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4회 위험한 존재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6.21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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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수천 미터의 상공, 그야말로 혹한의 추위. 아무리 헌터가 강한 육체를 지녔어도 이런 환경에서는 최상의 컨디션을 내지 못한다. 헬게이트가 전개된 영역이라면 차라리 안티-게이팅 파워를 생명 보조 용도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를 하필 이곳으로 잡아 올린 데는 나름의 계산이 뒷받침하였다. 라이텔바흐는 몇 번 합을 나눈 것만으로 상대의 특성을 대략 간파하였다. 이에 걸맞은 전략을 떠올린 그는 싸우는 와중에 입술과 혀의 근육을 미세하게 움직여 마스크의 긴급 통신 장비를 통해 암호화된 부호를 보냈다. 수신자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발레리안에 의해 파견되어 미행하던 자들이었다. 10km의 거리를 두고 일행의 에어크래프트를 따라가던 세 명의 길드장은 상황의 위급함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협조했다.
‘녀석은 헬게이트가 주변에 없는 상태에서도 강한 육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나 대신 인간의 몸이 받는 물리적 제한에 묶여있다.’
헬게이트 같은 경우에는 지박령처럼 어떤 고정점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비씨언들도 오로지 헬게이트가 침식한 권역 안에서만 움직인다. 반면에 저 존재는 마치 인간처럼 어떤 어두운 힘의 매개 작용 없이도 모든 지면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다.
단, 그렇게 맘껏 돌아다니는 대가는 ‘인체가 받는 보편적인 물리 제약’이다. 물론 엄청난 재생력을 지닌 게 차이점이겠지만, 대신 보폭이나 동작이나 움직임이나 질량 등에서는 인간 규격에 갇혀 있다. 따라서 아무런 보조 비행 장비 없이 공중에 던져지면 녀석에게도 큰 핸디캡이 따른다.
이런 조건을 무시하고서 맘껏 싸우려면 내부에서 특별한 힘을 꺼내야만 하겠지. 라이텔바흐와 합을 겨루었을 때처럼. 하지만 그 방법을 택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자신만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헬게이트 권역과 동일한 속성의 필드로 침식하게 된다. 즉, 헌터들 모두가 초인적인 이능을 다룰 조건을 열어주는 격이다.
“이곳이라면 딱 적합하군.”
라이텔바흐는 아군에게 포위된 사냥감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정보를 캐내겠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일단 너는 어디서 왔지?”
심문관의 당돌한 질문에 세나케립은 가소롭다는 듯 조소했다.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설마 우위를 점했다고 착각하는 건가.-
“네가 헬게이트들의 근원지,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수원지(水源池)에서 파견된 존재라는 것 정도는 이미 짐작했다. 아마 나를 미행하며 이변을 일으켜 헬게이트들을 증폭시킨 것도 네놈이었을 테고, 그게 가능하다 함은 상위의 관리 권한을 소유한 사신(使臣)이라는 말이겠지.”
라이텔바흐는 칼의 형태를 변형하여 세나케립을 향해 겨누었다.
“몇 개체인가. 우리 세계에 파견된 놈들이 너 말고도 몇이나 있는가.”
-실력으로 알아내 보던가.-
“너는 무슨 임무를 맡았지? 바벨탑들이 관련되었나. 북쪽 바벨탑을 수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라고 명령받았나?”
-귀찮게 구는군.-
세나케립의 가면에 균열이 생기며 눈 부분이 일부 드러났다. 흰자위가 있을 부분이 검은색이었다. 그 존재의 눈동자는 마치 시체의 색과 같은 청황색으로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타원형이었다.
-헌터의 능력으로는 나를 상대하지 못한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수백 미터 반경 전체가 초고농도의 다크포스에 삼켜졌다. 세나케립이 원하여 일으킨 것이 아닌, 본연의 능력을 꺼내 쓰는 과정에서 생긴 필연적 부작용이다. 그 여파로 테무친과 세 명의 지원군을 공중에 지탱하던 비행 장치가 훼손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헌터들 모두가 매우 강력한 안티-게이팅 파워를 활성화하여 공기를 마음대로 밟으며 중력을 거슬러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갑니다.”
