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88회 불의한 정부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2.20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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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혼은 더 높은 권력들에 복종할지니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거역하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치리자들은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나니 그런즉 네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바로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네게 선을 베푸느니라. 그러나 네가 악한 일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헛되이 칼을 차지 아니하나니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요, 보복하는 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집행하느니라.
(로마서 13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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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의 말씀은 언제나 플레먼에게 걸림돌이 되어왔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그는 이 성경 구절을 발견하였고 이에 큰 마음의 곤경을 겪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걸림돌이 되는 말씀을 두고 마음속에서 격하게 씨름하였다. 마치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하여 탈골된 야곱처럼, 그는 필사적으로 내면의 씨름에 임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정부를 두고 그분의 ‘사역자’라고 표현하였을까? 일차적으로는 주님께서 만방 위에 주권을 행하시는 전능자임을 뜻함을 알고는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왕들의 통치자(계시록 1:5)’이시다. 단순히 ‘하늘의 통치자들’만의 머리가 아니요, 장차 임할 천국의 통치자만 되시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타락하고 오염되었어도 지금 이 악한 세상마저도 그분의 통치권 아래에 있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인 이해를 염두에 두더라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권고는 너무도 플레먼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일과 그들의 신앙을 짓밟는 악마 같은 작자들을 단지 ‘공식적인 정부 기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순응하고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악을 징벌하는 집행자’라고 하셨다. 사실 아무리 불의하고 부정직한 정부라고는 해도 무정부 상태보다는 나은 것이 사실이다. 만일 무정부 상태가 된다면 인간 본연의 타락한 본성은 여과 없이 폭주할 것이고 그 경우 만인이 만민을 대적하는 끔찍한 아수라도가 펼쳐질 것이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정부는 개인이 범하는 범죄와 악행에 대해 징벌할 권한이 있다. 누군가는 손을 더럽혀 나쁜 경찰 역할(Bad Cop)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유지될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저 편지를 쓸 당시에 로마의 임금은 그 악명 높은 네로 황제였다고 한다. 그 이름을 숫자로 풀면 666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끔찍한 악인. 그런 자의 통치마저도 바울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한시적인 다스림에 불과함을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직접 칼을 들고 무력으로 맞서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일까.
실제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다. 시편의 기자들은 악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중에는 다윗도 있다. 다윗은 사울 왕의 핍박으로 너무도 긴 시간을 괴로워하였고 그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요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사울을 심판하셨다. 그러나 다윗 자신은 결코 칼을 빼 들어 직접 사울을 해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회가 있을 때조차도.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모습일까.
그렇다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정부를 향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이것이 늘 고민이었다. 어차피 직접 행동하여 봉기를 일으키거나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행위를 할 생각은 플레먼에게도 별로 없었다. 다만, 불의한 정부의 행태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계시록에 기록된 순교자들의 기도처럼,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시기를 요청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의 기도처럼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가.
이는 늘 딜레마였다. 따지고 보면 두 종류의 기도 모두 틀린 점은 없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이와 같이 말하였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도다(전도서 3:8). 플레먼은 궁금했다. 그러면 지금은 과연 전쟁할 때인가, 아니면 화평할 때인가. 이미 기독교인들은 더 몰락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면 더는 화평을 추구할 이유란 희박해진 것이 아닌가.
이러한 고민으로 씨름해온 끝에 플레먼은 성경적인 정답을 명쾌하게 내리기보다는 체념의 선택을 하였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아무 힘도 없다. 정부와 맞설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그들을 축복해 줄 마음의 내킴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주님의 재림이 거듭 지연되기만 한다면? 언제까지 비참한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라이텔바흐가 던진 질문은 이런 배경에 있던 플레먼에게 큰 곤란함을 주었다.
“라이텔바흐, 당신은 지금의 정부를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건가요?”
