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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3회 밟히는 소금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6.14 | 회차평점 0 0

 

 

 

그 낯선 존재는 통성명을 시도하였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경계심 속에서 플레먼은 본능적으로 이유 모를 안도감을 가졌다. 상대가 무해하다고 판단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에게 허락된 권세가 상당 부분 제한되어 있으며 그 제약이 자신의 기대 이상임을 확인했다.

 

 

“제, 제가 무슨 이유로 그것을 말해주어야 하죠?”

 

 

위협을 느끼면서도 플레먼은 용기를 내어 대꾸했다. 그러자 그 존재는 피식 웃으며 가면을 매만졌다. 생긴 모습은 로브와 가면을 쓴 보통의 사람과 똑같으며 그 이외에는 아무런 가현적인 위화감도 없다. 헬게이트나 그 속에서 나오는 어비씨언들과처럼 검은 힘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예감대로 이 존재가 라이텔바흐와 격전 중인 저 괴한과 동류라면, 오히려 이것은 경각심을 보고 살펴야 할 부분이겠지. 플레먼은 긴장과 용기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다.

 

 

-성자시여, 내 이름을 가르쳐드릴까요?-

 

 

“알고 싶지 않습니다.”

 

 

-헤롯.-

 

 

그 무례하고 배려 없는 직설적 접근에 플레먼은 움찔하였다. 거슬려서가 아니라 상대가 제시한 이름에서 느껴지는 묘한 영적 거부감 때문이었다.

 

 

-우선은 저를 헤롯이라고 불러주시죠.-

 

 

“이천 년간, 사람이 그런 가증스러운 이름을 자신이나 후손의 것으로 취하는 일을 역사 속에서 보아온 일이 없었습니다. 무슨 생각이신지?”

 

 

사실 플레먼은 자신이 지금 내뱉은 말의 결함을 알았다. 저 존재는 어쩌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겠지. 다만, 이런 식의 유도신문을 통해서라도 저 수수께끼의 베일을 조금이나마 벗겨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중이었다.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맞혀볼까요?-

 

 

플레먼은 무응답으로 응수하며 기다렸다. 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거친 싸움의 소리와 섬광과 불꽃이 더욱 거세졌다. 빛의 잔상과 굉음의 진동이 일었다. 라이텔바흐는 여전히 헌터들과 함께 다른 침입자와 싸우고 있으리라. 일부러 힘을 제한하는 것인지 플레먼 자신 쪽으로는 치명적 여파가 전달되지 않았으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헬게이트가 왜 지상에 나타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겠죠?-

 

 

헤롯이라 자칭한 존재가 플레먼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들은.”

 

 

플레먼은 이를 단단히 악물고 강하게 의지를 굳혔다. 두려움을 직면하는 일에는 여전히 많은 영적 에너지가 소비된다.

 

 

“악마(Demon)입니까? 혹은 무저갱(Abyssos)에서 올라온 존재들인지요?”

 

 

더는 에둘러 말하기를 포기한 플레먼은 시간 낭비 없이 본론을 찔렀다.

 

 

“헬게이트는 당신들 악마들이 가져온 재앙입니까? 어비씨언들도 당신들의 힘으로 생성된 혼종들인가요?”

 

 

다른 가설을 떠올리기는 현재로서는 어렵다. 플레먼은 언제나 풀리지 않았던 꺼림칙한 궁금증을 토로하였다. 혹 지금 시대에 펼쳐지는 재난들은 오랜 예언서의 예언들이 눈앞에서 전개되는 성취인가. 혹 무저갱의 악마들이 풀려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것인가 (계시록 9장).

 

 

그러나 그 존재는 플레먼의 기대와 두려움 모두를 짓밟았다.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텐데요?-

 

 

흠칫하며 식은땀을 흘린 플레먼.

 

 

-날짜의 수를 계산해 보면 금방 알지 않습니까?-

 

 

상대가 성경의 계시적 대언을 이해할 정도의 지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여기서 포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 저 존재는 단순한 미물이 아니야. 저자의 말대로.’

 

 

계시록에 약속된 ‘악마들의 봉인 해제’는 정확히 다섯 달의 정해진 시간에 걸쳐 지속된다. 헬게이트의 재난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헌터들의 힘이 통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들은 그렇고 그런 영적 존재라고 보기 어려워.’

