 그의 몸은 회복되었으나 마음은 짜증과 불편감과 각박함으로 매우 삭막하게 날이 서 있었다.
“오셨어요, 준장님?”
라이텔바흐는 어김없이 들려오는 신실한 목소리에 한쪽 귀를 기울였다. 인간의 예의대로라면 친절하게 맞아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적인 여유의 공간이 없었다. 아마 저 친구도 자신이 이런 까칠한 사람인 줄은 여기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겠지. 어쩌겠는가. 공적인 자리와 대외적인 공간에서 사용하는 마스크와 홀로 지내는 공간에서 드러나는 본색이 다른 건 비단 라이텔바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이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라이텔바흐가 무반응으로 불친절하게 퍼 앉아 있는 동안, 목소리의 주인은 부랴부랴 그가 내팽개친 신발과 코트와 옷가지를 가지런히 정리하여 제 자리에 정렬하였다. 라이텔바흐는 반쯤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그쪽을 보았다. 저러면 피곤하지도 않나? 원래 오지랖이 많은 타입이라 그런가? 대화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들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식사 준비했으니까 아직 안 드셨으면 같이 드실래요?”
그 부름에도 라이텔바흐는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는 뒤로 젖힌 채로 눈을 감고 두 팔은 소파의 등받이에 얹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피곤해서 자는 것인지 아니면 묵상하는 것인지, 제삼자가 보면 구분이 가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배꼽시계는 정확했고 후각은 정직했다. 향기로운 향취의 유혹이 그를 괴롭히자 꿈쩍도 하지 않고 게으름에 묻혀 있던 이 집의 폭군 주인은 조금씩 흔들렸다. 식사라는 개념이 그에게는 여태껏 뚜렷하지 않았다. 30년의 삶은 지하 감옥에서 고문과 모욕을 당하면서 살았고, 음식은 언제나 구역질 나는 구정물을 구강 기관을 통해 주입받는 과정이었다. 말 그대로 필수 영양소의 균형과 양은 완벽하게 갖춰진, 그러나 맛은 극도로 없던 유기체 덩어리였다. 다행히 그의 몸을 강하게 유지하고 발달시키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라이텔바흐는 먹는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감옥에서 탈출하여 정식으로 헌터로 길러진 뒤로도 그는 영양소를 압축한 유기체 덩어리를 급하게 입속에 쑤셔 넣어 허기를 달랬다. 문자 그대로 신체를 유지하고 건강을 보존하고 몸을 키우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삶을 영위해 왔다.
그런 그에게 먹는 즐거움에 대해 가르쳐준 자가 바로 저 더부살이 손님이었으니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쳇.”
라이텔바흐는 짜증 섞인 말을 억지로 참고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편하게 옷 갈아입고 오세요.”
그의 새로운 친구이자 이제는 한집살이 식구가 된 살집 좋은 청년, 어니스트 마이런이 호쾌하게 말했다.
“오늘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봤어요.”
라이텔바흐는 말없이 상의부터 벗어 던졌다. 190cm를 웃도는 키에 커다란 프레임의 골격, 그리고 오랜 전투와 훈련으로 다져진 고도의 근육질 육체까지, 압도적인 위용이 드러났다. 어니스트는 미간을 찡그렸다. 하여간 습관 한 번 달라지지 않는다. 함께 살면서 불편한 사항이 이것저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룸메이트를 배려해 주지 않는 라이텔바흐의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자기의 생활 공간 안에서는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는 버릇이 있었는데, 보는 입장에서는 민망함을 참기 어려웠다. 제 집이니 제 마음대로 하는 게 맞다만 조금 공동생활을 생각해서 최소한의 배려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어휴, 왜 또 다쳐서 왔어요!”
즉각 발동된 어니스트의 오지랖. 라이텔바흐의 자기 중심성이 그의 고질적 문제라면 어니스트의 문제점은 남 챙겨주기를 쉽게 참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거꾸로 뒤집으면 단점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
어니스트는 라이텔바흐의 상체 곳곳에 난 흉터들을 보고 혀를 찼다. 아직 핏기가 다 지워지지 않은 것을 보아 최근에 새로 생긴 상처들이다.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헬게이트 유래물에 의해 생긴 상처는 나노봇에 의해서 빠르게 치유되니까.”
“나무라는 게 아녜요. 좀 붕대도 감고 치료도 받으시라는 뜻이죠.”
치료라고? 평생 인간 병기로 살아온 이에게는 그런 사치가 되려 낯선 개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낫게 될 것을 뭐 하러 관리하는가.
“오늘 주무시기 전에 드레싱이라도 해드릴게요.”
“맘대로 하던지.”
