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6회 고통받는 이유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06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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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텔바흐 일행 측에는 손상되지 않은 채 멀쩡한 기동력을 유지하는 두 척의 에어크래프트가 있었다. 그 두 척은 적의 기습을 받아 동력이 저하된 주력 기체를 견인하여 천천히 이동하였다. 민간인 거주 지역에 이르자 일행은 정비를 위해서 잠시 정박하였다.
헌터들 중 공학에 솜씨가 있는 라울과 가웨인은 손상된 엔진을 수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나머지 일행은 인근 지역에서 필요한 물품을 확보하며 무기와 자원의 상태를 확인하였고 남은 시간에는 휴식을 취했다. 숙소를 잡은 그들은 그곳에서 쉬며 언제 임할지 모를 다음 싸움을 준비하였다.
정체불명의 적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며, 북쪽 탑이 가까워진 만큼 조만간 대규모 전투는 불가피하다. 아마 다음번에는 결전을 치를 것이고 시더우드나 모비딕 호에서 챙겨온 자원들은 그때 전부 소모하게 될 것이다. 헌터들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재석이나 라울처럼 라이텔바흐의 고유 능력을 임시로 빌린 이들은 힘을 미리 체내 혹은 무기 내에 고도로 축적하였다. 결정적인 전투가 이르면 즉각 쏟아내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플레먼이나 아퀼라 같은 민간인이 할 일은 대화와 토론 말고는 없었다. 일단 싸움이나 토벌에는 이들의 몫이 없겠지만, 각자 중요한 대의를 품고 여정에 참여키로 정하였으니,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결말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쨌건 그들도 헬게이트라는 문제가 실존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 명의 구성원이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한 단서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각자 원하는 ‘올바른 세상’을 구축하는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라도, 헬게이트 문제의 본질과 그 근원과 타개책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플레먼은 밤에 잠든 도중, 꿈에서 한 생생한 장면을 보았다. 이곳 구 러시아 지역의 벌판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었다. 그것이 너무도 불편하고 가시방석 같았기에 그는 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매우 피곤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아퀼라가 질문하였고, 말동무가 필요했던 플레먼은 그가 보았던 장면들을 최대한 상세히 풀어 설명하였다.
게오르그는 곁에서 들으며 찬찬히 머리를 굴리더니 뭔가를 알겠다는 듯 외쳤다.
“그 일들은 실제로 오래전에 이 땅에서 있었던 일들이로군.”
“네?”
의미를 몰라 고민하던 플레먼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러시아 지역에서요?”
“포그롬(Pogrom). 큰 박해라는 뜻이지.”
이에 아퀼라도 관심을 보이며 얼굴빛을 변하게 하였다.
“전쟁에 패배하여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 그 이전에는 이 땅을 제정 러시아가 다스렸었지. 그들은 어느 소수 민족을 몹시 핍박하였다고 해. 포그롬이란 일종의 대규모 유혈 사태라고 보면 되는데, 사람들이 증오심에 폭동을 일으켜 특정 그룹을 향해 린치를 가했지. 제정(帝政)은 오히려 그것을 방조하거나 부추겼고.”
플레먼은 역사책의 기록을 떠올려보았다. 그가 공부한 세계사 자료는 이미 세계 정부가 수십 년에 걸친 대규모 편집 및 왜곡 작업을 완료한 뒤에 저술된 것이기에 구멍투성이였고 앞뒤도 잘 맞지 않았으며 해석도 매우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자료에서 학습한 지식은 신뢰하기에 적합지 않으리라. 게오르그는 이 지역의 현지인이니 구전을 통해서라도 더 정확한 정보의 단편을 계승하였겠지.
“왜 그런 폭동이 일어났을까요?”
“나야 모르지. 차르(황제)의 암살 사건 이후 어떤 소수 집단을 희생양 삼아 욕받이로 삼았던 것 같은데, 이미 그 이전부터도 쌓인 감정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
플레먼은 슬픈 마음에 깊이 고민했다. 꿈에서 본 장면에서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입에 담기도 힘든 험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죽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거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증오, 손가락질, 저주, 폭력의 향연, 모멸감까지, 인간의 악독한 마음에서 저절로 새는 ‘썩은 무덤의 악취’를, 플레먼은 꿈을 통해 간접적으로 톡톡히 체험하였다.
‘왜 그렇게까지 맹렬히 미워할까?’