 

 

만약에 그들이 정말로 영적 존재였다면, 영적 권능 이외의 방법으로는 타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귀류법으로 추론해 보면, 저 존재들은 영적 존재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하위 차원에 속하는, 말하자면 영물과 미물의 중간쯤 되는 것들이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급의 존재이죠.-

 

 

헤롯이 플레먼의 생각을 추측하여 대답했다.

 

 

-가장 위의 ‘최상급 차원의 존재들’, 감히 그들의 발치에도 다가가지 못할, 그림자를 밟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은, 폐기물에서 파생된 폐기물들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 적들이 ‘지구의 내핵’이라면, 저희는 일개 지각 표면에 고인 마그마, 그쯤 되겠지요. 근원적 원수가 아닌, 파생물의 파생물의 파생물입니다.-

 

 

그는 자존심도 없는 것인지 자조하는 기색조차 없이 냉랭하게 말했다.

 

 

“왜입니까?”

 

 

플레먼은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강대하고 거대한 적도 아닌, 일개 휴지 조각들의 손에 붙이신 것일까요?”

 

 

여기서부터는 눈앞의 대적에게 하는 질문이 아닌, 자신에게 던지는 자문이었다.

 

 

“유다 왕국의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에티오피아의 백만 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하지만 그가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외적을 상대하면서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였을 때, 그는 몰락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도 강대한 여리고를 주님의 힘으로 꺾었으나, 아간이 범죄하자 여리고보다 훨씬 약했던 아이 성 앞에서도 패배했습니다.”

 

 

플레먼의 음성에는 깊은 자조의 한숨이 섞였다.

 

 

“주님께서는 동일한 이유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징벌을 허락하신 것인지…….”

 

 

그의 침울함은 마치 애통하는 자의 탄식과 같았다.

 

 

“우리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권세마저 이겨내고 지옥의 문들 위에 깃발을 꽂았던 자랑스러운 주의 신부였습니다. 비록 땅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존귀가 감춘 바 된, 질그릇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우리는 기도할 줄 아는 자녀였고 하늘의 병기로 악들에 맞서던 위대한 장수들이었습니다.”

 

 

플레먼은 현시대의 동료들이 아닌, 역사 속의 형제자매들,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몸이었던 자랑스러운 자들의 시대를 회고하며 탄복하였다. 분명, 지금의 플레먼과 어니스트, 그리고 지하 교회의 성도들도 변함없이 그 선진들과 더불어 하나의 몸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존재.

 

 

그러나 왜 이토록 다른 모습에 처했단 말인가.

 

 

“그랬던 교회가 어찌하여 땅바닥에까지 떨어졌는지. 아아, 우리는 왜 악마조차도 아닌, 그것의 부스러기에 불과한 존재들에 손에 세상 전체가 붙여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간구를 하지 못하는 꼴에 처했는지요.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몰락한 것인지요.”

 

 

그는 한 비유가 떠올랐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에 쓸 데가 있으리오. 맛을 잃은 소금은 쓸모없게 되어 걸거리에 던져져 사람들에게 밟히리니. 어쩌면 이것이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일까.

 

 

-상부(上部)에서도 당신들에게는-

 

 

헤롯이라 불리는 존재는 차가운 조소로 말하였다.

 

 

-별로 주목할 만한 가치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플레먼은 그 말에서 거대한 모멸감을 받았다.

 

 

-상위 차원의 존재들, 그들은 당신들에 더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전혀 위협이 되지도 않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방치한 채 조금도 임재를 드리우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오히려 영계의 진짜 악마들은 오히려 이 인간계에는 관심이 식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하나님의 뜻이 집행될 통로인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마비되고 손발 묶여 무력화되었으니, 긴장감을 느끼고 전쟁에 임할 이유가 있겠는가.

 

 

끝으로 헤롯은 매우 의미심장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자들은 당신이 거하는 이곳 ‘크로노스(Chronos)의 한 가닥’이 진짜 참값(Canon)이 맞긴 한 지, 그것부터 의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

 

 

 

 

 

라이텔바흐와 세나케립은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갔다. 오래간만에 강적을 만난 라이텔바흐는 헌터로서의 지적 역량을 최대한 동원하여 수싸움을 벌였다. 당장 여기서 모든 패를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도 감춘 카드가 많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둘 다 여기서는 온전히 힘을 다할 수도 없고.

