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6회 초인들의 세계 Ch 3. 괴물들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2.07.30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이왕 오셨으니 몇 개만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의 성격을 잘 아는 성운은 알아서 그의 관심사에 맞춰주었다.
“완전형 자가 증식 기계 모델이 이제 XII 단계까지 실증 완료되었습니다.”
성운이 머무르고 있는 한국 소재의 기업들에서는 주도적으로 시행 중인 최첨단 프로젝트가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이탈 메카닉(Vital Mechanic)' 프로젝트, 초소형 로봇들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번식시켜 자가 증식 및 진화를 유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임의의 모든 거대 기계를 재생산해내는 기술이었다. 마치 세포가 증식하여 생체 조직과 기관을 구성하는 것과 같았다.
“잘 됐군. 곧 은하 전체를 먹어 치울 예정인데 약간은 보탬이 되겠어.”
바이탈 메카닉 기술을 조금 더 업그레이드시킨 뒤, 자원을 탐색, 채취, 가공하고 신소재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을 첨가한 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초소형 기계들을 조종하는 클라우드 자동화 프로그램까지 첨가한다면 살아있는 생태계처럼 번식하고 진화하는 기계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이전에도 이미 비슷한 부류의 시스템을 여럿 만들어왔지만, 자연적 생명 체계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 되는 효율성을 창조해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만간 외우주에다가 쏘아 올려도 되겠군.”
“지금보다도 더 먼 곳까지 진출하실 작정입니까?”
“이미 다 알면서 뭘 물어보는가?”
벌써 인류는 지난 10년 사이에 광자에 의존하지 않는 확률 관측형 장비를 대거 쏘아 올려 은하 전역을 덮어버렸다. 여기에 더해 준-영구 기관도 개량했으며, 항성계 침식형 자율 기지, 테라포밍(환경 조성) 기술, 대기권 보호막, 시간 압축 기술까지 완성했다. 안정적인 확장 게이트들이 은하 너머까지 건설되었고 지구 내 동토의 광범위 게이트 시설물과의 동기화가 완료되었다.
“보스의 부지런한 정복욕은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이미 세계는 온갖 연구와 산업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폭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10년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괄목 적인 발전과 향상. 꽤 흡족할 만한 수준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눈앞의 야심 넘치는 남자는 고작 그 정도 수준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구, 태양계에 이어서 이제는 은하계까지. 아직도 부족하십니까?”
성운이 순수한 경탄과 경의로 질문했다.
“100년 전의 초대째 위버멘쉬도 비슷한 과제로 씨름하고 있었지.”
카이젤이 대답했다.
“좁아터진 행성에 갇혀 있는 채로는 한계가 있었어. 수용 가능한 인구는 한정적이고 말이야. 기껏 태양계 몇 군데를 개척하긴 했지만, 거기서 아무리 자원을 채취해도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 축적된 엔트로피도 문제였고. 좀 더 먼 곳까지 뛰어넘기만 했다면 해결했을 문제였는데.”
그는 손짓으로 가벼운 홀로그램을 허공에 그려냈다.
그 자료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우주 개척사를 나타낸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한계에 봉착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두고 볼 일이지. 우리가 과연 우리 은하 하나만으로 지금 문명을 지탱할 수 있을까? 한계에 갇혀 있는 이상 언젠가 똑같은 문제에 봉착할 거야. 그렇기에 우리는 그저 진전할 뿐이지. 높은 곳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어.”
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려 했다면, 카이젤은 그 숙원을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신에 대한 도전인지 순수하게 인간을 위하려는 마음인지는 그 자신도 잘 몰랐다.
“과거에 인간들끼리 서로 싸웠던 건 좁은 영역으로 자신의 한계를 규정했기 때문이야. 욕망은 넘쳐나는 데 가질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정작 저 바깥에는 모두가 풍족하게 가지고도 남을 소유가 있는데 말이야.”
홀로그램의 지도 범위는 끝없이 확장되었다. 은하를 넘어 우주까지.
“바깥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돼.”
이에 성운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보스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가끔 저도 헷갈립니다. 인류 전체의 유익과 분배에 합리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걸 보면 매우 이타적인 것 같으면서, 동시에 끝없이 바깥을 탐하는 것을 보면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도 있지. 원래 자기 집단을 위하려는 마음이 극단적으로 늘어나면 누구든 이기적으로 변하게 되는 법이야. 나는 단지 내가 챙길 울타리의 범주를 인류 전체로 품을 뿐이고.”
인류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우주로부터 더 많이 뺏어온다.
그것이 그가 세상을 지탱하고 경영하는 방식이었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은 당신의 울타리에 포함되지 않는 겁니까?”
“뭐, 지구의 동식물들까지는 포함해주지.”
아마 카이젤 라흐블뤼크처럼 역설적인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무소유 찬미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단기안적인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는 거대한 부를 지녔음에도 그 부를 세상에 늘 환원하였다.
그가 욕심이 없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재산을 수복해 채우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도 쉬운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현 인류의 소유 절대량이 인간의 수요를 압도하기에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에 제한된 파이에서 자기 것의 비중을 늘리는 일은 너무나도 시시했다. 그래서 그는 파이의 전체 크기를 증가시키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럴 만한 탁월한 능력은 차고도 넘쳤다. 덕분에 그가 지닌 극한의 이기심은 결과적으로는 이타적 모습으로 표출되었다.
‘하긴, 그렇기에 더 매혹적인 분이지.’
메인 메뉴가 도착했다. 보통보다 확연히 많은 양이었다. 두 사람 다 남들보다 월등히 건장한 체격을 지닌데다가 막대한 운동량과 두뇌 회전량 때문인지 에너지 소모도 많았고 식사량도 많았다. 체지방으로는 조금도 흘러들지 않고 오로지 근육으로만 흡수되는 축복 받은 체질인 덕도 있었지만.
