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89회 배웅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2.28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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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최근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이는 헌터 라이텔바흐로 인함이었다. 여섯 대륙 각지의 주요 독립운동 세력의 70% 이상은 이미 이 사람과 더불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연루된 상태였고 그는 그들에게 상당한 정치 역학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그는 최근 비밀스러운 소식통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의 ‘분부’를 전달하였다. 각 세력에 전달된 세부적 내용은 조금씩 다르긴 했으나 공통 분모라면 그들의 본거지와 지부들을 지정된 ‘좌표’들로 옮기라는 지시였다.
라이텔바흐는 이 일들이 앞으로 지구 위에 전개될 기현상과 정치적 격변을 대비하기 위한 포석임을 설명하였고 그들이 반드시 자기 뜻에 따라줄 것을 바라며 강한 어조로 피력하였다. 그에게서 도움을 받아 세력을 불린 독립운동가들 다수는 그 뜻을 진지하게 고려하였으나 여전히 의구심은 지워지지 않았다. 라이텔바흐와 헌터들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으며 어떻게 그런 사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가. 그들을 신뢰해도 좋은가.
그러나 세계 정부라는 잠정적인 공공의 적이 존재하는 마당에 헌터들과 척진다는 것은 선택지에 없다. 그렇다고 마냥 그들에게 휘둘리며 무분별하게 100% 신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독립운동가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그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견해차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자칫 내버려두면 내분으로 이어질 터인데 그랬다가는 기껏 힘겹게 연결해 놓은 파이프라인이 와해될 판이었다. 뜻과 목표점과 방향성이 다른 오합지졸 조직들이 여럿 우후죽순 일어난다고 한들 세계 정부의 전면전에서 각개 격파될 것은 자명하다.
이에 심각성을 느낀 몇몇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저들끼리 모여 협의를 나누었다. 헌터들의 세력과 독립운동가들의 세력을 어떻게 하면 갈등 없이 유순하게 연결할 수 있을까. 헌터들에 대한 의문점을 해소하고 그들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그들은 알았다.
현재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계의 모든 독립운동가의 하나 됨도 아직은 미완성 상태이다. 심지어 헌터들 내부에도 세력이 갈려 있다. 그러니 내부와 외부의 연결을 이루기까지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독립운동가들 중 몇이 이런 의견을 내었다. 라이텔바흐 헌터에게 직접 접근하여 그에 대해 정보를 캐내자. 그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헬게이트 이변의 흐름을 예지할 수 있는지, 그가 현재 소유한 정보는 어디까지이며 그것을 세계 정부와의 대결에서는 어떻게 활용할 작정인지, 독립운동가들 측도 알 필요성이 있다.
이 임무에 자진하여 나선 자가 아퀼라 맥그리거였다. 그는 동지들의 의심도 덜어내고 싶었고 헌터들과 보다 더 투명한 협력 관계를 얻기를 원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라이텔바흐에 대한 호기심도 느꼈다.
라이텔바흐는 그런 독립운동가들 측의 입장을 고려했는지 아퀼라가 자신의 원정대에 합류하여 같이 보고 듣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플레먼 외에 일반인이 추가되면 짐짝이 더 무거워지긴 하겠지만, 한두 명 정도라면 여유분이 있다. 확실히 장차 같이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 세력이라면 중요한 정보를 일부나마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렇게 계산이 섰다.
그리하여 아퀼라는 합류 지점인 시더우드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라이텔바흐 일행과 만났다. 금발의 사내는 장신의 헌터와 악수를 나누었다.
“지난 몇 개월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퀼라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라이텔바흐의 조력 덕택에 예전보다 세력을 열 배 이상 불릴 수 있었다. 내실도 더욱 단단해졌고 영향력의 범위도 넓어졌다. 확실히 라이텔바흐의 지략과 인적 자원은 이런 면에서 유용했다.
“그저 최소한의 도움밖에 챙겨드리지 못했습니다만.”
겸양 아닌 겸양으로 반응한 라이텔바흐.