자신과는 달리 라이텔바흐는 실질적인 힘을 가졌다. 응징해야 할 당위성과 정신적인 집념도 충분하다. 그리고 어떤 과격한 행동이든 실제 열매로 연결시킬 충분한 지식과 지혜를 지녔다. 아직은 부족하나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위협적인 수준으로 세력, 권력, 재력, 인맥을 축적 중이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라이텔바흐는 대체 무얼 하길 원하는 것일까.
“당신이 정말로 정복하려는 대상은 헬게이트입니까, 아니면…….”
“글쎄요, 플레먼. 인류의 적은 과연 헬게이트일까요, 혹은 인류를 병들게 한 어리석은 망령의 허수아비들일까요.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그 둘을 구태여 구분해 놓을 필요성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어느 순간 직설적인 태도가 드러나고 만 라이텔바흐.
“바로 그런 자들이, 자격도 없고 부적절한 자들이 군림하는 바람에 하늘도 인류를 저버린 것인지 모르죠. 그렇다면 마땅히 목을 매달아 처형할 자들을 제물로 내놓는 것이 천벌을 거둘 유일한 길인지도 모르죠.”
라이텔바흐의 노골적인 과격 표현에 플레먼은 순간적으로 다윗이 처형했던 사울의 후손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왕이 된 이후에 다윗은 옛 원한을 다 잊고 사울의 후손들을 정중히 대한다. 특별히 그의 친구 요나단의 아들에게는 더욱더. 그러나 사울 생전에 사울 일가가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국가에 벌을 내리셨을 때, 다윗은 사심이 아닌 공의에 따라 사울의 후손들을 기브온 사람들의 요청대로 사형대에 내준다. 라이텔바흐는 과연 다윗의 마음대로 이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사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가.
“소장님.”
“확실히 인류를 강탈한 최초의 총통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권 교체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이뤄졌죠. 이전의 범죄를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그것이 애매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실상은 이들 일련의 정권들이 본질상 모두 똑같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똑같이 소수 민족 학살에 동참했고 이데올로기 숙청에 가담했다. 단지 감투와 왕좌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그 스피릿은 동일했다.
라이텔바흐는 여기에 환멸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는 헌터 선배들에게서 지난 세월의 역사들을 들은 후, 자신이 겪었던 30년 간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깊이 묵상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화살을 겨냥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얼굴도 알지 못하는 다른 동포들을 괴롭게 한 근원을 찾길 원했다. 만일 특정 세력이 그 원흉이라면 그들을 처단하면 된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세력이 서로가 서로를 뒤엎는 상잔을 벌이는 와중에 같은 범죄에 발을 담갔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사울이 죽었다면 사울의 후손들에게라도 죗값을 물어야 한단 말인가.’
플레먼의 낯빛이 어두움에 물들었다.
“어떤 형태일지는 몰라도 언젠가 근본적인 개혁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라이텔바흐의 대답은 명료하면서도 모호했다.
“당신이 직접 그 혁명의 집행에 기여하실 생각인지요?”
“보는 관점에 따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플레먼에게 모든 것을 보여줄 의향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
“불안합니까, 플레먼?”
“무엇이 말이죠?”
“제가 불온 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염려가 들까봐 말이죠. 당신 입장에서 역지사지해서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법도 싶더군요.”
라이텔바흐는 일부러 배려심 가득한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친절함이 조금도 없는 이 시대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당신에게는 버거운 질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와 얽힘으로써 생길지도 모를 일들을 생각하면 불안하겠죠.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느껴지려나요.”
플레먼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변함없이 당신에게 신실하게 대할 생각입니다. 적어도 힘이 닿는 한 노력은 하겠습니다.”
“중요한 갈림길에 섰을 때 이 몸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더 곤란한 책문이다.
“어떠한 상황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최대한 당신을 믿고 이해해 보고는 싶습니다.”