 

 

에어크래프트는 황금의 검을 사출하였다. 그 손잡이는 유도 장치에 의해 곧바로 라이텔바흐의 손에 안착했다.

 

 

“헌터의 전투란, 필연적으로 냉병기 시대로 회귀하게 되지.”

 

 

최상위 헌터 중에서는 라울처럼 원거리 병기를 주 무기로 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라이텔바흐처럼 헌터로서의 능력이 극한에 달하여 웨폰의 도움이 무색한 경우에는 현대 무기 형태의 헌터웨폰보다는 도리어 단순한 냉병기 형 무기가 이능을 담기에 더 유리하다.

 

 

“한번 제대로 춤춰보지.”

 

 

페이즈 2 섬멸물질이 고농도로 압축되어 검날 위에 도배되었다. 일전에 시베리아의 수많은 주민들을 보호할 때 사용한 용량보다 백 배 이상 많다. 그 사이에 라이텔바흐의 제어 용량이 급격히 향상된 것이다.

 

 

-과연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건가. 지금 여기서 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우리도 감당하기 어렵겠군.-

 

 

콰아아앙.

 

 

라이텔바흐의 황금 검과 세나케립의 흑색 병기가 굉음을 내며 충돌했다. 세나케립은 작은 헬게이트를 즉석에서 생성하여 수천 개의 탄환을 쏘듯 방출하였다. 라이텔바흐는 그 모든 것을 예지하여 칼로 베어 소멸케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싸움이 무르익자.

 

 

“너무 늦었군.”

 

 

어딘가에서 날아든 포박의 줄이 세나케립을 세 방향에서 동시에 결박했다. 지원군이 당도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기다렸다는 듯 라울의 탄환이 세나케립의 팔을 관통했다. 헬게이트를 만들어내던 혈맥이 끊기며 잠시 라이텔바흐를 향해 맹렬하게 쏟아지던 공격이 중지되었다.

 

 

-그 꼬맹이의 무기인가?-

 

 

세나케립은 조금의 긴장도 없이 하늘 쪽을 바라보았다. 결박의 끈은 대단히 멀리서 날아온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수십 km 이상.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날 수 있는 신물질은 그리 많지 않다. 물질이라기보다는 엘릭서라고 해야 하려나. 이런 유형의 극도의 고탄성 신축성 물질을 채찍처럼 쓰는 헌터의 정보를 세나케립도 잘 알았다. 워낙 뛰어난 헌터라서 말이다.

 

 

-그렇군. 안티-게이팅 에너지를 이용하면 저 물질을 극도로 가늘게 늘린 상태로도 자유로운 제어와 통제가 가능한 게로군. 아마도 그런 특수 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 꼬맹이의 고유한 헌터 스킬이겠지.-

 

 

바로 그때 라이텔바흐는 대량의 백색 파동을 압축한 손바닥으로 정권을 질렀다. 세나케립은 발을 붙이고 있던 땅에서 분리되어 공중으로 떴다. 큰 타격은 없었으나 제법 높이 올라갔다. 이어서 테무친이 가속형 질량 무기로 적을 강타했다. 원래 헬게이트 안에서만 효력을 보이는 무기인데, 세나케립의 몸에서 새어 나간 어두운 힘과 라이텔바흐가 조금 전 찔러 넣은 백파와 더불어 공명하면서 급격히 활성화되었다. 마치 운석을 맞은 듯, 세나케립은 상공 수 킬로미터까지 솟았다.

 

 

-제법이야.-

 

 

그자를 위쪽으로 끌어당긴 장본인은 결박의 줄을 사용한 세 명의 지원군이었다. 세 사람 모두 소형 핵 엔진으로 가동되는 자율형 에어 보드를 타고 공중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일전에 발레리안의 일행 중에 있었던 세 명의 SSS 랭크 길드장이었다.

 

 

“여기서라면 싸우는데 방해물이 없겠군.”

 

 

사건의 지평선을 활용해 대기를 발판 삼아 도약하여 순식간에 세나케립과 같은 높이로 올라온 라이텔바흐. 그의 손 위에는 황금빛 불꽃으로 만들어진 5미터 지름의 작은 태양이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오늘은 부탁하마.”

 

 

추진 장치의 도움으로 상공으로 올라온 테무친, 결박의 끈을 붙잡고 있는 세 명의 길드장이 라이텔바흐의 신호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를 필두로 다섯 헌터는 강력한 헌터웨폰을 가동하며 협공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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