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78회 공동체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0.26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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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속한 세계들은 고뇌에 빠졌다.
먼저는 열 개 권역의 연합으로 이뤄진 세계 정부.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의 원수가 날개를 다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라이텔바흐의 직위가 공식적으로 협회장에서 당회장 직으로 승격되었다. 헌터 사회 전체의 뜻이기도 했고 이미 대중은 탑 공략과 관련해 라이텔바흐 일행의 영웅담을 들었다. 헌터들의 민간 영향력이 매우 증대된 탓에 더는 예전처럼 언론 통제가 먹히지도 않는다. 애초에 탑들을 무너뜨려 주는 대가로 라이텔바흐의 승진을 걸고 계약을 맺었으니, 명분도 마땅치 않다고 보겠다.
이렇게 ‘가장 위험한 원수’의 힘이 세지면 앞으로의 정치적 요동은 더욱 불투명해진다. 라이텔바흐의 영향력은 비단 헌터 세계 내부에서만 커진 것이 아니다. 그가 악착같이 모은 재산은 방대했으며 그의 후원을 받아 활동하는 기업들과 조직들은 이미 고공행진을 하며 번창 일로를 걷는 중이다. 반면에 세계 정부는 이미 일원화된 체계를 잃었으며 열 개로 쪼개진 뒤로도 더욱 잘게 내부에서 분열되었다. 그 틈에 헌터들과 그 친분 세력을 등에 업고 라이텔바흐는 서서히 자신의 힘과 권세를 키워갔다. 모르긴 해도 공식적인 조직들과 기업들뿐 아니라 비공식적으로는 불순분자들과도 연접하여 세를 불리는 중이리라.
이렇게 되면 매우 위험한데, 이는 세계 정부의 전신인 제3제국(Third Reich)과 그 후계 정권들이 라이텔바흐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이기 때문이요, 그의 삶을 망가뜨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복수심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헌터 전체를 마음껏 뜻대로 움직일 될 정도가 된다면 필시 헌터 사회는 반정부적인 세력으로 탈바꿈할 거다.”
이미 정부에 반항적인 성향이 짙은 헌터들이다. 그나마 보수적인 네 명의 헌터 수장이 정치적으로 균형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라이텔바흐처럼 반골 기질의 젊은 지도자가 세를 얻는다면 그 균형 붕괴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어둠이 큰 근심에 빠졌는데, 바로 헬게이트들을 생성하는 배후의 권세들이었다. 어머니들, 곧 유사-심연들은 자신들이 살아 숨 쉬는 의의에 근본적 위협을 가하는 존재들에 주목하였다. 인간 중 가장 강력한 자가 그 변수들, 곧 면역자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치밀한 수싸움에서 밀릴 것이다.
-게다가 그 인간은 벌써 세 개의 탑을 무너뜨렸어요.-
-이례적인 속도입니다.-
-나름 인류 전체의 존속을 건 시험이었거늘, 우리의 패를 너무 일찍 파훼한 것이 아닌가 싶군요.-
-변수들에게 어떤 위해라도 가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최소한 정보를 더 캐낼 수 있을지 했거늘, 막상 그들 중 한 명도 해함을 입기 전에 벌써 정리 절차에 들어갔군요.-
-자유도의 증가란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측 불가능한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침략의 기회와 전략의 다양성을 늘리긴 했지만, 거꾸로 흑 재규어도 이 기회를 역이용할 수 있습니다.-
-남은 바벨탑 하나는 허무하게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어머니들은 이렇게 협의했다. 이미 많은 비장의 전력을 소모했고 다음번 침략까지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 그러니 북쪽 바벨탑에 대한 무절제한 에너지 공급은 잠시 유보한다. 북쪽 탑은 침식 모드를 중지하고 은폐 모드로 전환한다. 이를 명령 받은 북쪽 탑의 주인은 승인의 뜻을 전했다.
-알겠습니다.-
이 시각 옛 시베리아 지역에 세워진 북쪽의 바벨탑은 동면 상태로 돌입하였다. 침식 작용은 중단되었고 이미 뻗어나가던 침식 에너지의 그물망도 회수되었다. 라이텔바흐와 싸워서는 지속 가능성이 없으리라고 판단한 탑의 주인과 그 배후들은 아까운 전략 자산을 보존할 겸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
플레먼이 거하는 새 거처는 북미 지역의 동부의 어느 교외 지역에 자리한 중급 규모의 건물로 여러 명의 사람이 함께 거할 수 있도록 빌라였다. 건물의 소유권은 여러 명의 명의로 복잡하게 나뉘어 있었는데 근본적으로는 몇몇 헌터의 이름으로 헌터 연맹의 지배권 아래 놓여 있었다. 상대적으로 정부 당국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지리적 이점을 지녔으며 다양한 보호와 안전의 장치들이 존재했다.
