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2회 강적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6.04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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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텔바흐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본 적은 없다. 그나마 가장 엇비슷했던 적이 예전 그 ‘흑염룡’이 출현했던 시절이지만, 그때도 근소 우위는 라이텔바흐 쪽이었다. 그 괴물보다 스펙 상으로는 더 강했던 담무스나 니므롯, 바알이나 몰렉의 경우에도 오히려 상대적인 난도는 낮았는데 이는 라이텔바흐의 급진적인 성장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더 우위의 능력치를 지닌 존재와 겨룰 때 어찌 대응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채애앵.
두 전사의 무기가 검날의 형태로 환원되었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칼집 속에 담긴 진짜 무기가 공기 중에 노출되었다. 라이텔바흐의 양날 검이 괴한의 보랏빛 검날과 충돌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일단 두 존재의 충돌로 인해서 발생하는 안티-게이팅 에너지나 다크포스는 전혀 없다. 한 치의 힘도 흘리지 않고 오롯이 물리력으로만 힘을 맞대는 중이다.
‘위험한 상대로군.’
라이텔바흐는 저번에 더 썬을 죽일 때보다 더욱 긴장했다. 그때는 힘이 모두 소진된 상태로도 여유롭게 임했지만 지금은 그러면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섭지는 않았다. 죽음을 방불한 고통에는 워낙 익숙해진 터다. 생명을 건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너는 누구냐?”
-나 역시 너에 대해서 알고 싶군.-
“베링 해협과 시베리아의 이변, 네 녀석의 작품인가?”
-답을 알고 싶다면 실력으로 알아내 보시지. 나 역시 그러하마.-
골치 아픈 상대가 나타났다. 라이텔바흐는 날렵한 솜씨로 재빨리 변칙적인 검무를 펼쳤다. 그가 아주 살짝 상대의 옷깃을 칼날로 스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는 숨겨둔 능력을 사용하였다.
-으음?-
예상하지 못한 현상에 침입자는 멈칫하였다. 완벽하게 차단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가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견인하여 강제로 끌어당겼다. 완벽하게 호일로 싸매어 감싼 밀폐 용기로부터 음식물의 냄새가 새어나가듯, 세나케립이 봉해두었던 내면의 에너지가 칼날로 낸 옷깃의 기스를 통해서 사출되었다.
-그 능력, 설마 역병 침식 모드의 헬게이트들을 조종할 때 쓴 이능인가?-
그제야 세나케립은 한 가지 수수께끼가 올바르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라이텔바흐가 북미 툰드라 일대의 헬게이트 예정 출현 시간을 재조정하여 늦출 때는 얼추 의심했으나 단서를 쥐지는 못했다. 역병형 헬게이트들의 침식 공간의 좌표 패턴을 변경할 때는 약간 더 의구심을 품었다. 직접 검을 마주 대며 합을 나누니 명쾌해졌다.
-너 설마 우리의 코드를 해킹할 수 있게 된 건가?-
라이텔바흐는 대답 대신 날카로운 공격으로 상대를 밀어내었다. 이미 세나케립에서 나간 암흑의 힘이 주변 공간을 옅게나마 더럽히는 바람에 반동으로 라이텔바흐의 안티-게이팅 파워도 활성화되었다. 동시에 사건의 지평선도 발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덕분에 초인적인 움직임을 내는 일이 허락되었다.
이에 세나케립도 힘의 금제를 일부 풀고 더욱 매섭게 몰아붙였다. 이제 물리적인 궤적 안에 있던 두 존재의 싸움은 눈으로도 관측 장비로도 쫓기 어려운 서커스 묘기로 변하였고 정상적인 역학 법칙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인과율 밖의 신체 움직임이 난무하였다.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절단되며 깍두기처럼 큐브 형태로 잘게 쪼개졌다.
“지금이다.”
타아앙.
매우 빠른 속도로 세나케립의 귓가를 스쳐 간 탄환. 가면의 일부가 부서졌다. 라울의 원거리 사격이었다. EX 급 헌터를 위협하는 수준의 외계 침공자를 일개 SS급 헌터의 평시 공격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 리는 없기에 기묘한 긴장감과 위화감이 감돌았다.