그가 읽어온 성경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유대 민족을 향해 쏟아진 하만이라는 사람의 맹렬한 증오심. 하만은 단지 한 유대인이 자신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분하여 그 사람뿐 아니라 같은 혈통 전체를 제국에서 쓸어버리고자 획책했고, 많은 사람들의 혐오 감정을 이용하여 합법적 폭력의 칙령을 배포했다. 만일 그 계략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패하지 않았다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멸절되었을 수도 있고,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길이 막혔을지도 모르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러시아 지역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이 현재 겪는 이 빈곤함과 어려움이 하늘의 법정에서는 아무런 사법적 근거가 없는 인과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정죄하려거나 통쾌해할 의향은 추호도 없다. 악감정을 가질 이유도 전혀 없고.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심지어 죄로 인하여 질서가 뒤틀린 이 현세에서도 의외로 엄중하고 오차 없이 집행된다.
의인은 없으되 하나도 없으며 오로지 죄인들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무법적 반란’ 속에서도, 악인의 악행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른 악인의 죄를 벌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니 누가 감히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만은 억울하다’라고 하소연할 수 있겠는가.
면밀히 현실을 직면하자면, 사실 자신도 이 책문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주님께 징계의 회초리를 받는 중인 교회, 그 교회의 한 지체로서 무슨 자격이 있어 더 말하겠는가. 역사의 관중으로서 다른 민족의 죄악과 징벌의 역사를 목격하는 것, 그것은 우월감을 주기보다는 그저 씁쓸한 고통의 맛을 혀 위에 적실 뿐이다.
*
라이텔바흐는 저녁마다 플레먼과 둘이서 진솔한 대화의 시간을 나누었다. 여전히 자신이 겪은 비극의 총체를 모두 노출하여 고발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제는 친구를 조금 신뢰해도 된다고 여긴 것인지 과거들을 조금씩이나마 공유했다.
“헌터들은 내게 있어서 혈육과도 같습니다.”
비록 성격이 냉정하기는 해도, 진심을 듣고 보니 라이텔바흐도 그들에게 나름의 유대감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아마 같은 처지에서 서로를 이해해 줄 공감대를 가진 자들이라서 동병상련을 느끼는 것일까. 행복을 같이하는 것보다 오히려 불행을 같이 가질 때 동지 의식은 더 깊어진다고 하였다.
하지만 라이텔바흐가 헌터들에게 갖는 ‘동족 의식’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도 그들은 그와 ‘피와 살’을 공유한 관계이다. 생식을 통한 혈통적 유전 계승과는 방식이 다르긴 해도, 모든 헌터들은 라이텔바흐의 몸에서 나온 특수한 소체들을 이식함으로써 헌터가 되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그의 몸에서 세 종류의 ‘특이성’이 만들어졌고 그 사실을 발견하여 기회로 삼고자 했던 실험실 측에서는 그것을 배양하고 증폭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 이식하기 위해 온갖 고통스러운 시술과 실험을 벌였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라이텔바흐의 신체로부터 배양시켜 뻗어 나오게 한 세포 복합체를 이용해 그를 실험체들에 연결하는 작업에 성공하였다. 그 후로도 이것 이외에 다양한 배양법과 이식법이 성사되었다.
“눈에 담기 힘든, 징그럽고 흉측한 방법들이었습니다.”
말문이 막힌 플레먼은 그저 괴로운 연민으로 듣기만 하였다.
“말초신경계와 척수로부터 새로운 다중 중추신경계를 생성하여 체외로 뻗어나가게 했고 그것을 통해 이터널셀을 복제하여 타 실험체들에 이식하였죠. 내 허리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나와 수십 개의 뇌를 체외에 만들어내는 장면, 상상이 전혀 안 가시겠죠.”
이런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의 추억들을 그는 무덤덤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조직구(histiocyte) 형태로 내 몸에 축적된 나노봇들을 취하기 위해 그들은 소년 시절의 내 피와 살을 끝없이 빼갔습니다. 그것을 주입 당하던 형제들도 만만치 않게 고통스러웠겠죠.”
그런 일들을 당하고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강대한 육체를 유지했다는 것이 경이롭다고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강제로 온몸에서 종양 덩어리를 만들고 적출하는 작업을 수없이 당한 셈인데, 그러고도 멀쩡하게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 것 같군요.”
묵묵히 듣기만 하던 플레먼의 슬픈 표정을 이해한 라이텔바흐는 나직이 웃음 섞인 한숨을 작게 쉬며 상의를 벗었다. 조각상보다도 완벽한 조형미의 경탄스러운 육체가 드러났는데 어찌나 단련되었는지 근육이 금강석보다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피부에는 수술 자국 같은 흉터들이 자잘하게 덮여 있었다. 전에 본 것보다는 많이 줄어들고 연해지기는 했다만.
“어니스트 그 녀석이랑 지내면서 좀 생활이 편해졌는지 많이 아물었습니다.”
“그들에게 실험이나 수술을 당한 자국인가요?”
참담한 심정에 찢어질 듯한 민망함에 북받친 플레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것들도 있고, 그저 심심풀이로 당한 고문의 흔적들도 있죠.”