이곳에는 약 백 명 가까이 되는 입주자가 터를 잡았다. 그들 모두가 플레먼하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헌터들이 인수해 온 사람들로 출신이나 인종의 측면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무리였다. 언어야 이미 세계 공용어가 된 독일어를 다 같이 사용하기에 의사소통에는 문제없었다.
입주자들은 대부분 이 건물 안에 숙소도 갖고 있었고 동시에 일터도 이 건물 혹은 그 근방에 두었다. 공적인 기관에 소속된 자나 공무원 또는 회사원은 없었으며 모두가 기본적으로 프리랜서 혹은 자영업자에 가까웠다.
입주자들은 사실상 서로를 가족 공동체로 여겼다. 모인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연합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대가 형성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위기를 같이 짊어지며 견뎌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세상에서 믿을 만한 인간이라고는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뿐이었다.
처음 건물 안에 입주한 뒤 건물 식구들이 서로의 신앙적인 배경을 알게 된 데는 약 3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였고 자신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 탓에 공동체 식구들이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내면의 성정을 완전히 숨기기란 어려웠다. 극도로 각박해진 현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본성의 애정과 이웃을 향한 사랑, 예의범절과 고귀함, 선량함과 따스함 같은 가치를 잃어버렸다. 이미 불법이 성행하며 온건한 사랑은 실종되던 세상이다. 그런 냉혹함 속에서 선량한 내면을 잃지 않은 사람의 성품은 드러나기 마련이었고 나무의 열매란 나무의 본질을 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입주자들은 며칠 만에 이웃과 부딪히면서 감을 잡고 낌새를 맡았다. 서로의 언행과 인품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인지했다. 때로는 상대가 몰래 성경의 말씀을 작게 중얼거리며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몰래 기도하는 모습도 종종 발견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새 이웃들도 자신처럼 남몰래 숨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이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그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조심히 모였고 카타콤의 암호들을 통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냈다. 이는 도박이었는데 자칫하면 이전 세대의 비극이 재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가족이 가족을 파는 일과 밀고하는 일과 그리스도인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일이 몇십 년 전에 자행되었고, 그 끔찍한 현대사의 추억이 뇌리에서 다 잊히지 않은 세대가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기를 내었고 서로를 믿었다.
그렇게 입주자 전원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지하 교회의 남은 자들임이 확실시되자 모두는 매우 놀랐다. 이들을 모아온 세력은 헌터들이다. 헌터들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모를뿐더러 아직 기독교와 교회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세계 정부와 그 전신들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이미 오래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지워진 탓이다. 한데 약 이십 년 전에 와서야 정부의 속박에서 풀려나 독립적 세력을 구축한 헌터들이 뭘 어찌 알겠는가.
다만, 플레먼은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었다. 라이텔바흐는 면역자의 존재에 대해 말해주었다. 긴가민가했으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면역자의 정체는 내면에서부터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다. 단순히 입술이나 지식으로만 기독교적 종교 체계를 수긍하고 동의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계적인 탄압마저도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기로 결의한 진짜배기들. 과연 헬게이트들이 그런 사람들 주변에서만 발생하지 않는 것은 결코 우연으로 보기 어려우리라. 플레먼은 이미 헬게이트라는 현상이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일종의 초자연적 징벌임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 재난이 하필 그리스도인 주변을 피해 가는 것이 그 간접적 증거임을 확신하였다.
여하튼 이러한 ‘면역자’로서의 성질과 그런 성질을 띤 무리의 존재를 세계 정부 측이 아닌 헌터 측에서 먼저 발견한 건 실로 감사할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 정보를 가장 먼저 확실하게 파악한 사람은 라이텔바흐 헌터. 그 사람이 세계 정부 측과 정치적 원수 관계임을 생각할 때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플레먼과 입주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새 생활을 이어나갔다. 특별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매일의 일상은 잔잔하게, 비슷한 패턴으로 이뤄졌다. 고맙게도 세계 정부 당국의 감시망도 그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으며 관리자인 헌터들도 그들에게 가혹하게 굴거나 오만하게 갑질을 하지 않았다.
입주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업을 행하였고 그 일을 통해 같은 공동체의 그리스도인 동료들을 섬겼으며 동시에 주변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작고 소소한 형태로 도움을 베풀었다. 그들은 감시를 두려워하며 조마조마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조심스럽게나마 선행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다. 감히 대놓고 전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찬송가를 거리에서 부르는 용맹한 일은 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희생해 물질적인 도움을 한 번 더 베풀거나 아무도 몰래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은 가능했다.