-크윽, 무슨 장난을 친 거지?-
틈새를 노린 라이텔바흐는 검 안에 백색 파동을 담아 매섭게 세나케립을 난도질하였다. 물론 헬게이트 따위와는 격이 다른 관리자급이기에 모두 정밀하게 예측하여 막아내었다. 대신 옷가에 기스가 더 많이 생겼고 라이텔바흐는 해킹으로 그 내부를 조종하여 전장을 더 넓게 펼쳤다.
‘주의해서 제어해야 한다.’
지나치게 싸움을 크게 벌리면 세 민간인 동료가 휘말린다. 그는 신중하게 암흑의 힘이 순회하는 범위를 제한하였다. 반경 30m 이내. 이 정도면 플레먼이나 다른 두 사람으로부터 충분히 안전거리를 둔 셈이다.
‘이 이상의 정교한 통제는 무리인가?’
그래도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네게서 나온 힘도 본질상으로는 헬게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군.”
설마 전혀 대응하지 못할 완전한 미지수의 권능을 마주할지 몰라 약간은 걱정했다.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다행히 눈앞의 존재는 불가항력의 초자연적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현시대 재앙의 발생 메커니즘 가운데 약간 더 상층부에 있는 게 전부인 듯하다.
“위험하긴 하지만 승률이 아주 낮은 건 아니야.”
이어지는 재석의 지원 공격. 녹색 수정 창이 괴물의 허리를 매우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선혈처럼 생긴 물질이 튀었다. 이번에도 다른 헌터의 공격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채 의외로 쉽게 데미지를 입은 세나케립은 라이텔바흐를 노려보았다.
-응용력이 뛰어나군.-
괴물은 알아차렸다. 라이텔바흐, 저 헌터가 소유한 ‘헬게이트 시스템을 해킹하는 능력’은 부분적이나마 중간관리자인 자신에게도 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심지어는 원리는 몰라도 세나케립 같은 이계 존재와 헌터들 사이의 능력 격차를 재조정하여 상대적인 위격 차를 변경하는 방식으로도 응용되는 듯하다. 라울이나 재석의 이능이 세나케립에게 미치는 유효한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반대로 세나케립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극소화하는 식으로.
-그런 방식으로도 쓸 수 있다니, 충격적이군. 설마 그간 꼭꼭 숨겨온 건가.-
만일 이런 능력의 존재가 공개된다면 헌터 측도 세계정부 측도 발칵 뒤집히겠지. 물론 라이텔바흐라는 인간의 무게감 자체가 이미 엄청나긴 하다만, 그래도 던전이나 헬게이트의 상대적 난도 자체를 바꿔버린다는 것은 혁명적인 전술이다.
-하지만 잔챙이들이 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건 실수다.-
세나케립은 무시무시한 민첩성으로 재석을 공격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압도적인 권능에 재석은 오금이 저렸다. 힘의 크기나 발현 효과가 크다는 것이 아니다. 더욱 화려한 이능력은 많이 보아왔지만, 저 외계 공격자의 본질적 힘은 그 압축도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원에 거하는 실체. 마치 3차원을 거니는 개미가 11차원을 노니는 생명체 앞에 노출된 듯한 감각이다. 시간 면에서도 거주하는 차원이 다른 것인지 자신이 한 번 움직일 찰나에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을 압축하여 행동하는 것 같다.
‘주, 죽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의 검의 궤적. 썰릴 것을 각오하고 공포를 마주한 순간, 라이텔바흐의 검이 그를 구조하였다. 공간의 굴곡마저 유발하는 날카로운 절단 현상이 세나케립의 공격을 모두 상쇄하였다.
“네 상대는 이쪽이다.”
다음 순간, 라이텔바흐의 손 위에 황금빛 불꽃이 생성되었다. 헬게이트의 실체와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정확하게 동량으로 상쇄 소멸하여 생성한 섬멸물질, 그것을 더욱 축퇴하여 발현해낸 페이즈 2의 섬멸물질이다. 압축된 그 힘은 더욱 날카롭게 정제되어 매서운 관통력의 구슬이 되었다. 소형 태양은 라이텔바흐가 미리 연산하여 직물 형태로 짜둔 ‘사건의 지평선’의 궤도를 따라 가속되었다. 미처 세나케립이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목을 관통했다.