둘은 천천히 식사를 나누며 여러 공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그렇고, 한국에 오신 진짜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운이 대화의 주제를 사적인 방향으로 틀었다.
“그냥 기분 전환 차 왔다면?”
“보스 성격상 다른 목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놀러 올 수도 있지 뭐.”
카이젤은 능청스럽게 딴청을 부렸다.
“애초에 이곳은 관광하기에 썩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성운이 딱 잘라 대답했다.
“자국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군.”
카이젤은 그의 반응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말이지. 가정사와 관련된 일이다.”
“라일라 씨에겐 별다른 일가친척이 없던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쪽이 아니라 부친 쪽.”
이제야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오랫동안 미뤄두시더니 드디어 찾으신 겁니까?”
성운도 보스가 동양인 혼혈임은 알고 있었으나 한국 쪽인 줄은 몰랐다.
“성운 네가 나한테 개인적인 관심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군.”
“……일은 그럼 잘 해결된 겁니까.”
성운은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스레 물었다.
“뭐랄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
평범한 가족. 첨단 문명의 발전과 세계의 격변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듯 온정과 겸허함과 순수함을 간직하던 세 식구. 카이젤에게는 매우 낯설고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그는 자신과는 전혀 달라 보였던 젊은 청년이 떠올랐다.
“다행히 꽤 흥미로운 것을 하나 발견했어.”
“보스의 이목을 끌 정도라면 분명 아주 흥미로운 사람이겠군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야. 평범한 시민들이지.”
순간 성운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카이젤의 가족들이 조금 피곤해질지도 모르겠다고. 한번 눈에 들어온 흥미로운 소재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보스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카이젤이 다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야르베스가 세미온의 위치를 수색해냈다고 하더군.”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답니까.”
“어느 외딴 행성 중 중 한 곳이라더군.”
유성운은 조용히 상관의 말을 들으며 입을 가볍게 닦았다.
“그들이 분담한 일이 방주 프로젝트와 테라포밍이었던가요?”
“그래, 이제 슬슬 계획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지.”
“식민지 개척도 본격적이군요. 현재 몇 개 정도의 행성이 후보지에 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이내에 테라포밍 완성 가능한 후보가 약 오백 개, 4년 정도 여유를 두면 약 4만 개 정도. 하지만 후보군은 더 많아.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따라서 훨씬 더 빨리, 더 많은 행성을 확보할 수도 있지.”
“그에 상응하는 안정적인 교통로와 통신 네트워크는 확보하셨습니까?”
“최근에 문제점을 해결할 알고리즘을 찾았다.”
“놀랍군요.”
“올해 안에 곧바로 민간에서도 적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풀 예정이다.”
사실 은하계 영역 전체를 실시간으로 조율할 양자 통신 기술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물리 이론의 상충 때문에 아직 약간의 오류가 섞여 있었을 뿐. 그런데 그걸 그렇게 손쉽게 해결해버리다니. 보스께서 이례 없는 천재임을 잘 아는 성운도 이런 경이로운 처리 능력을 볼 때면 매번 다시 놀라게 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건만.”
“보스께서는 공상 과학에서나 나올 일들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괴물 중의 괴물이시죠. 말도 안 되는 그 두뇌도 두뇌지만, 될 일과 안 될 일을 정확히 구분해내는 그 혜안과 지혜가 소름 끼치도록 두렵습니다.”
“너나 다른 로스트 엠페러들, 철인왕들, 바인 키퍼, 그리고 아크삼형제 녀석들도 비슷해. 보통 사람 눈에는 초인들이, 초인들의 눈에는 너희들이 괴물이지. 결국 나나 너희나 비정상적인 이물질인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 괴물이란 단어야말로 그들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정의해주는 낱말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알지도 못할, 흡사 괴물과도 같은 재능을 담은 이질적 부류. 성운은 씁쓸해하며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옳은 말이지만, 그래도 괴물이란 표현은 썩 마음에 안 드는군요.”
아무리 자신도 튀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보스한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눈앞의 저 사내는 그런 ‘괴물들의 괴물’들 위에서마저 완벽하게 군림하는, 한 차원 더 높은 거물이니까.
“슬슬 익숙해지는 게 좋아.”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친 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맛은 나쁘지 않았군. 다른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자주 찾아오시죠.”
문득 카이젤은 다시 이복동생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쯤 이런 데로 데려가 볼까?’
그때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있던 그를 부하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이 섹터에 얼마나 더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하루 이틀 정도? 혹시 둘러볼 명소라도 있으면 소개 부탁하지.”
“산지 쪽으로 찾아보시죠. 등산에 취미가 있으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성운은 인사를 마치고 수행원들과 함께 개인 수송선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재미없군, 유성운. 10대 때랑 크게 달라진 게 없어.”
카이젤은 등을 편하게 기댄 채 허공에 손짓으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데이터, 자료, 책들을 가볍게 읽어보았으나 이내 흥미가 떨어졌다.
‘요새 들어서 권태감이 더 자주 드는군.’
평소답지 않은 변덕스러운 감정 상태. 사실 이 나라를 방문한 일부터가 쓸데없는 변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엉뚱한 기행을 더 부려보기로 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일반인들의 네트워크에 강제 접속했다. 그는 마음만으로 은하 내 모든 시스템을 제집처럼 간섭할 수 있는 존재. 그에게는 단말기도 기계도 불필요했다. 곧 그의 통신 능력이 시차도 없이 즉시 반대편의 인간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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