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회 초인들의 세계 Ch 2. 과거 이야기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7.30 | 회차평점 0 |
Chapter 2. 과거 이야기
거실에 들어온 성한은 바닥 위에 앉았다. 유진과 윤혁도 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성한은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윤혁이 조용히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아빠. 정말 저분께서⋯⋯.”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배다른 형제의 출현이라니.
지금 자신도 당황스러운데 부모님은 얼마나 더 할까?
“사실 나 역시도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단다.”
“전혀 모르셨다고요?”
본인도 모르는 아들이라고?
“그래. 하지만 분명 저 사람의 말이 맞을 거야.”
아버지는 순순히 인정하였다. 이로서 이중 검증이 완성되었다.
“여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정말 미안해.”
“솔직히 말해서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한쪽 이마를 짚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한테는 한 번도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없었잖아요.”
“정말로 미안해. 우리가 아직 만나기도 전의 일이었어. 변명 같겠지만 나도 그녀에게서 아이가 생겼을 줄은 몰랐어. 그날 이후로는 그녀도 단 한 번도 찾아오거나 연락한 적이 없었거든.”
“당신 말은 믿어요.”
유진은 남편의 정직성을 믿었기에 이 당황스러움을 수용해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설명이 필요해요. 가족들에게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 미안해. 윤혁이 너에게도. 이제는 다 말해줄게.”
윤혁은 혼외자식이니 하는 얘기는 자신들의 가족과는 무관한 소설이나 드라마의 일이라고만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이제는 버젓이 현실이 되었다. 내심 존경했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약간은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정을 듣고 정황을 올바로 이해하고 싶었다. 오해 먼저 품고 싶진 않았다.
‘엄마도 많이 놀라셨겠지?’
어머니가 너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먼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리라.
“아빠, 저는 잠시 나가 있을게요. 엄마랑 먼저 이야기해도 좋아요”
부모님을 배려할 생각으로 윤혁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너도 알 권리가 있어. 그렇죠, 여보? 아이에게 숨겨서 괜한 상처를 줄 생각이 아니면 얘도 같이 듣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유진이 다소 냉정한 태도로 선을 그었다.
“알겠어. 윤혁아, 너도 여기 앉으렴.”
이에 윤혁은 다시 앉아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빠가 실망스럽겠지만 얘기를 들어주렴.”
***
지금으로부터 약 반세기 전.
당시는 국가 간 대립이 한창 심화되던 때였다.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외국에서는 전쟁에 관한 소식들까지 들려왔다. 각국의 여러 거대 세력들은 법의 한계를 무시하고 횡포를 부리기도 했고 권력과 자본에 힘입어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 성한은 부패한 자들과 맞서는 법조인이었다.
성한이 아직 어렸던 시절, 세계의 리더인 위버멘쉬(Ubermensch)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수백 년간 암약했던 세계의 암 덩어리를 척결했고, 국가 간의 경제 문제를 해소했고, 탁월한 과학 기술을 통해 인류 복지와 환경 문제를 해결했던 자. 전쟁과 테러와 국가 대립을 제거하여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던 영웅. 그런 그의 죽음은 혼돈으로의 회귀로 직결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제국이 여러 갈래로 붕괴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 ‘혼돈의 시대’는 사람의 악이 충만히 발현된 시대였다. 성한은 사람들의 악한 본성에 실망했고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꿈을 꾸었었다. 위버멘쉬의 제국을 한 조각이라도 더 나누어 갖겠다고 국가들과 조직들이 서로 다투며 부정부패를 일삼던 시대. 그렇기에 강력한 심판이 절실한 때였다.
영특했던 성한에게 법대를 졸업해 검사가 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실무적인 실력에서도, 업적에서도 그는 완벽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정받고 빠른 승진을 하고 출세를 해도 일개 검사의 능력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관료주의와 정경유착, 사법부의 부패와 카르텔 형성, 보이지 않는 비밀들과 재화의 은밀한 운용들까지, 그가 몸담은 국가 조직은 생각보다 심하게 썩어 있었다. 부패가 척결되었던 21세기 당시의 ‘위대한 개혁’은 이미 도루묵이 되었고 한 세대도 채 안 지나 사회는 빠르게 썩어버렸다.
젊은 검사였던 성한은 하나의 쓸 만한 부품으로써 윗선에 이용당했다.
권력층의 도구로 쓰이는 삶에 그는 깊은 환멸감을 느꼈다.
그러던 무렵 그의 눈앞에 운명적으로 그 여인이 나타났다.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던 여신 같은 외모, 미래를 내다본다는 엄청난 혜안, 범인들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특출한 천재성과 두뇌, 거대한 야심과 행동력, 그리고 나름의 정의관을 갖고 있던 그녀. 그녀의 이름은 라일라 라흐블뤼크였다.