이렇게 각자의 작은 달란트와 작은 기회를 동원하여 현실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베풂의 삶을 이어나가다 보니 공동체 식구들 모두의 삶이 하나의 태피스트리처럼 연합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은 점차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고 작은 일에서도 함께 기도 제목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회가 되면 일주일에 세 번씩 모여 서로의 믿음을 공고하게 하였다. 소그룹 단위로, 좀 더 큰 단위로, 일요일에는 백 명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과거의 자유로웠던 시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는 예배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시원시원하게, 당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건물의 가장 깊은 지하실에서, 철저하게 방음 시설을 갖춘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예배를 드려야 했다. 한목소리로 함께 찬양하지도 못하여 한 사람씩 작은 음성으로 노래하고 한 사람씩 신앙 고백을 나누었으며 말씀의 묵상도 소곤소곤 이뤄졌다.
성경책은 들키지 않도록 위장된 책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그나마도 텍스트 전체를 담지도 못하여 부분 부분 나누어져야 했다. 어떤 이는 신약 성경만을, 어떤 이는 구약만을 휴대하였고 어떤 이는 시편을, 다른 이는 예언서를 휴대하였다. 성경 전체를 함께 누리고 묵상하려면 자연히 모임을 폐할 수가 없었다.
이제 좀 더 안전한 장소가 생겼으니 당당하게 굴어도 되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아직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의식해야 했고 헌터들조차도 온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자칫 한 곳에서 덜미를 잡히면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처할 판이다. 물론 정부 측에서 헌터들의 감시 아래 있는 공동체를 공개적으로 일망타진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한 명 한 명의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사회생활을 해야 했고 언제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여하튼 전과 달리 제대로 된 예배 모임이 허락되었다. 흩어져서 따로 살던 동안에는 제대로 된 예배 모임을 나누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전에도 지하의 모임은 있었다. 보통 각 지역에서 한 명의 참된 그리스도인이 ‘구도자’들과 ‘초보적 신자’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데리고 작은 구역 모임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긴 하였다. 세 명 이상의 참된 그리스도인이 한 지역에서 접촉할 수 있는 거리에 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 한 명뿐인 그룹에서는 제대로 된 믿음의 연합이 이뤄지기란 불가능했다. 시대의 끔찍한 기류 속에서 간간이 믿음의 기초를 전수하고자 하는 작은 저항적 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플레먼은 그나마 지역적으로 안전한 곳에 있었기에 어니스트, 신티, 쥬오디아처럼 여러 참된 믿음의 동료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였다. 결국,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연약한 초신자들을 책임지는 것은 그들 넷뿐이었고 이는 대단히 벅찬 짐이었다.
그래서인지 무려 백 명이나 되는 진정한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한 공간을 나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으로 느껴졌다.
플레먼은 이 모임 가운데 대단히 귀한 역할을 맡았다. 이는 그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인 것과 관련되었다. 그는 찬양의 음악이 사라져 버린 이 세상 속에서 이웃 그리스도인들이 부를 수 있도록 찬송을 부활시킬 책무를 쥐게 되었다.
한 세대 전의 극악한 핍박으로 인해 기독교는 거의 멸종 직전에 이르렀고 이들은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보배로운 유산을 상실하였다. 하나는 전도의 능력이요, 다른 하나는 찬송의 능력이었다.
두려움은 용기를 질식시켰고 전도다운 전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기존에 부모님이나 다른 지인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들어 알되 아직 회심에는 이르지 못한 구도자들, 그런 류의 사람들에게나 전도가 가능했지 아예 기독교를 알지 못하거나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감히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또한 절망과 낙심은 성도들의 입에서 노래를 앗아갔다. 거리에서 들려지던 크리스마스 캐럴부터 시작해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19세기의 찬송가들까지, 그 모든 것이 강압적인 폭력에 의해 강탈되었고 성도들은 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았다. 이미 이전 세대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죽거나 순교했고 그들은 찬송의 유산들을 후배들에게 전달해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살아남은 지금의 성도들은 찬송가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노래의 멜로디를 만들어낼 능력도 없었는데 이는 오랜 낙심이 유전자 속에 새겨지는 바람에 심령에서부터 노래가 우러나오지 않는 탓이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 반역이라는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 천사들이 더는 노래로 찬송하지 않게 된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각 성도는 자신만의 노랫말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위에 음악을 덧입힐 능력이 없을 뿐, 그들의 내면에는 분명하고 확실한 시가 숨겨져 있었고 언젠가는 그것을 노래하고 싶은 소원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플레먼의 재능은 이제 이들의 소원을 돕는 방향으로 이용되었다. 그는 성도들이 소유한 자신만의 시 위에 선율을 입혔다. 그는 그렇게 부활한 찬송의 열매를 식구들과 공유하였고 예배 모임 때마다 기타나 피아노를 연주하며 선율을 읊었다. 성도들은 그가 회복시킨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한 명씩 따라 불렀다.
그렇게 한 편씩 되살아난 성도들의 노래는 세상밖에는 공개되지 못한 채 오로지 백인의 공동체 안에서만 비밀스럽게 불렸다. 이 노래들을 부르며 그들의 영혼은 그리운 이전을 회상하였고 절망을 이겨내고자 몸부림쳤으며 새벽이 밝아오기만을 간절히 고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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