콰아아아앙.
파괴 범위는 힘의 압축적인 제어 덕에 거의 없었으나 발산된 충격파의 질적 위압감은 상당했다. 다크포스의 침식 범위 밖에 있던 플레먼조차 옅게나마 힘의 위력을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과연, 헌터들의 왕이라 이건가.-
약간의 손상을 순식간에 복구해 낸 세나케립. 그는 흥미가 동하였는지 서서히 본 실력을 꺼낼 기세를 드러내었다.
-서로의 패를 어느 정도는 보이지 않을 수 없겠군.-
중간관리자의 손바닥 위에 소형 헬게이트가 만들어졌다. 라이텔바흐는 눈을 크게 뜨고 그 현상을 관측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 드러났다. 헬게이트를 사전 조건을 축적하지 않고 원하는 때 원하는 위치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바벨탑이나 그 SSS랭크 던전조차도 체계적인 생성 공정을 생성한 뒤에야 헬게이트를 조성하였다. 저자는 그 최소한의 절차도 무시하는가?’
더 무서운 점은 그 헬게이트의 부피와 밀도를 마음대로 조정한다는 것이었다. 예리한 검의 형태로 압축된 헬게이트. 본래 저런 식으로 헬게이트 자체를 압력으로 눌러 담는 일은 불가능하다. 팽창하려는 음압이 크기 때문이다. 저렇게 눌러서 무기 형태로 만들면 위력만 해도 최상위 어비씨언들의 오의를 우습게 만들 수 있다.
콰아아앙.
라이텔바흐와 세나케립의 일격이 충돌하자 주변의 기압이 크게 변했다. 만일 여기서 더 힘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시베리아 전체를 침식하는 거대한 붕괴 현상으로 번지는 일도 능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제한 없이 허락되는 능력은 아닐 테지.”
대량의 백색파동을 압축하여 세나케립 주위의 5m 반경을 완전히 압착하려 하는 라이텔바흐. 어느 정도는 통하였다. 하지만 금세 뚫어냈다. 지상 최강의 헌터가 제대로 각을 잡고 쏟아붓는 저 백파 세례를 맞고 1초 이상을 버틸 헬게이트 개체는 현재까지 등장한 바 없다.
-강하군.-
직전에 생성한 헬게이트가 부서지자 세나케립은 양손에 다크포스를 머금고 반격하였다. 헬게이트들에서 나오는 싸구려 다크포스와는 향기의 밀도가 다른, 섬뜩한 이질적 에너지. 닿는 것만으로도 최상위 헌터를 녹일, 마치 강산성의 액체와 같은 힘이다.
촤아아아악.
이번에는 헌터웨폰에 페이즈 2 섬멸물질을 압축하여 검격을 휘두른 헌터. 괴물의 양손이 절단되었다. 순식간에 복구되긴 했으나 다크포스의 기운은 깔끔하게 단절되어 현실 너머로 사라졌다.
플레먼은 저 멀리로 도망치는 와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텔바흐를 저렇게까지 곤경에 몰아넣는 상대가 나타났다고?’
거리가 꽤 떨어졌는데도 공기의 압박감이 엄청나다. 플레먼은 무탈하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헌터들이 모두 덤벼들었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감이 좋지 않다.
-반갑습니다.-
바로 그때 뒤편에서 기척도 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플레먼이 몸을 돌리자, 로브를 입은 한 가면 쓴 사람이 보였다. 아무래도 사람 모양을 한 무언가라고 해야 맞겠지.
‘아퀼라 씨와 게오르그 씨랑은 떨어진 상태인데.’
처음 기습당할 때 하필 다른 쪽으로 갈라지다 보니 길이 엇갈리고 말았다. 상대도 플레먼이 혼자 있는 시점을 노린 것일까. 왜 접근한 걸까. 이전의 레기온이라는 존재처럼 뭔가를 알아내려는 건가?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성자(聖者)여. 감히 그럴 권한도 없고요.-
라이텔바흐를 기습한 존재와 매우 비슷한 옷차림을 한, 그러나 미묘하게 다른 존재. 플레먼의 머리는 엄습하는 긴장감과 싸우며 이 어지러운 돌발 상황을 바르게 해석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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