회색 머리 헌터, 적발의 헌터, 장발의 헌터가 일제히 무기를 들고 각기 다른 방향에서 돌격하였다. 광선처럼 빛나는 막대기를 든 회색 머리 헌터는 번개와 비슷한 에너지를 담아 적을 타격하였다. 웬만한 보스급 어비씨언을 단숨에 녹여버릴 공격을 손등으로 가벼이 막아낸 세나케립은 다시금 기공을 담은 발차기로 상대를 튕겨내었다.
그러나 제대로 타격이 들어가기 전에 적발의 헌터가 섬광을 발하는 수정의 낫을 들고 적의 몸을 베었다. 낫은 마치 유령처럼 공간의 경로를 뒤틀며 유영하였고 모든 방향을 에워두르는 암흑 방벽을 통과하여 틈을 비집고 침투했다. 마치 사차원의 영역을 통해 우회하여 들어가듯, 순간이동을 하는 듯한 모양새로 자신 앞에 나타난 날에 타격받은 세나케립은 잽싸게 회피하였다. 순식간에 재생할 수 있는 손상이라 크게 신경 쓸 바는 아니었지만, 유효타를 받은 것이 거슬렸다.
-해킹으로 계속 방해하는 건가.-
그는 헌터들 따위에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라이텔바흐만 주시했다. 싸움을 하는 내내 라이텔바흐의 감찰안과 분석안, 그리고 이터널 셀은 과열에 가깝게 활성화되어 연산을 시행 중이었다. 눈동자는 붉은 섬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장난으로는 시간 끌기 밖에 하지 못해.-
세나케립의 등에서 흑색의 촉수 같은 게 돋아나더니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거대한 손 모양의 나무를 피워내었다. 여섯 개의 흉측하고 거대한 팔이 그를 포위한 네 명의 헌터를 주먹으로 밀어내었다.
그러나 표적의 크기를 키우면 그만큼 공격의 기회도 늘어나는 법이다. 라이텔바흐는 재빨리 동료들이 벌어준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는 황금색 검 내부에 대량의 백색파동을 담아 검무를 펼쳤다. 손 모양의 검은 나무들이 절단되었고 그 타격을 연결점으로 삼아 세나케립의 본체 위에도 검격의 연쇄가 쏟아졌다.
-제법이군.-
“이젠 질문에 순순히 대답할 의향이 생겼으려나.”
이미 다크포스의 누출이 충분히 쌓였고 어느덧 SSS 랭크 헬게이트 최중심부에서 낼 수 있는 수준까지 힘을 끌어올린 라이텔바흐. 그는 동쪽 바벨탑을 1층부터 99층까지 순식간에 격파하였던 백파의 화염 폭풍과 동일한 것을 끌어내어 압축한 다음, 손바닥 위에 탄환을 만들어 선형 빔의 형태로 방출하였다. 순수한 에너지양만으로는 그때의 배는 되는 데 대신 흘리지 않게 하였다.
“너희 탑을 분쇄한 파멸의 힘의 최소 백 배다. 혼자서 버틸 수 있을까?”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신속히 쏘아진 화살. 방대한 힘이 3cm 지름 이내로 압축되어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고 집중되니 그 위력은 다크포스나 흑파로는 아무리 농도를 높여도 막아내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세나케립은 신속히 회피하였으나 간발의 차이로 관통당하여 상반신의 절반이 그대로 증발하였다. 그는 생각보다 상대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자각했다.
-크윽.-
곧장 초재생 능력으로 복구를 시작했으나 타격량이 많아서인지 전보다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테무친과 장발의 헌터가 양방향에서 공격했다. 발차기로 두 사람의 무기를 튕겨내고 발로 목을 조르려던 차에 다시금 라이텔바흐의 맹렬한 힘이 담긴 검이 세나케립의 다리를 반쯤 절단하였다.
“큭, 과연 엄청나게 단단하군.”
상체 쪽과 달리 완벽하게 자르지 못하자 라이텔바흐는 손의 통증을 느끼며 탄복하였다. 반동이 손끝에 전달되었는데 꽤나 단단한 뼈인지 제법 아팠다. 나름 대량의 섬멸물질을 얇게 도금한 뒤 사건의 지평선까지 이용해 검의 궤적을 가속한 공격이었는데. 지난번에 힘겹게 죽였던 더 썬, 니므롯조차도 방금의 공격에 맞았으면 수비고 뭐고 몸통과 가드가 통째로 양단되었을 것이다.
