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1회 기습 공격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5.31 | 회차평점 0
|
사실 처음부터 플레먼은 이번 여행이 내키지 않았다. 어떤 중요한 것을 알고 싶다는 막연한 의무감에 이끌려 나서긴 했으나 당연히 유쾌한 감정이 동반될 리는 만무했다. 평화롭고 사고 없는 일상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그의 성품상 모험이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라이텔바흐의 제안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선택했을 때, 플레먼은 마음으로 번민하였고 스스로의 결정에 고민을 느꼈다. 잘못 선택했다고 느끼는, 그런 종류의 후회는 아니었다. 그의 선택에 어떤 형태인지 몰라도 의미가 있으리라고 기대했으며 그의 양심과 영도 그것을 확증해 주었다. 하지만 정말 옳은 결정인지 쾌적한 기분이 들지 않아 불편감이 계속 그를 찔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연약한 자신이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알 수 없는 의무감에 이끌리는 바람에 라이텔바흐의 제안을 뿌리치지 않았다. 이 정도 선에서 멈추는 편이 나을 뻔했을까.
‘이미 헬게이트를 여러 차례 돌파했다.’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헬게이트가 정말로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것들이 정말 지옥의 본체 혹은 잔재로부터 온 것인가. 인류가 고작 그것들조차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지금처럼 빌빌 기는 게 현실이라면, 장차 다가올 시련들을 어찌 다 뚫고 일어서겠는가. 하나님의 두려운 날을 마주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지금의 세상이 막막하게 생각되었다.
‘부끄럽지만 우리의 앞날은 너무도 막막하다.’
마치 옮겨야 할 짐이 산더미인데 그중 고작 단 하나를 옮기지 못해 주저앉은 것이나 다름없는 현주소이다. 복음의 입술은 봉쇄되었고 세상을 상대로는 철저히 패배했으며 눈앞의 재앙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왜 생겼는지도 모르며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맞는지도 확신이 없다. 이런 영적 패배 가운데 눌려 살기를 원치는 않는다. 생활이 불편해지고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도 싫지만, 영적으로 모든 의미를 상실한 채 시체처럼 사는 것은 더욱 싫다.
‘라이텔바흐와 헌터들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플레먼은 당장에 산적한 마음의 눌림과 시대적 과제를 돌파하기에 앞서 먼저는 모든 비밀들이 맞닿은 열쇠를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헌터들은 대체 누구인가. 늘 궁금해했으며 무의식중에 동경하기는 했으나 그들을 잘 알지는 못한다.
어째서 그들은 헬게이트라는 실체를 타격할 수 있는가. 헌터의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부정한 권세인가, 중립적인 권능인가, 신성한 권능인가. 헌터들의 능력과 그 근원이라고 하는 라이텔바흐는 사실 아주 거룩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계 정부처럼 악독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한 명의 인간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그의 힘 역시 그리 거룩해 보이지도 않으며 악해 보이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전자기력과 중력이 자연계의 중립적인 질서이며 도덕성이 깃들어 있지 않듯, 헌터들의 안티-게이팅 에너지 역시 동일한 감각을 준다. 느껴지는 바가 진실의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어쨌건, 그들이 어떤 영적인 힘을 지닌 것은 아닌 것 같다. 영적인 힘이라면 반드시 거룩 혹은 사악, 둘 중 하나로만 분류될 테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헬게이트들은 헌터들의 능력으로만 타격되는 것인가. 이는 헬게이트라는 존재 역시 진짜 영적 차원의 실체라기보다는, 그 하부 차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하는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현상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리는 없으니, 물리계에 속한 현상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의 차원에서 흘러나온 오염물이란 뜻인가.
‘핵실험 오염물 같은 건가?’
과거에는 핵 현상을 몰랐기에 방사성 동위원소의 오염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인 이형 현상처럼 다가왔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어떤 도덕적 성품이나 방향성을 가진 힘은 아니다. 선한 마음을 소유했다고 해서 방사선이 영향을 덜 미치는 것은 아니며 악한 마음을 지녔다고 더 많은 방사성 상호작용을 하는 것도 안다.
어쩌면 헬게이트란 것도 원리만 설명되지 않았을 뿐, 창조 질서 내지는 왜곡된 창조 질서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영역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체 왜 이 시점에 인류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는가. 자연 질서라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지는 않다. 모든 요소는 선한 것이건 악한 것이건 중립적인 것이건 선하신 하나님의 손안에서 통제된다. 질병도, 재난도, 자연재해도, 그분의 주권적인 허락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그분이 악을 만드신 것은 아니나 그것들을 그분의 도구로 쓰실 수 있으며 허락하시는 데는 반드시 목적과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악마들이나 지옥이 아닌, 헬게이트라는 애매한 실체들을 징벌의 도구로 택하셨으며, 그리스도인이나 천사가 아닌, 헌터라는 정체불명의 인간들을 견제의 도구로 취하셨을까. 도무지 플레먼의 머리로는 설명되지 않았으나, 이 작은 문제마저 해답을 얻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과 심판의 날에 대한 것처럼,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거대한 본질적 문제들에는 대답의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이런 심오한 고민으로 마음을 쓰는 플레먼과 달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눈앞의 일들에만 사로잡혀 있음이 훤히 보였다. 사실 그렇지 아니한가. 정말 중요한 질문, 이를테면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만물의 시작과 끝이 무엇이며 어떤 목적을 향해 수렴하는지 진지하게 묻는 이는 적다. 그런 고민을 하는 자가 한둘이라면 그들 곁에서 같이 일하고 생활하는 대다수의 지인은 당장의 일들만을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며, 내 일과 우리 집단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좀 더 깊이 있는 경우라도 사상이나 이념, 가치관의 문제에 매몰되는 정도가 전부이다.