이번에도 라이텔바흐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도 이러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몸에 밴 습관대로 자기 공간에서 자기 본성을 내보이는 것일 뿐인데, 이런 공동생활을 통해 자신의 이기심이 비치는 것 같아서 속이 켕겼다. 양심이니 선의니, 친절이니 하는 것에 무감각한 그였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본성이 벌거벗겨지는 것이 부끄럽지 않지는 않았다. 룸메이트 앞에서 옷을 안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야 30년 평생 그렇게 대우받으면서 조롱당했으니 아무렇지도 않다만, 내면은 달랐다.
‘내가 너무 냉담했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후회도 들었다. 조금만 더 노력해서 친절하게 굴걸. 헌터들이나 외부인들을 다룰 때처럼 적절히 연기력을 발휘해서 가면을 쓸걸. 하지만 그런 위선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은 이렇게 글러 먹은 사람이다. 부드러움이나 따스함, 온화함과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고슴도치같이 예민한 무례한 젊은이이다. 이런 자신이 좋지는 않았지만, 평생 보고 배운 게 이런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매우 맛있었다. 따스하게 구워진 빵과 잘게 썬 고기 요리, 그리고 우유과 치즈에 채소 샐러드까지. 여기에 몇 가지 특식이 더 마련되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혀가 조건 반사적으로 길든 탓인지 라이텔바흐는 식탁에 앉자마자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 모습이 복스러웠는지 앞자리에서 지켜보는 어니스트는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하긴 저 근육질 덩치를 유지하려면 많이 드셔야겠지.’
입이 짧은 플레먼 도련님과는 달리 어니스트는 음식에 진심이었고 먹는 즐거움을 삶의 중요한 축으로 간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장만한 음식을 열심히 잘 먹어주는 사람에게는 기본 점수를 높게 주곤 했다.
“평소에는 이렇게 요리해 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걸 왜 하지?”
“그럼 뭘 드셨죠?”
“에너지 음료와 영양소 바, 우주인들이 먹는 식품과 비슷하다.”
“필수 영양소가 그걸로 다 채워져요?”
“비타민과 무기질을 포함해서 필요한 성분은 다 포함되어 있지.”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만 먹으면서 살아요.”
“난 그렇게 30년 이상을 살았다. 영양소 바는 그때 먹었던 구정물들에 비교하면 사치다.”
도대체 저 헌터는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하긴, 헌터들이 엄연히 인체 병기이고 그들을 만들어낸 세력이 세계 정부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차마 판도라의 상자를 열긴 두렵지만, 라이텔바흐의 과거 또한 온갖 학대와 악몽으로 점철되어 있으리라.
“그래도 오늘은 최소한 옷은 입고 식탁에 앉으셨네요.”
듣기에 매우 묘한 칭찬이었다. 뼈가 실린 지적이었는데, 마치 야생에서 맹수 무리에 섞여 자라난 자연인을 사회화하는 일에 성공했노라고 기뻐하는 사육사의 뿌듯함 같았다. 라이텔바흐는 부끄러움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고 자택에서 지낼 때는 먹을 때도 속옷 차림이었다. 처음 어니스트와 겸상할 때는 그렇게 굴었지만, 이제는 조금은 예의가 개선되었다.
“맛있죠?”
“맛으로 먹는 거 아니다.”
“에이, 쑥스러워하시긴. 솔직히 말해봐요.”
지속적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어니스트의 쾌활함. 여기에 아직 덜 적응된 라이텔바흐는 민망함을 꾹 참았다. 솔직히 말하면 맛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면 자신이 저 통통한 청년에게 무의식적으로 길들고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았다.
“그 맛이 다 그 맛이지.”
“감상평 해주시면 다른 특식도 드릴게요.”
결국, 배고픔과 혀의 유혹이 그를 꺾었다. 겨우겨우 ‘맛있다’라는 말을 억지로 내뱉은 라이텔바흐는 자괴감에 머리가 멍해졌다. 헌터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전사인 자신이 어쩌다 이런 말랑말랑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휘감겼는가.
“고마워요, 준장님.”
어니스트는 온순해진 흑표범의 등에 사육사가 손을 얹어 쓰다듬듯 부드러운 말로 라이텔바흐의 거친 성정을 무장 해제시켰다.
*
라이텔바흐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허겁지겁 일에 파묻혔다. 편안한 쉼은 그에게는 사치와도 같았다. 늘 그는 세상의 각종 학문을 머릿속에 주입하는 일에 갈급했다. 아울러 모든 종류의 정보와 데이터까지, 그는 그 모든 것을 포식하는 폭군이었다. 단순히 힘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세계 정부와의 승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는 헌터로서의 능력에서도, 육체적으로도, 권력에서도, 재력과 영향력에서도, 그리고 지력과 책략에서도 정점에 오르길 갈망했다. 실제로 그는 재능 면에서나 노력 면에서나 현 세계 인간 개체 중에서는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안식을 전혀 모르는 이 일 중독자에게 어니스트는 측은지심을 품었다. 그는 몰래 방 안에 들어가 소리 없이 과일들을 깎아 책상에 올려놓았다. 고맙다는 말 없이 라이텔바흐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당의 유혹은 이기지 못했고 묵묵히 모두 섭취했다.
