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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4회 초인들의 세계 Ch 2. 과거 이야기 (2)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7.30 | 회차평점 0 0

 

 

 

 

***

 

 

 

  성한이 기억하는 유진과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당시 그는 그녀를 어느 식당에서 만났다.

  4년간의 옥살이를 마친 후 출소했을 무렵, 성한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예전 직장 동료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존재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평생 쌓아온 경력을 잃어 재기할 기반조차 없었다. 그는 정착할 생각도 없이 정처 없이 바깥을 돌아다녔다. 살이 많이 빠져서 탄탄했던 몸도 야위었다.

  후회해도 잃어버린 것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욕망의 화신을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그런 생각을 했다.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고 자신을 향한 양심의 슬픈 울부짖음이 그를 괴롭혔다. 더는 분을 낼 힘도, 앞길을 다시 정하기 위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허기에 지쳐 집과 가까운 곳의 음식점에 들어갔었다. 아마도 고뇌에 빠져서 제대로 숟가락도 들지 못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당시 그곳에서 이미 5년 이상을 일하면서 요리 실력을 한창 인정받고 있었던 유진은 매일 같이 찾아오는 성한의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왜 그리 혼자서만 고민하고 계세요?”

  “…….”

  “한 번 털어나 봐요. 혹시 알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내버려 두라는 차가운 대꾸에도 그녀는 계속 친절하게 다가오면서 그의 삶에 침투했다. 나중에는 그것이 왠지 싫지 않아졌다. 그래서 성한은 그냥 유진이 다가오도록 허용했다.

  “고맙지만, 날 위로해주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무 늦었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난 평판도, 인간관계도, 사회적 지위도 전부 잃었거든.”

  잘난 삶을 살아왔던 인간은 그것을 잃었을 때 자기 패배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법. 원래부터 형편이 어려웠던 유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남자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자신도 가슴이 무언가에 찔리는 듯 아팠다.

  “이런 말을 한다고 위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잖아요. 잠시 찾아오는 축복이 있다면 어떨 때는 상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아직 자기 자신을 다 잃은 건 아니잖아요.”

  물론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런 서툰 위로의 말이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성한에겐 아무 실리적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그저 같은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성한은 끼니마다 꼬박꼬박 유진의 일터를 찾아왔다. 그녀는 몰래 서비스까지 내다 주면서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야윈 모습이 안타까워서 잘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덤이었다. 이러한 친절은 그의 내면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건강을 회복하면서 성한은 보기 좋은 모습이 되어갔고, 낙담에 짓눌린 표정도 사라졌다.

  그 후로 성한은 그녀를 도와 같이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리트였던 그가 궂은 잡일을 하기란 영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둘의 사이가 꽤 가까워지자 유진은 그녀가 그를 이전부터 줄곧 알고 있었음을 밝혔다. 성한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둘은 사실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다. 밝고 친절한 성격 말고는 특별히 별 볼 일 없던 소녀, 그와 반대로 최고로 우수한 성적에 외모까지 완벽했던 학생회장 선배. 유진은 성한을 보고 줄곧 동경했었다. 당시에는 용기가 없어서 고백까지는 못했었지만.

  “지금 와서 말하려니 좀 쑥스럽네요.”

  “그러게.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면 지금은 어떨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의외성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소녀 시절의 수줍음을 극복하고 용기 있는 여인으로 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그때보다 성한과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이제는 오히려 성한에게 대답할 용기가 없었다.

  “잘 모르겠는걸.”

  그럼에도 둘은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그는 그녀의 헌신적인 면모와 성실함, 긍정적인 에너지에 점점 더 매료되었고 마음을 더 깊이 열어나갔다. 결국, 성한은 유진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둘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에 성공하고 아이까지 가졌다.

  특별한 구석이 없는 유진이었지만, 친절한 성격과 오래 연마해온 요리 솜씨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과거에 검사로 일하면서 저축해둔 기반이 있던 성한과 함께 둘은 식당을 내어 운영하였고 소박하게 장사를 시작했다.

  유진이 사람들을 맞고 요리를 장만하면, 성한은 필요 시 식료품 조달, 배달, 서빙, 청소 등을 하는 방식으로 일을 분담했다. 최첨단 자동화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운영되는 부부의 사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목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로 인한 훈훈한 향수 때문이었으리라.

  결혼 후에는 아이까지 태어났다. 윤혁을 양육하면서 일까지 하려니 조금은 힘에 부쳤지만 두 부부는 힘을 합쳐 여러 우여곡절을 잘 이겨내었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였고 아이를 생각하며 살아갈 용기와 힘을 받았다.