라이텔바흐부터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인간 개체이지만 그의 목표는 항상 현세의 적을 정복하는 데 있었다. 헬게이트 또는 세계 정부처럼. 당연히 그의 길을 따르는 헌터들이라고 다를 이유는 없다. 아퀼라와 게오르그도 저마다 자기 생각과 소견이 옳다고 여기며 매일 말다툼과 논쟁을 일삼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생각이 지나치게 깊은 플레먼 같은 사람만 고뇌할 따름이다. 그와 함께 마음의 깊은 것을 공유할 사람이 없는 탓이다. 그나마 어니스트라면 모를까. 그는 플레먼만큼 사고의 깊이가 정교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가치의 방향성은 같은 쪽으로 정렬되어 있으니까. 한참을 그와 떨어져 있으니 그 따스한 공감마저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곳에서 보호해 주는 존재들이 저 사람들임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위급한 공습이나 사회적인 공격이 엄습할 때 저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은 심약하여 쉽게 부서지겠지.
그리고 시베리아 북부의 목표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지 사흘째가 되었다.
-잠시 거기서 대기하시지.-
암약하던 어둠이 침공하였다. 더는 이변 현상을 이용하여 배후에서 올가미를 두는 방식 대신, 노골적인 공격을 택하였다.
하늘로부터 어떤 흑색 칼의 형체가 강하하였다. 라이텔바흐의 눈마저 미리 예측하지 못한, 난데없이 소환된 실체였다. 특정 좌표에 고정되지도, 영역 전개를 통해 영향력을 미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 헬게이트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투사체를 감지한 라이텔바흐가 재빨리 힘을 사용하여 검을 분쇄하였다. 그의 손에서 강력한 백색 파동이 방출되더니 공명을 일으켜 검의 구성 방정식을 해체하였다. 하지만 열 자루의 칼 중 하나는 아슬아슬하게 선체를 스쳤다.
물리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검 자체가 물리적 물체가 아닌 듯했다. 대신 미약하게 다크포스의 침식이 시작되었다. 이마저도 라이텔바흐가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통해 해독했으나 미약하게 가해진 타격은 비가역적이었다. 출력이 저하된 에어크래프트는 천천히 안전 모드로 전환되어 하강하였다. 선체가 바닥에 착륙하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동력이 중단되었다.
“야단났군.”
라이텔바흐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뭔가가 올 것을 예감한 것인지 침착한 태도였다. 다행히 세 기의 에어크래프트 중 타격을 입은 것은 선원들이 탑승한 한 척뿐이다. 나머지를 이용하면 추후 이동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혹여 타격 된 에어크래프트에 적재한 화물, 특히나 헌터웨폰이나 엘릭서에 손상이 가해졌다면 꽤 중대한 손실이 될 수 있다.
“일단 여기서 정박합시다.”
라이텔바흐를 필두로 일행 모두는 바깥으로 나왔다. 사방은 눈밭이었고 하늘에서는 서리가 빗발치는 중이었다. 플레먼은 코트를 단단히 껴입고도 몸을 떨었다. 게오르그는 워낙 이런 환경에 익숙한 것인지 멀쩡해 보였고 헌터들은 워낙 육체가 강해서인지 얇은 전투복으로도 견디었다.
“조심하시길.”
일반인 동료들을 향해 라이텔바흐가 말했다.
“우릴 공격한 자가 아무래도 가까이에서 대기하는 모양입니다.”
그는 이럴 줄 알았으면 비전투원은 배후에 남겨둘 걸 하고 내심 후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까지 어떻게 다 예견하겠는가.
얼마 정도 걸어가던 중, 대장은 뭔가를 감지하고는 소리쳤다.
“위험……!”
그와 동시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 모양 형체가 라이텔바흐를 기습했다. 즉각 상대의 무기를 주먹으로 튕겨낸 그는 곧바로 품에서 곤봉 형태의 헌터웨폰을 꺼내 대비 태세를 갖췄다. 이어서 수수께끼의 자객은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연격을 쏟아부었다. 둘은 합을 주고받으며 맹렬하게 겨루었다. 헬게이트 내부에서 이뤄지는 싸움이 아닌지라 인간의 물리적 규격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이었다. 그래서인지 전과는 달리 플레먼도 라이텔바흐의 움직임을 잔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누구지?”
-막아내다니, 흥미로운 실력이군, 필멸자.-
둔탁한 일격이 하마터면 라이텔바흐의 머리를 강타할 뻔했으나 다시금 가까스로 수비하였다. 처음으로 라이텔바흐는 여유롭지 않은 표정으로 진땀을 흘렸다. 그런 모습은 헌터들에게도 매우 낯선 것이었다.
“멀리 떨어지시오, 셋 다.”
다급한 목소리로 라이텔바흐가 아퀼라, 게오르그, 플레먼에게 외쳤다.
“협공 준비해.”
이어서 그는 서재석, 테무친, 라울에게도 명령투로 외쳤다.
‘저분이 일대일 싸움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재석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상대의 정체가 헬게이트나 그 파생물은 아닌 것처럼 보이나, 그렇다고 인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라이텔바흐를 상대로 일대일로 격투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헬게이트와 전투하는 헌터로서의 능력을 떠나, 순수 무투와 무기술로도 말이다.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실력을 확인해 보도록 하지.-
가면을 쓴 괴한의 도발에 라이텔바흐는 이를 악물며 손에 힘을 주었다.
|
이전회
110회 합류 |
다음회
112회 강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