자기 직전에 라이텔바흐는 거칠게 찬물로 샤워했다. 내내 혼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다.
“쉬어가면서 하시는 편이 능률에 더 좋을 걸요?”
어니스트는 지나가는 길에 또 이렇게 말함으로써 라이텔바흐의 신경을 긁었다. 대꾸해 주지 않았다. 쉬어갈 시간이 어디 있나. 조금만 정체해도 밀려나는 것이 이 정글 같은 세상이거늘. 그러나 그 말이 진심으로 걱정해 줘서 나온 것임을 알기에 한편으로는 부담감에 마음이 눌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항상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군.’
굳이 변명거리를 찾아보면 할 말은 있다. 어니스트는 두 번이나 자신에게 목숨을 빚진 사람이고 나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러니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리라. 하지만 그게 합당한 변명이 되지 못함은 본인의 양심이 더 잘 알았다. 자신은 누군가를 구하려고 싸운 것이 아니다. 그저 헬게이트를 향해 권능을 쏟아부으며 세계 정부를 향한 증오심을 투사했을 뿐이다. 플레먼과 어니스트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구출된 사람들일 뿐이다.
양심은 이렇게 고발했다. 그러면 할 수 있는 일부터라도 해라. 작은 것에서부터 챙겨줘라. 보답은 해야 하지 않느냐. 이에 비겁한 마음은 이렇게 반박했다. 어차피 이 집에서 모든 양식과 자원과 돈은 자신에게서 공급된 것들 아닌가.
‘쳇.’
찔린 마음에 자격지심이 든 라이텔바흐는 신경질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수건을 들고 머리와 몸을 거칠게 닦았다. 그는 늘 그랬듯 실 하나 걸치지 않고 저택의 복도를 성큼성큼 활보하였다. 평소와 다르게 너무 인간다운 삶으로 대접을 받다 보니 몸은 더 편하고 즐거워졌는데 마음에는 또다른 딜레마가 생기고 말았다. 이것이 빚진 기분이라는 건가.
그는 수건으로 하체를 두른 후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어니스트 군.”
“네, 갑니다.”
언제 또 마련해 왔는지 상처에 좋은 연고와 드레싱 도구를 준비해 온 어니스트였다. 이제는 집에서는 아무 데서나 자연인처럼 다니는 라이텔바흐에 익숙해진 것인지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는 헤벌쭉 웃는 상으로 다가왔다. 뭐가 저렇게 항상 기분 좋은 것인지 궁금하다. 변변한 내세울 거리도 없는 연약한 사람. 더부살이하는 신세. 그런 어니스트에게서는 왜 변치 않는 기쁨이 흘러나오는 것인가. 남을 섬기는 것이 정말 즐거움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군.’
남 밑에 있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라이텔바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주제에 너무도 치밀하고 이성적이기에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고개 숙이는 흉내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했다. 세계 정부를 상대로, 헌터 수장들을 상대로, 그는 늘 진정으로 섬기는 마음 없이 비위에 맞춰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궁극적으로는 제치고 밟고 앞서나갈 생각을 품은 채.
어니스트는 그런 라이텔바흐에게는 참으로 불가사의였다.
“워우, 몸이 그새 더 좋아지셨네요.”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아서인지 통통함이 개성인 청년은 혀를 내두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라이텔바흐는 엎드린 자세로 누워 얌전히 치료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호들갑 떨기는.
“전에 있던 흉터들, 많이 옅어졌네요.”
“그런가?”
라이텔바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니스트와 같이 생활하면서부터 몸이 조금씩 더 개운해지고 있었다. 회복력이 증폭되는 것인지 전에 고문을 당해 남았던 흉터들도 서서히 옅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게 면역자로서의 특성과도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연구해 볼 가치는 있으리라.
“싸울 때 입은 상처는 금방 낫는다고 하셨죠?”
“그렇지.”
“그러면 준장님 몸에 남은 흉터는 대부분…….”
어니스트는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끊었다. 괜히 그의 아픈 곳을 쑤시고 싶지는 않았다.
“좋은 일로 얻은 건 아니지.”
씁쓸한 맛을 삼키며 라이텔바흐는 자조했다.
“앞으로도 헬게이트나 탑을 공략하다가 다치시면 저한테 치료받으세요.”
드레싱을 마친 어니스트는 호쾌하게 청년의 넓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친근감을 표현했다. 새침한 검은 고양이처럼 라이텔바흐는 입술을 비죽였다. 고맙다고 말하자니 괜히 마음이 간질여서 입이 내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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