“앞으로 나아갈 길은 더욱 풍부할 것입니다. 저도 미리 잘 부탁드리죠.”
라이텔바흐의 능글맞은 미소에 아퀼라는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한 경험이 그리 길지도 않다고 들었다만, 사람들과 세력들을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군.’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저런 게 흔히들 말하는 ‘왕의 그릇’인가 싶다. 별도의 훈련이 없이도 갖춰지는 천부적 재능. 남들은 수십 년을 사람들과 충돌하고 교류하며 닦아나갈 사회적 기술의 경지를 숨 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도달한다. 라이텔바흐는 제대로 사회화된 지 불과 9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심지어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그 짧은 시간만에 세계를 흔들 단단한 세력을 구축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잡아먹히겠어.’
그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일이 잘 풀려서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는 대로 열 개 권역의 세계 정부 시스템이 와해한다고 하자.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라이텔바흐의 존재감을 고려할 때 온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건 가정법의 미래이다. 당장은 눈앞의 어려움부터 해결해야 하리라.
“반갑습니다.”
아퀼라는 라이텔바흐의 동료들에게도 인사했다. 그들은 적당한 예의와 함께 받아주었다. 세 명의 헌터는 워낙 유력한 데다 사회적 영향력과 헌터로서의 공적이 상당한지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한 명은 완전한 구면으로 일반인으로 보였다. 겉보기에는 전혀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퀼라 맥그리거입니다. 북미 섹터 출신입니다.”
“안녕하세요, 아퀼라 씨. 플레먼 에이비슨입니다. 호주 섹터에서 왔습니다.”
아퀼라가 플레먼에게 받은 첫인상은 ‘전혀 무해한 존재’였다. 라이텔바흐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헌터들이 척 보기에도 막대한 아우라를 자랑하는 심상치 않은 존재인반면, 플레먼에서는 말 그대로 어떤 걸림돌도 느껴지지 않았다. 체격도 작은 편이고 야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되려 그런 면이 편안감을 주었다. 거대한 육식동물 네 마리 가운데 낀 유일한 소동물을 보는 느낌이랄까.
‘일반인끼리 좀 친해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물론 아퀼라는 매우 성격이 신중했기에 자기 내면을 제대로 드러낼 의향은 없었다. 일단 자신은 좋은 말로는 독립운동가이지만 나쁜 말로는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반동분자가 아니겠는가. 플레먼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탐색해 보기 전에는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으리라.
‘다행히 라이텔바흐 씨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심산이군.’
라이텔바흐는 시더우드에 도착하기 전에 아퀼라에 대해서 플레먼에게 아무 설명도 주지 않았다. 그가 독립운동가의 대표자로서 여기 합류한 사실도 당연히 함구했다. 알아봐야 양측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고 불편하기만 하겠지.
물론 우연히 아퀼라나 플레먼이 서로의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그런 경우가 생기는 것을 억지로 막지는 않으리라. 라이텔바흐 입장에서는 꽤 호기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도 자신의 일반인 친구인 플레먼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적었다.
‘에이티피아를 지닌 면역자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이런저런 용도로 활용의 폭이 넓어지겠지.’
*
일행은 시더우드에서 장비들을 정비했다. 동토 여행 과정에서 안전히 생활하기 위해서는 갖출 것이 많았다. 물론 헬게이트나 세계 정부 측의 훼방에 대비하기 위한 것들도 많이 챙겨야 했다. 다량의 엘릭서와 헌터웨폰들도.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여러 헌터 협회들 측에도 연락을 남겨두었다.
이번에도 든든한 지원군인 유진성, 로라 프렌시스 부부가 오지랖 넓게 라이텔바흐 일행의 뒷바라지를 도와주었다. 손 많이 가는 철부지 아들을 성실하게 챙겨주는 부모님을 보는 듯했다. 플레먼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놀라워했다. 그래도 라이텔바흐가 허허벌판에 던져진 고독한 맹수는 아니었구나. 누군가는 저런 그를 살뜰히 돌봐주는 모습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길을 떠날 때쯤, 진성과 로라의 외동딸인 에일린이 나타나 일행을 맞이했다. 그녀는 라이텔바흐에게 볼 일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라이텔바흐는 평소와 달리 조금 어색해하는 모습으로 그녀에게서 정중히 인사를 받았다. 언제나 과감하기 그지없던 그가 로봇처럼 뚝딱이는 꼴을 보이니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헌터분들게 탑 공략 때의 무용담을 전해 들었어요.”