  혼돈의 시대가 끝나고 세계 각국이 폐허와 공황을 회복해가던 시기, 가정적이고 정겨운 분위기의 유진의 식당은 많은 호응을 받게 되었다.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긴 가정은 안정화되었고 부부의 마음에도 평안함이 찾아왔다. 유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형편을 잊을 수 있었고, 성한도 실패감과 좌절감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더 예전의 찬란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도 만족하며 감사했다.

  그리고 윤혁은 천성이 바르고 착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아이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했으며, 친구들에게는 올바른 모범이 되었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투성이였다.

  “내 삶을 바꾸어 준 건 바로 당신이었어. 그때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자신을 파괴하면서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겠지. 과거를 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신 덕이야. 윤혁이를 잘 기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성한과 유진은 지난날들을 회고했다.

  “과거는 그저 털어버리고 싶지만, 생각처럼 간단치는 않네요. 당신의 실수가 단지 당신의 기억으로만 남는다면 상관없겠지만, 당신이 남긴 그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윤혁이도 속으로는 혼란스러울걸요. 성격이 우직하고 모난 데 없어서 어떻게든 부모를 이해해보려 노력하고는 있지만요.”

  유진의 지적에 성한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내가 그 사람과 잘 이야기해볼게.”

  “이것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일까요? 전 제가 상처받는 것이야 언제든 잊을 수 있겠지만, 아이들이 받을 상처가 걱정돼요. 분명 씻기 어렵겠죠.”

  그제야 성한은 밖에서 기다릴 또다른 아들의 마음이 심려되었다.

  “아마 부족함은 없이 잘 자라났을 거야.”

  라일라는 대단한 부유함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래도 아버지란 존재의 공백이란, 가볍지 않은 법이에요.”

  “그렇겠지.”

  “자존심 세우지 마시고 그 사람에게 사과하고 다 털어놓아요.”

  자신이 느낄 배신감보다도 오히려 생판 모르던 타인의 마음을 먼저 신경 쓰는 태도. 그것이 유진의 심성이었다. 예전과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런 면이 조금 답답할 때도 있지만 성한 보기에는 그것이 아내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알았어, 여보. 너무 걱정하진 마.”

  “잘 해결하고 와요. 윤혁이에게도 잘 설명해주고요.”

  성한은 곧바로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아들을 만나러 나갔다.

 

 

 

 

 

***

 

 

 

  “이야기가 길어지신 모양이었군요.”

  일 층으로 내려온 성한을 보고 카이젤이 다소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복동생이 재미있는 친구더군요. 놀아주고 있었습니다.”

  “그래.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따로 봐도 되겠니?”

  문득 윤혁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상당히 닮은 점이 많음을 느꼈다. 차이가 있다면 카이젤에게는 이국적인 혼혈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고, 더 세련됨이 있었다. 자신과 아버지도 닮았지만, 아버지와 형은 또 다른 공통분모가 있었다. 윤혁은 둘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2층으로 올라갔다.

  “저기……, 잘 지냈니?”

  잘 지냈냐는 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제 커리어와 일상생활을 의미하신 질문이시면, 그렇긴 합니다.”

  ‘물론 아주 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요.’

  “그렇구나. 나이는 아마 스물여덟 살이겠지?”

  “지구 기준으로는요. 아버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성한이 먼저 얼음장을 깨트려보았다.

  “라일라, 아니 네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시니?”

  “아, 따로 소식을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냉담한 대답에 성한의 심장이 덜컹 떨렸다.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니?”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타계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의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고 모든 질병을 완치하는 것마저 가능해진 시대이다. 이런 때에 부유한 사람이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는다고? 가능한 경우의 수는 둘뿐이다. 사고사 아니면 타살.

  “그런⋯⋯. 모르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아버지와는 무관한 사람 아닙니까.”

  “네게는 아픈 기억이잖니.”

  “그랬던가요?”

  그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거렸다.

  “상실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큰 아픔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낳고 길러주셨지만,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저는 후계자 이상의 의미는 없었으니까요. 항상 더 강하고 완벽한 자가 되어서 최고의 영웅 혹은 최고의 지도자가 되라고 강요했죠.”

  “저런. 힘들었겠구나.”

  “아뇨,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제 성향과 잘 맞았거든요. 다른 아이들이 부모의 애정과 친절을 받았다면 저는 그 대신에 완전무결한 존재가 될 때까지 훈련을 받았다는 차이점이 있으려나요?”

  성한은 라일라의 성향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녀는 늘 스스로 우수한 지도자, 공공선을 이룩하는 혁명가가 되고 싶어 했었다. 인간을 넘어선 경지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동경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항상 동경하며 언급했던 사람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브께서는 황홀할 정도로 완벽해. 나 같은 건 발버둥을 쳐야 겨우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시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약한 감정에 빠지셨지. 너무나도 안타까워. 난세를 정리하실 최고의 영웅이셨는데.”