“사람이 그런 일을 겪고도 멀쩡할 수 있을까요?”
“저는 좀 특이 체질이라서요. 헌터들의 몸에 심긴 나노봇은 심지어 비가역적인 손상까지도 복원할 수 있습니다. 주로 헬게이트와 관련된 손상을 고치는 데 특화된 것이긴 하지만, 그 밖의 상처나 질병에도 효능이 탁월하죠. 말하자면 유사 불사신인 셈입니다.”
그 덕에 지금껏 장애가 되지 않고 멀쩡한 몸으로 버텼단다. 그게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든 복구될 수 있음을 알기에 실험자들도 더욱 마음 놓고 갖가지 잔혹한 일들을 벌일 수 있던 것이겠지.
“소년 시절부터 그런 일을 겪으셨다고요?”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적어도 유아 시절부터 실험실에서 살아온 건 확실합니다. 처음에는 고문까지는 아니고 실험 위주로 당했는데, 좀 자라고 나서는 학대도 같이 겪었죠.”
신체 복구는 그렇다 치고, 그런 환경에서 제대로 발육할 수 있을까. 라이텔바흐가 이렇게 키가 크고 건장하고 반듯한 몸의 청년으로 자라났다는 것이 생물학적인 기적으로 느껴졌다. 보통 그런 지옥 같은 실험실에서 감금되어 자랐다면 바짝 말라비틀어지거나 등이 굽거나 왜소한 몸이 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것도 ‘기적’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생략해야 하는 것일까.
“요약하자면, 내 동료들이 단순한 협력자나 동종업자들이 아니라, 그런 큰 고통을 같이 나눈 자들이요, 혈육이나 다름없는 동포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헌터들은 라이텔바흐에게서 문자 그대로 살과 피를 받은 자들이다. 지상에 다른 혈육이 존재하지 않는 그로서는 원치는 않아도 본능적으로 애착이 갈 수밖에 없다.
“플레먼.”
“네.”
“사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머뭇거리며 뜸을 들이는 라이텔바흐. 플레먼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말씀하세요.”
“실은 어니스트에게서 들었습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의 이야기를.”
잠시 말문이 멈추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라이텔바흐는 최대한 상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도록 주의하여 대화를 이을 기회를 보았다.
“식사하던 중에 너무 궁금해서 제가 캐물은 것이니 그 친구 탓은 아닙니다.”
“알아요. 어니스트는 그저 정직하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백했을 뿐일 겁니다.”
플레먼은 누구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유쾌한 기억은 아니며 여전히 상처로서 남은 흔적이긴 하나, 언제까지고 고통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괴롬을 딛고 앞으로 나가길 원한다. 비록 발걸음을 내디딜 힘이 너무도 미약하고 왜소하다고 하여도.
“미안합니다. 또 슬픈 일을 기억나게 해서.”
“아니에요.”
플레먼은 라이텔바흐의 드넓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위로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이었다.
“같이 약속했잖아요. 아픈 일들도 함께 나누기로. 당신도 솔직하게 말해주었는데 나라고 그저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죠.”
역시나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다 나누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발걸음을 맞춰 조심스럽게 같이 나가는 정도라면 불가능하진 않겠지.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도 묻고 싶습니다.”
라이텔바흐가 부드러운 어조로 친절히 요청했다.
“나는 당신이나 당신의 동료, 그러니까 어니스트나 신티 같은 ‘면역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고 싶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해야겠지만, 나와 헌터들은 그대들을 감시하고 감찰했으며 조사해 왔습니다. 샅샅이 살폈음에도 나는 그대들에게서 책망하거나 책 잡을 일을 전혀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대들이나 그대들 가족들이 정부의 눈 밖에 난 이유는 그대들 측에 사유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플레먼에게 다가갔다. 심지어 그 비밀을 알아낸다면 자신이 세계정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리라고 기대하는 마음에, 친구를 이용하려고까지 했다. 사실 이번 여정에 데려온 것도 무심코 헬게이트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비밀의 단서를 추적할 기회가 생길까 하고 기대한 연유가 없지 않다만.
그러나 참된 유대감이 생기고 나니, 그런 계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접근법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허무감과 회의감이 들었다. 그냥 차라리 정직하고 부드럽게 친구로서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 처음부터 나았을 뻔했다.
“왜 당신들은 그런 어려움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까, 플레먼.”
라이텔바흐의 눈빛이 플레먼의 우수에 찬 눈과 교차하였다.
“혹시 내 섣부른 추측이 너무 어긋난 방향으로 튄 것이 아니라면…….”
플레먼은 친구가 어디까지 접근했는지 몰라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긴장감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이해시켜 주어야 할지 모르는 부담감에서 나오는 감정이었다.
“당신들 혹 ‘만물의 창조자’, 즉 ‘신’을 믿기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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