플레먼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방금의 말에 무심코 아주 약간의 거짓말이 섞였다. 플레먼은 주님 외에 어느 사람도 믿지 않는다. 친구조차도 두려움에 얼마든지 자신을 팔아넘길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랑하는 동료들마저도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라이텔바흐라면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라이텔바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세계 정부와 라이텔바흐는 충돌하게 될까. 불확실한 가정이지만 언젠가 그런 미래가 닥칠지도 모른다. 어쩌면 라이텔바흐 개인을 넘어서 헌터 세력 전체가 그 충돌에 가담할지도 모르지. 그러면 다시금 내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내전 이후에 세상은 어떤 향방으로 떨어질까. 과연 그때 빚어질 결과물이 비극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보다 더 떨어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안일한 것이다. 언제든 더 떨어질 심연은 존재한다. 만약에 내전의 여파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나마 보존한 생존의 지대마저 잃고 완전한 몰락과 멸종의 길로 떨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설마 그런 상황을 허락하실까.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의지하기를 원하나 이미 긴 세월에 걸쳐 수난을 겪어온 나약한 자의 관점에서 의심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당신이라면 적어도 지금의 상태를 변화 없이 그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라이텔바흐가 말했다.
“비록 접근법에 있어서는 저와 당신 사이에 견해차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요.”
완벽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대화를 통해 유추되는 바에 따르면, 라이텔바흐는 혁명적인 방법으로 인류의 현 상태를 타파하기를 원한다. 그 개혁의 창이 겨냥하는 상대가 단지 인외 재앙인 헬게이트에만 국한되지는 않은 듯하다. 시간의 문제이겠지만 언젠가 라이텔바흐는 어떤 형태로든 인류를 통치하는 열 개 권역의 지도자들에게 칼을 겨냥할 것이다.
“여전히 저는 무력이나 불법으로 정부에 대적하는 일에는 반대입니다.”
플레먼은 성경 말씀에 복종하는 길을 택했다. 그 말씀의 뜻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해도, 적어도 지금은 이해한 만큼 순종하기를 원한다. 아니, 원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양심이 그렇게 이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악을 행하는 불의한 통치자들의 권세를 정당화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나 역시도.’
바라는 바는 하나님의 개입이다. 과거에 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빌론 제국은 페르시아의 손에 멸망했다. 비록 페르시아의 왕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음을 알지 못했지만, 그 일도 분명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모든 정부를 청지기로서 세우신 장본인이심은 맞지만, 그 청지기들의 불의함이나 의로움에 맞게 합당한 상벌을 주실 분도 그분이시다. 정부에 대한 심판은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만은 그 순리에 복종해야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바빌론 정부에 대적하여 봉기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도 바빌론이 심판을 받아 마땅함을 알았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 심판을 자기 손으로 집행하기를 거절했다.
‘만일 라이텔바흐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때 그는 실패하여 쓰러질까? 아니면 또 한 명의 고레스 대왕처럼 될까?’
아주 어리석은 가정이지만 이런 기대도 스쳤다. 물론 플레먼의 마음은 라이텔바흐가 그저 조용히 생명을 보존하며 오래오래 살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아주 깊은 속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간사한 이기심’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인 자신이 직접 손을 더럽힐 수 없다면,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빌론에 직접 대적하지 않기를 택했다면, 적어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해 주시기를 바라는 건 괜찮지 않을까?
‘어리석은 생각이야.’
죄책감이 든 플레먼은 스스로를 부인했다. 이건 간사함의 문제이기 이전에 친구인 라이텔바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금 그를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을 위한 도구로서 이용하려 한다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옹립하려 했던 유대인들과 자신이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이런 복잡다단한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차량은 시더우드에 도착했다. 졸던 테무친, 서재석, 라울도 깨어났고 라이텔바흐와 플레먼의 대화도 잠시 멈춰졌다.
“어서 가죠. 손님이 기다리겠습니다.”
“네.”
플레먼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려 애를 쓰며 마음의 번민과 격하게 씨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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