“아직 감춰둔 힘이 많이 남았을 테지.”
-하지만 그건 네 녀석도 마찬가지이겠지.-
둘 사이의 신경전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양쪽 모두 상대를 압도할 비장의 무기와 비술을 많이 비축해 두었으나 이 자리에서 드러내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어차피 여기서의 싸움은 쉽게 결착 나지 않을 바이니, 불필요하게 많은 패를 노출하는 것은 어리석다.
-생각보다 소득이 적은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는 세나케립. 그는 찬찬히 계산해 보았다.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중간관리자로서 엄연히 지상의 헬게이트들을 통제할 권리를 받은 ‘살아 숨 쉬는 재앙’이다. 그런 존재이기에 합리적인 연산을 도출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힘을 많이 소비한다면 다섯 명 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라이텔바흐가 지닌 각종 변수를 생각하면 100%의 확률을 보장하긴 어렵다. 이긴다고 해도 상대가 예상외로 강하니 자신 쪽도 멀쩡하게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당장은 맡겨진 임무에 집중해야 하니 그 일에 차질이 생겨서는 곤란하다.
-물론 이대로 그냥 보내기는 위험해.-
라이텔바흐는 오늘의 이 싸움 도중에도 실시간으로 성장했다. 칼을 맞댈 때마다 실력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녀석을 오래 남겨둔다면, 머잖아 힘에서 역전당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간을 보려는 목적으로 기습한 탓인지 준비가 충분치 않은 점이 아쉽다. 저 정도 상대를 확실하게 죽이려면 나름 만반의 채비를 갖춘 상태로 싸워야 하리라. 군대부터 시작해서 전쟁의 무대와 함정 장치에 이르기까지. 라이텔바흐는 원거리 원정 중이니 추가적으로 보급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지원군을 하나씩 떨어트리고 무기를 소모하게 해야 한다. 그 뒤에 일대일로 싸울 수 있도록 무대를 장만하고 자신의 모든 권능을 제한 없이 끌어내야 한다.
너무 늦지도 않게, 그러나 이르지도 않게 설욕전을 마련하자.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이다.-
세나케립은 자신의 몸을 검은 연기의 형태로 바꾸었다. 흐드러지며 퇴장하는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라이텔바흐와 헌터들이 일격을 가했으나 퇴장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저건 위험해.”
라이텔바흐는 매서운 눈매가 적이 퇴각하고 남긴 연기 같은 궤적을 주시하였다.
“처음에 기대했던 바에 비해 관측해 낸 정보가 너무 적어.”
그나마 한 가지의 소득이 있긴 하다. 곧 임할 것으로 계측되는 ‘전 지구적 웨이브’가 저 중간관리자가 지닌 기묘한 힘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것. 저자가 직접 웨이브를 일으키는 근원은 아닌 것 같다. 그 정도의 권한까지 소유한 급이라면 애초에 라이텔바흐가 선전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저 존재는 웨이브의 방향성과 세부 조건을 조율할 열쇠 정도는 지니고 있으리라.
-자, 그러면 우리도 아쉽지만 여기서 작별할까요?-
지상에서 위를 지켜보던 헤로테스는 플레먼에게 인사하였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성자여.-
“잠시만, 당신에게 물을 것이 더 있습니다.”
플레먼은 찝찝한 불쾌감을 떨치지 못했다. 아직 실타래처럼 얽힌 수수께끼를 더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곧 내려올 라이텔바흐와 접촉하기를 바라지 않던 헤로테스는 플레먼의 대답을 묵살하고 안개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부디 그때까지 목숨 잘 붙어있기를 기원하죠.-
제대로 된 악마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고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속한 피조물도 아닌 그 미물은 플레먼의 마음에 혼란의 물결만 잔뜩 일으킨 채 무책임하게 물러났다.
‘난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거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돌이켜 반성해야 할 과오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시작점조차 알지 못한 자신과 형제들이 무슨 수로 회개의 시작을 도모한단 말인가. 가슴의 답답함과 앞일에 대한 막막함으로 인해 그의 영은 쓰라리게 괴로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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