위버멘쉬 사후에 그의 제국은 수십, 수백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었는데 라일라는 그중 한 조각을 쥐고 있었다. 혼돈의 시대는 그녀 같은 ‘개인’들이 국가들을 압도하던 시대였다. 그런 유력한 그녀가 그 작은 나라에 온 것은 그녀의 여러 정치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에 뿌리내린 경쟁 카르텔들의 세력들을 약화시키고 장래 발판을 위해 국가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 복수의 목적. 그녀는 그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녀는 냉정한 정의의 여신인 동시에, 혹독한 네메시스였다. 영웅 심리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자기 신념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그녀는 세계 각국에 자신의 수족들을 심어두고 자신을 따를 신세력을 모았다. 주로 젊고 유능하되 든든한 백이 없고 야망만 큰 사람들 위주로. 그런 기준에 성한은 매우 적절했다. 덕분에 그는 그녀 눈에 발탁되었다.
라일라를 만난 성한은 곧 그녀의 아름다움, 지혜, 야망, 매력에 매료되고 말았다. 마치 신도들이 교주에게 빠지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끌림. 이에 그녀는 성한을 자신의 여러 도구 중 하나로 사용하여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좀 더 수월하게 이루려고 했다. 그녀는 그를 유혹했고 자기 이상과 계획을 숨김없이 밝혀 동조시켰다. 평소 부패한 한국 내 권력층과 외부 카르텔을 증오하던 강성한과 그들을 제거하려던 라일라는 완벽하게 합이 맞았다.
그들의 관계는 점점 사적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동경으로 시작했던 감정은 차츰 변질되었다. 성한은 라일라에게 간택을 받고 싶어 했다. 라일라 역시도 성한에게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인간성을 철저히 억누르고 영웅으로서 승천하기만을 원했던 그녀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애에 대해 일절 생각지 않았던 그녀는 처음으로 변덕을 부렸다. 그녀는 남성에게 욕망을 품게 되었다. 유능한데다 젊고 잘생기고 체격도 건장한 남자. 게다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야심가. 욕망을 채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이윽고 둘은 불꽃 튀는 강렬한 에로스를 공유하였다.
다만 그 관계는 결코 대칭적이지 않았다. 라일라는 여전히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불편했다.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녀의 세상에서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한을 자신에게 복종시켰고 자기 뜻대로 끌고 다녔다. 반면 성한은 맹목적으로 라일라에 매료되었기에 자존심을 놓고서라도 그녀와 함께하는 편을 택했다.
결국, 불안정한 관계는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성한의 일방적인 사랑은 무참히 배신당했다. 그녀를 도우려는 과잉 충성 때문에 선을 넘어버린 그는 결국 꼬리가 밟혀 국가의 처벌을 받아 교도소에 갇혔다. 이렇게 성한이 모든 지위와 명성을 잃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도움은커녕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를 버리듯이.
끝없는 야욕의 희생양이 된 성한은 사랑도 잃고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은 채 추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배신감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결국 자기 야망에 눈이 멀어 자초한 자업자득이라 탓할 사람도 없었다. 버려진 성한은 외롭게 하루하루를 보냈고 끝내 빈손으로 출소하여 사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이것으로 라일라와의 인연은 끝났노라고, 앞으로 그녀와 만날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녀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
“하지만 그녀가 내 아이를 갖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때 라일라는 결혼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아마 자기 자신의 자유와 야망을 예속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성한과의 뜨거운 연정도 어디까지나 짧은 기간의 변덕에 불과했다. 게다가 둘은 서로를 욕망하던 사이였지만 대부분은 끝까지 가보지 못한 채 중도에 멈췄고 실제로 몸을 완전히 결합한 관계를 나누었던 건 단 한 번뿐이었다.
“그 당시는 당신을 만나기 5년 전이었지.”
딱 한 번의 관계 직후 성한은 라일라에게 버림받아 4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출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진을 만났다. 둘은 2년간의 만남 이후 순탄히 결혼에까지 이르렀고 몇 달 만에 윤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문밖에 있는 저 혼외 자녀는 불륜과는 무관하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도 이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고는 했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죠? 저 역시 당신의 과거를 묻고 싶진 않았지만요. 혹시 옛 애인에 대한 기억이 나빠서 언급을 피했었나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수치스러웠어.”
과거의 성한 자신이 탐욕과 명예욕에 눈먼 실패자였다는 사실을 자식과 부인이 알게 되면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했던 점이 있었다. 단 하룻밤 만에 아이를 갖게 될 지극히 낮은 가능성이었다. 솔직히 성한은 그때 아이가 생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령 아이가 생겼더라도 라일라라면 지웠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제약받기를 지극히 싫어하는 사람이고, 아이를 좋아할 만한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미안하다. 아빠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어서.”
윤혁은 침묵했다. 평범한 외모인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워낙 미남인지라 사실 과거 연애사가 단순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짐작은 했다. 내심 아빠가 탁월한 두뇌를 갖고 있으면서 왜 가정주부 역할에만 만족하는지도 궁금했었다. 과거 사연을 듣고 나니 그 궁금증이 조금은 해소되었다.
“농담하기는 죄송하지만⋯⋯, 드라마처럼 복잡한 과거사셨네요.”