“과장이 섞인 이야기입니다.”
“그럴 리가요. 아마 제 귀에 전달된 건 절반도 되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평생 잊히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을 받았던걸요.”
순진무구한 여인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자, 라이텔바흐의 귓가가 붉어졌다.
“그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임무를 했을 뿐입니다.”
“몸도 아껴가면서 해주세요. 당신과 훌륭하신 동료들이라면 무리해서 목숨을 걸지 않고도 북쪽 탑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어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에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헌터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라이텔바흐는 그들을 날카로운 맹수의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위축된 그들은 입을 꾹 봉하고 잠잠히 그 말랑말랑한 상황을 목도하였다.
이후로도 에일린은 한참을 라이텔바흐와 더불어 수다를 떨며 그에게 이것저것을 선물해 주었다. 여행길에 쓸 물품이나 식량 같은 것들이었는데 극단적으로 실용적일 것 같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성의를 보아 써봄 직한 것들이었다. 둘이 같이 있으니, 라이텔바흐 쪽이 과묵해 보였고 에일린 쪽이 발랄해 보였다. 아무래도 저 헌터는 여자에게는 조금 면역이 부족해 보였다.
그녀와 떨어진 이후 동료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라이텔바흐를 은밀히 골렸다. 그는 이마에 참을 인(忍)을 새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만나게 된 분인가요?”
순수한 호기심으로 플레먼이 질문했다.
“그저 조금 친분이 있는 벗일 뿐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많이 어색해하던데. 플레먼은 속생각을 삼켰다.
“유후.”
“좋을 때다.”
라울과 테무친이 한마디씩 얹었다.
“당회장님께서도 슬슬 반려를 두시는 편이 나을 시기이긴 하죠.”
늘 충성스러웠던 서재석마저도 가세했다.
“뭐, 평생 혼자 살겠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왕이면 유진성 당회장님네와 연줄을 맺는 게 좋긴 하겠지.”
라울이 중얼거렸다.
“문제는 저 인간이 유일하게 절망적으로 재능이 없는 분야가 연애라는 점이다.”
테무친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은가, 냉혹한 모태 솔로.”
“시끄럽다.”
라이텔바흐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라울은 곁에서 킥킥거렸다.
“동료분들께서는 기혼이신가요?”
몰래 플레먼이 작은 목소리로 라이텔바흐의 귀에 속삭였다.
“네, 세 녀석 다 자기네 길드의 멤버 중 하나를 반려로 얻었습니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요.”
“그러고 보니 헌터분들은 공개적으로 결혼을 공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야죠. 우린 정부의 잠정적인 적이니까요.”
이런 시대에 가족을 둔다는 것을 위험한 일이다. 특히 목줄이 묶여있는 헌터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이 둔 아내 또는 남편, 그리고 그 자녀들은 자칫 정부 측이 그들을 위협할 약점 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헌터는 결혼하더라도 비밀리에 몰래 하며 관계자 외에는 되도록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같은 헌터끼리 가약을 맺는다. 라울도, 테무친도, 재석도 모두 그런 전철을 밟았다.
“라이텔바흐, 당신은 단짝을 둘 의향이 있으신지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장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요.”
라이텔바흐에게는 아직 대의가 더 중요하다. 그 전에 발목이 매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풀리고 뜻밖의 행운이 겹쳐 기적적으로 밝은 세상이 펼쳐진다면 모를까. 그 이전에는 제 발로 덫에 걸려들고 싶지 않다.
‘만일 내게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면 그들은 그걸 이용해 나를 무너뜨리겠지.’
그러니 아직은 짐이 가벼워야 한다. 되도록 잃어버릴 것이 적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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