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117회 어려운 의문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6.07.12 | 회차평점 0
|
너희가 지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해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을 예비하라. 이것이 성경의 당부이다.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성도에게서 ‘살아 숨 쉬는 소망’의 실체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복된 영광이리라.
그러나 플레먼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조금 다른 이유로 인하여 소망에 대해 답하기를 ‘두려워’했다. 세상이 그들의 정체성을 질문할 때, 대개 그 이유는 같은 소망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소망을 정죄하고 책문하여 땅바닥으로 떨어트려 짓밟기 위함이었다.
한 세기 전, 세계의 몰락이 시작되던 초기에는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당당히 고백하다가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며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향해 승리를 거두는 일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 용기의 기백이 꺾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당당히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그렇게 애써봐야 복음의 전파를 다시 불 지피는 데 아무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 참혹한 현실을 수십 년에 걸쳐 확인하다 보니 희망과 의욕이 무참히 파쇄된 것이다.
어느새 비겁자의 유전자가 기독 후손들의 영에 새겨졌고 플레먼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세상의 불의에 지쳐 자발적으로 신의 존재를 발견하고자 하는 구도자들이 찾아올 때에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을 뿐. 적대적인 세계를 향해 먼저 발걸음을 내밀기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만일 평소의 비겁함에 계속 머물렀다면, 플레먼은 입을 열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기묘한 섭리가 그를 이끌었다. 뭔가에 강권함을 받은 듯, 그는 내면에서부터 짙은 갑갑함을 느꼈다.
주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고서는 골수에 불이 붙는 것 같다던 이스라엘의 대언자마냥, 모종의 거룩한 의욕에 휩싸였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플레먼은 제 분수를 잘 알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이상하게도 입술이 먼저 자신의 비겁한 이성을 앞질렀다.
“나는.”
그는 라이텔바흐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대의 눈치가 아닌 그 눈에 담긴 영혼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 전신에서 우러나왔다.
“당신이 예상한 대로, 살아계신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침묵이 잠시 맴돌았다. 라이텔바흐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맥박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저 친구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이런 무익한 염려로 근심하는 자신이 문득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렇군요.”
라이텔바흐는 의외로 짤막하게 반응했다. 사실 그로서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솔직히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대처해보지 못한 낯선 영역. 그의 머릿속에는 궁금증이 많이 맴돌았으나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혔다.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플레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가 실존함을 믿는군요.”
“네.”
애써 용기를 내보았지만, 무엇부터 답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그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보지도 듣지도, 알 수도 없을 텐데요. 신이란 그저 우리가 추상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까?”
라이텔바흐는 저 나름대로 신사다운 태도를 유지해 보려 애쓰며 대화를 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그 존재’가 아니라 ‘그분’입니다.”
“인격적인 존재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우리처럼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니신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만들 때에도 목적성과 의도를 지니고 창조하였단 말입니까.”
“그 말대로예요.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분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분에 의해,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우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죠? 증명할 방법이 있나요?”
플레먼은 이 질문에 잠시 고민하였다. 변증이 필요한 대목인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논증해야 하는가. 그는 이런 일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 망설이던 그는 논리적인 설득이라는 접근법을 잠시 내려놓고 증인의 태도를 취했다.
“기록되어 있어요.”
“네?”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듣고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록해 두셨어요. 비록 지금은 금서가 되어 저희의 골방을 제외한 모든 서재에서 말살되었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플레먼은 이미 기록 말살되어 사라진 ‘불변의 진리’의 존재를 언급하였다. 이래도 좋은 걸까.
“기회가 되면 당신께도 그것을 보여준다면 좋으련만.”
플레먼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따라 자신이 왜 이리 급격히 나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이러려던 것이 아닌데.
“만일 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한다면.”
라이텔바흐는 여전히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엉킨 질문이 많았다.
“왜 세상은 이토록 고통받는 것입니까.”
시작부터 가장 어려운 논쟁으로 시작하는 만만치 않은 자. 라이텔바흐의 질문은 공격하고 까 내리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진정으로 알지 못해 궁금해하는 자의 탐구심의 색채를 띠었다.
“자신을 기쁘시게 하려고 만물을 지었다면서요. 그렇다면 지금 이 고통스러운 상태가 그가 기뻐하시는 바라는 겁니까? 그렇다면.”
라이텔바흐의 궁금증은 플레먼의 역린과도 같은 곳까지 나아갔다.
“그는 불의를 기뻐하는 독재자란 말입니까?”
“천만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본능적으로 발끈할 뻔한 플레먼. 친구에게 화를 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정죄의 도마 위에 오른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불편케 하였다. 아무리 용기를 잃은 자라고 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 있었다. 설령 자신과 동료들은 욕을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면 이 고통스러운 상황은 그의 원래 의도가 아니란 뜻입니까?”
“옳습니다.”
“하지만 플레먼, 그렇게 말하니 나로서는 더 이해되지 않습니다.”
라이텔바흐는 석연치 않아 하며 답답함을 표출하였다.
“세상을 지으신 존재이자 만물을 그의 뜻대로 하시는 이가, 왜 자신이 기뻐하지도 않는 상황을 허락하면서 아무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 것입니까?”
세계 정부는 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정부를 미워하는 라이텔바흐이지만 신의 존재라는 문제에서는 꽉 막힌 듯 마음에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그 부분에 있어서만은 무의식적으로, 부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혹 신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말이 사실일까. 그와 동시에 전능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신은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거나, 혹은 너무도 초월적인 나머지 인간에게 관심이 없거나, 이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이것이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라이텔바흐는 플레먼을 향해 말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 그리고 면역자들 모두가 그런 품성인 것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라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당신이나 그 동료를 더욱 돌봐주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그들은 떠돌아다니며 핍박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 조상들은 부당한 죽임을 당하였습니까?”