  문득 그녀의 말이 기억났다.

  확실히 자녀를 키울 타입은 아니었지.

  ‘자녀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는 뭐라고 답했더라?’

  “내 아이나 후계자 같은 건 별로 관심 없어. 하지만 만약 얻는다면 그 둘을 넘는 최고의 걸작을 만들고 싶어. 그분보다 뛰어난 리더, 그녀보다 강한 혁명가. 세계를 다스릴 뛰어난 작품을 내 손으로 길러낸다면 어떨까?”

  그래. 라일라는 각 시대의 영웅들을 광적으로 존경했다. 또 그들을 뛰어넘을 만한 후계자가 출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자기애가 강한 그녀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았기에 위대한 영웅의 도래를 늘 고대하고 있었다.

  “내가 만일 그런 씨앗을 품을 수 있다면 그건 큰 영광이겠지. 하지만 실망스러운 작품을 안을 바에야 차라리 자녀 같은 건 갖지도 않는 게 나아.”

  그녀의 아이에 대한 사고관은 일반인과는 아예 달랐다.

  성한과 한창 스파크 튀는 연정과 욕망을 나눌 때는 이런 말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남자들이란 모두 시시했지. 그저 사리사욕에 물든 돼지들이거나, 능력도 없는 쭉정이들뿐이었지. 어느 놈이건 별반 다르지 않고 똑같았어. 그런데 가끔 너라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또는 이런 식으로 유혹했었지.

  “어쩌면 당신의 아이를 갖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게 그런 직감이 들어. 예전부터 직감만큼은 믿을 만했거든.”

  라일라는 정말 자신이 원했던 대로 온전히 우수한 존재를 키워내는 데에 성공한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녀를 꼭 닮은 금색 눈동자, 그리고 특유의 오드아이까지. 눈앞의 사내에게서는 확실히 비범한 능력이 느껴졌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럭저럭 괜찮았단다.”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만.”

  “고맙긴 하지만 지금껏 큰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카이젤은 이야기를 더 빙 돌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전에 수감되신 적이 있던 데, 어머니와 관련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훅 찔러 들어오는 예리한 질문에 성한이 머뭇거렸다.

  “말씀하기 곤란하신 점은 이해합니다만, 저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전후 사정도 얼추 파악했죠. 혹시 그 일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저 역시도 배후 사정을 알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역시 그렇겠지.”

  성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자신이 라일라와 어떤 곳에서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서 상세하게 과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일부터 해서 그녀가 어떤 계략을 꾸몄는지, 그것을 위해 성한 자신이 무엇을 희생하면서까지 충성했는지도. 그는 당시 정세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부분까지도 털어놓았고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도 밝혔다.

  과거 그가 섬기던 검찰 집단은 그녀와 대척점인 세력의 밑에 있었다. 성한은 그 밑에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법조인이 해서는 안 되는 음모도 꾸몄고, 국가를 배신하는 일에까지 연관되었다. 복잡한 정치 싸움으로 더럽혀지면서도 그녀에게 도움 되는 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과잉 충성은 실수가 빚었다. 그가 일을 그르침으로 말미암아 계획이 뒤틀리자 실망한 라일라는 그를 과감히 잘라냈다. 희생양이 된 성한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정죄의 화살을 한 몸에 맞아 비참히 쓰러졌으며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당시 그녀는 이미 그의 아이를 배었음에도 냉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를 외면했다.

  “그녀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카이젤은 어쩐지 이를 가는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면 그 이상은 책임지지 않죠.”

  옅은 진노가 그의 표정에 서려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당신 쪽이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군요.”

  “내 주제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니.”

  카이젤은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들춰낸 과거의 일들은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실망스러웠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 그녀는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젊은 남자를 마음껏 이용하고 부려 먹은 후 우수한 씨를 챙기자 더 돌아보지 않고 토사구팽하였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단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어.”

  “하! 속도 편하시군요.”

  카이젤의 입에서 원치 않는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안다. 아버지 쪽은 오히려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은 피해자다. 그러나 어머니를 질책하자니, 이미 떠나버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혈육이라고는 아버지와 동생뿐인데 자신은 그들에게 결코 반겨질 수 없는 존재이며 옛 욕망의 잔재에 불과했다. 이를 확인한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상처뿐인 기억을 더 들춰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듯했다.

  “어쩌면 제가 찾아온 일 자체가 실례일지도 모르겠군요. 이만 마치도록 하죠.”

  “밤이 늦었는데 괜찮겠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이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갔다.

  “찾아온 것이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그래, 미안하다. 조심히 가렴.”

  문밖으로 나선 손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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