심각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을 시도해봤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윤혁은 머쓱해 하며 헛기침했다.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걱정과 달리 아빠가 불륜을 저지르신 것도 아니니까요. 혼외자식의 존재는 아예 모르셨으니 속인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잘못한 건 사실이야. 너무 경솔했다.”
윤혁의 가정은 현시대에 않는 몇 안 남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이었다. 자연히 그들은 결혼관과 성 가치관에 있어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했다. 어렸을 때부터 신실한 신자였던 유진과 그런 그녀를 만나 믿음을 갖게 되었던 성한. 둘은 윤혁을 양육할 때도 성경의 원리를 최우선 원칙으로 삼았다. 과도하게 개방화된 현재 세상에서는 고리타분하다며 비웃음을 살 법도 싶었지만, 윤혁의 가정은 이를 조금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이었잖아요.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죠.”
윤혁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거듭 돌아보며 분위기를 풀려 노력했다.
“두 분 좀 더 대화로 오해를 푸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죠, 엄마?”
유진은 잠잠히 성한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실망하거나 울거나 욕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놀라우리만큼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더 숨기는 것은 없죠? 그게 내가 알아야 할 전부죠?”
“응, 여보.”
유진은 한숨을 쉬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탓해서 어쩌겠어요. 일부러 속인 것도 아니고요.”
조마조마해 하던 성한은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화내진 않을게요. 그래도 좀 더 이야기해요. 윤혁아, 잠시 자리 좀 피해줄래?”
아마도 곤혹스러운 해명의 시간이 좀 더 이어질 성싶었다.
“알겠어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기꺼이 따라야 한다.
“저는 잠깐 산책 겸 밖에 나가 있을게요.”
윤혁은 일 층으로 내려왔다. 바깥에는 그 미남자, 카이젤 라흐블뤼크라는 사람이 아직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족끼리 대화하느라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둔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강윤혁이라고 했던가?”
금안의 사내가 윤혁을 보고 나직이 질문했다.
“아, 네, 맞습니다.”
“그럼 네가 이복동생이 되겠군.”
“⋯⋯네.”
카이젤은 무표정하게 윤혁을 응시하였다. 그는 오래간만에 흥미로운 것을 발견해서 나름 즐거운지 눈을 선명하게 빛내고 있었다. 윤혁은 문득 그의 고혹적인 눈이 아름다우면서도 쓰라릴 정도로 고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대학교 다니는 중인가?”
“네, 기계공학 전공입니다. 이 근처 Y대에 진학 중입니다.”
“그런가? 마침 나도 공학에 취미가 있는데 말이지.”
“공학 전공이신가요?”
“그것도 포함해서 이것저것 다 조금씩 하지.”
문득 윤혁은 형이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경제, 정치, 공학, 자연과학, 사회학, 철학, 군사 전략 같은 것도 다룬다.”
모르긴 해도 굉장히 대단하신 분 같았다.
‘세계적인 천재이신가 보네?’
“그리 대단한 것도 없지.”
속마음을 읽은 듯이 툭 던지는 말에 윤혁이 움찔 놀랐다.
‘그러고 보니 누구시지?’
그렇게 대단하고 바쁜 사람이라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질 법도 할 텐데?
“혹시 방송에 나오신 적은 없으신가요?”
“지구의 대중에게 노출되는 건 귀찮아서 싫어한다.”
“하긴 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봤다면 제가 분명 기억했을 것 같아요.”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는군.”
딱히 띄워주거나 아부했던 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말했을 뿐.
“어떤 의미에서는 난 네가 조금 부럽군.”
“저를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저 사람이 평범한 사람을 부러워할 일이 있을까?
“네겐 가족들이 다 있으니까. 아버지께서도 네 어머니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서 만난 것 같고. 게다가 가족 구성원들 간의 신뢰도 탄탄한 것 같군.”
그제야 형이란 사람의 말을 조금은 이해했다. 아무리 잘나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결국 그는 혼외자식의 신분으로 여기 찾아왔다. 가족들 사이에 결코 녹아들 수 없는 이방인. 아버지의 부재란 그에게 큰 공백일지도 모르겠다. 윤혁으로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서 공감을 표할 수 없었다.
“과연 나는 한순간의 불꽃 같은 욕망의 결과물인 것 같군. 그리고 어머니는 후세에 남길 후계자로 나를 만들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그의 몹시 자학적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가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비참하다는 느낌도 없고 그저 담담해 보이는 어투였다. 딱히 동생을 질투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공허해 보이기도 했다.
“저기, 어떻게 말해드려야 할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아이로군.”
무례하게 공감하려 들거나 이해하는 척하는 사람은 썩 좋아하지 않는데.
“너는 나쁘지 않군.”
사납거나 날이 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카이젤의 태도는 어딘가 모르게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혁은 불편감에 주눅이 들었다. 처음 만난 아버지, 그를 막상 찾아오니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는 모습, 자신과는 무관한 아버지의 소중한 사람들, 그런 광경들이 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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