“우리는.”
이것은 매우 기초적인 신학 질문이다. 성경 또한 숱하게 논하는 중요한 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답은 논리가 아닌 ‘삶으로서 체득되는’ 성격의 것이다. 아직 하나님의 말씀조차 모르는 라이텔바흐에게 이런저런 변증적 답변을 나열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플레먼 자신의 삶은 이것을 증언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의인이 아닙니다.”
플레먼은 범죄자가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듯 체념하는 어투로 답했다.
“의인은 없어요. 착한 사람도 없고, 선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더기와 같은 불완전한 자들입니다. 이 땅 위에서 벌을 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지 몰라도, 주님의 재판정에 섰을 때 누구도 자신을 의롭게 포장할, 간이 부은 자는 없습니다.”
서러움에 매우 조금 눈물이 흐를 뻔했다.
“당신들이 범죄했다는 말입니까?”
라이텔바흐는 아리송해하며 당황하는 어투로 물었다.
“사람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교만했고, 사랑하지 않았으며, 주를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범죄가 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신이라면 너무 가혹한 분이 아닌가 느껴집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 죄의 본성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차마 이 말은 내뱉지는 못하고 삼킬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주를 배반한 자였습니다.”
플레먼은 교회 전체를 대표해서, 이 시대의 남은 자들 전부를 대표해서 쓰라린 죄책을 고백하였다. 베드로와 같이 주를 부인했으며 가룟 유다와 같이 주를 판 자가 되었다. 지금도 두려움에 주를 부인하고 있는 세대. 이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찌 의인 됨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당신들은 당신들이 징벌을 받고 있다고 믿습니까? 그래서 이런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어찌 말해야 할꼬. 플레먼은 비록 비굴했으나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책이 제거되었음을 여전히 믿음으로 붙들었다. 비록 현실의 눌리는 무게감은 그 믿음을 흔들려고 하지만 이것을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분명 죄를 용서받은 자로서 의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징벌받기에 합당한 비겁한 죄로 얼룩진 불완전한 자. 하나님께서 지금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고통은 그분의 정죄는 아닐지언정 아들을 훈계하는 엄한 책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 책망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혹 자신이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당신들이 받는 고통의 이유가 당신에게 있다면.”
라이텔바흐는 다시 더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내가 받았던 괴로움들도 나의 죄책에 원인이 있습니까?”
난해한 올무에 걸려든 플레먼.
“그, 그건!”
“내가 겪은 시간들도, 내가 남 탓할 것 없이 내가 받아야 할 몫인가요?”
순간 플레먼은 자신이 욥의 친구들처럼 가혹한 고발자가 될까 두려웠다. 자책하는 그의 모습이 친구의 눈에는 마치 자신을 향한 고발처럼 다가와 불편했던 것일까.
“모든 고통이 개별적인 죄에 대한 책임은 아녜요.”
“죄와 상관없이 고통이 들어왔단 말입니까.”
“아뇨. 죄가 모든 죽음과 고통의 시작인 것은 맞아요. 단지, 각 사람이 겪는 고통이 각 사람의 죄와 일대일로 대응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어요.”
“그러면 조상들의 죄가 적용된단 말입니까?”
여기에 이르자 플레먼은 더욱 명쾌히 대답할 용기를 잃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저 질문은 틀린 것이 되기도 하고 맞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사법적으로는 각 사람의 죄로 인해 각 사람을 심판하신다. 하지만 죄의 부정적인 영향은 때로 조상에서부터 자녀에게로 번지기도 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원죄와 죽음으로 신음하게 된 것처럼.
‘하지만 이 말을 하면 가혹한 연좌제처럼 들리지 않을까.’
라이텔바흐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섣불리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어 그분에 대해 오해하게 하면 어떡할지 두려웠다.
“당신이 당한 고통은.”
플레먼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정당하다고 볼 수 없어요. 적어도 그것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일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통해 죄인들을 벌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이 경우도 그런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라이텔바흐가 아직 선악을 구별하기도 전에 부당하게 겪었던 고난들은 그의 탓인가, 조상의 죄 탓인가, 그마저도 아니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탓해야 하나. 혹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를 허락하신 것이라면, 대체 그 영광은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이 말한 신께서는 나를 모르셨습니까?”
“아니요.”
“혹은 나를 구해주실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까?”
“아니요.”
“혹은 내가 죄가 많아서? 혹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전생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죄 때문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설령 죄가 더 많았다고 하더라도 구원하시려고 노력하실 분입니다.”
여기에서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분명 더 궁금증이 많겠지만 라이텔바흐도 감히 더 묻지 못했고, 플레먼도 친구에게 상처를 줄까 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일단 여기에 이르기까지 대답을 갈구하는 마음이 확장된 것만 해도 기적일까.
사실 플레먼으로서는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평생 하나님을 숨긴 채 살아가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씻을 기회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양심으로 즐거워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이 불편했는데, 이는 라이텔바흐가 이해하지 못한 그 설움 서린 질문들에서 갑갑한 심정을 공감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마음에 믿어지게 되었지만, 아직 그 울타리 밖에 있는 자에게 이 풀리지 않는 숙제는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자신이 과연 그의 깊은 한과 애통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가. 능력의 여부도 문제지만 자격 여부로 인해 위축감이 들었다. 허락만 된다면 그를 위로하고 싶으나 이것이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실타래 같아서 막막하기도 했다.
|
이전회
116회 고통받는 이유 |
다음회
118회 제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